<피고측 변호인인 '클래런스 대로우(좌측)'와 원고측 변호인인 '윌리엄 제닝스(우측)'의 모습>
-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이란, 미국에서 진화론을 학교 교육의 장에서 가르치는 것을 제한하는 법률, 이른바 반(反)진화 논법에 대한 일련의 재판을 말한다.
진화론과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의 대립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자주 거론된다. 특히 미국에서의 반(反)진화론 운동은 그 두드러진 예로 알려졌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성경책을 중시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지만, 특히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글자 하나하나가 역사적, 과학적 사실만을 담고 있다'는 방식의 '성경무오설(Biblical inerrancy,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음을 담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기독교 공교회 전통의 주요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원래 의미와 전혀 다르게 오용하기도 하는 기독교 용어다)'을 취하는 복음주의 보수파가 그 활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미국에서의 기독교 원리주의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원리주의자가 진화론을 문제 삼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시작된 공립 학교 교육과 관련이 있다. 아이들을 모아 전원에게 같은 커리큘럼을 가르치는 공립 학교에서, 생물 시간에 진화론을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서무오설에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쓰여 있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취급된다(그 때문에 근대 성서비평학의 견해를 부정한다). 모든 생물은 '신(창세기에서는 엘로힘)'이 세상을 창조하여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땅의 모든 짐승과 기어가는 것을 인간에게 다스리게 하고,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신(야훼)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이 사고방식을 창조론이라고 하며, 이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창조론자라고 한다). 따라서 자연계 진화의 결과로 사람이 탄생했다는 결론을 이끄는 진화론은 이들에게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이단 그 자체였다.
그 전까지는 진화론의 존재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던 창조론 측은, 자신들의 아이가 진화론을 믿는 것을 반대하였고, 나아가 학교 교육의 장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이후 여러 가지 수단으로 저지하게 된다.
<1910년대, 미국 공립 학교 교실 모습>
원리주의자의 활동은 1920년대 경부터 자유주의 영향 아래에서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자유주의화, 세속화의 방향으로 가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성서의 진리와 주요 교리가 무시되고 있는 상황을 고치겠다며 진화론 논쟁을 시작으로 운동을 펼친다.
그러던 중, 1923~1924년에 뉴욕을 무대로 진화론과 창조설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주요 논자는 '존 로치 스트라턴(John Roach Straton, 1875~1929)'과 '찰스 프란시스 포터(Charles Francis Potter, 1885-1962)'였다. 창조설의 논자였던 스트라턴은 칼파리 파프테스트 유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원리주의자였고, 진화론의 논자 프란시스 포터는 웨스트사이드 유니테리언 교회의 목사이자 모더니스트였다.
논쟁 첫날은 성경무오설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뤄졌다. 창조설의 논거로 된 성경무오설은 1880년대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성서는 신이 저자에게 영감을 주어 쓰게 한 것으로, 한 마디 한 마디가 올바르고 절대적·초자연적 권위'라고 했던 이 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여러 증거를 제시한 것에 대해서 역사비평의 비평가들에 의해 성경의 오류나 모순이 속속 발견되었다고 진화론 측인 포터는 성경무오설의 문제점에 대해 역사 비평적 견지에서 반론을 펼치며 성경무오설의 취약성을 주장했다. 또 성경의 초자연적 기원을 부정하고 그것을 '어느 시대 인간에 의한 창작'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성경의 절대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스콥스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 신의 법정(Inherit the Wind, 1960) 中>
2일째는 '진화론'을 중심으로 토론이 벌어졌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에 의해 체계를 갖춘 과학 이론인 진화론을 과학적 타당성, 증거의 신빙성 등으로 토론을 진행했다. 그러나 진화의 '기인(起因,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나 원인)'에 대한 명확한 타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획득 형질 유전을 주장한 '용불용설', 자연 선택을 주장한 다윈의 설, 양쪽 모두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1차 토론은 역사 비평적 견지에서 반론을 전개한 포터가 승리하였고, 2차 토론에서는 확실한 증거나 타당성을 내놓지 못한 진화론의 약점을 반증한 스트라턴이 승리했다
애초 원리주의자들의 움직임은 그다지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을 변화시킨 것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의 등장이었는데, 브라이언은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만 3번이나 출마했으며 미국에 부인 참정권과 누진 과세를 도입하도록 한 대중 운동가였다.
브라이언은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진화론만큼은 배척함으로써 이 사상이 비도덕적이고 악마적인 이론으로 보았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이지만, 여기에는 당시 다윈즘의 은유를 사회에 대입해 해석하려는 영향도 컸다. 하필 다윈의 진화론 사상은 그 당시 나치 독일과 미국 등의 '인종차별론'과 '우생학(종의 개량을 목적으로 인간의 선발육종을 찬성하는 생각)'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러한 사상이 미국에 퍼지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고, 반기독교적 이론(진화론)이 확산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원리주의자들과 결합하였고, 미국 각주 공립학교 교육의 장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잇달아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찰스 다윈의 풍자화>
이들 반진화 논법에 대해 재판을 통해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주도한 것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였다. ACLU는 표현의 자유 등 다양한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계속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률을 재판에 넘기기 위해 진화론을 실제로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체포된 지원자를 광고로 모집했다. 그리고 실제로 교육의 장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된 인물이 나왔는데, 테네시 주 데이튼에 있는 '레이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이과와 체육을 담당하는 '존 스콥스(John Thomas Scopes, 1900~1970)'였다.
그런데 스콥스는 과학적 사명에 불타 순교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ACLU의 광고에 응모한 것은 재판을 통해 마을의 지명도를 올리려던 얼굴마담 역할이었고, 스콥스는 그들의 부탁을 받아서 생물 수업 때 진화론의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을 했을 뿐이다. 또 스콥스는 켄터키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생물학이나 이과 교육의 전문적인 교육 과정을 받지 못했다. 스콥스는 원래 고등학교 축구팀 코치로 초빙된 것이고, 교사로서의 경력은 1924년 연말에 2주 정도 임시로 교원을 지냈을 뿐이었다.
검찰 측의 대표로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그리고 변호 측의 대표로서 유명한 변호사이자 미국민권자유연합의 선도적 회원이었던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Seward Darrow, 1857~1938)'가 나오게 된 결과, 이 재판은 미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1925년 7월 10일~21일까지 총 10일 동안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열린 스콥스 재판이다. 흔히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졌다.
<스콥스 재판이 열렸던 레아 카운티 법정>
결국 재판은 진화론 교육이 이루어졌는지가 아니라 성경의 올바름을 주장하는 검찰 측이나 반 진화의 옳음을 주장하는 변호 측의 공방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스콥스는 유죄가 되어, 벌금 100달러를 부과받았다. 그러자 변호 측은 항소심에서 법률의 가부를 다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항소했던 주 최고재판소에서는 벌금이 테네시 주의 규정에서 부당하게 높아 이 재판 자체를 무효로 처리했다.
재판 종료 후, 스콥스는 교직을 그만두고, 시카고 대학의 대학원에서 지질학 학위를 취득하였고 지질 측량 기사로서 석유 업계에서 종사하였다. 그 후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업계에서 근속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이 재판은 대로우가 브라이언에게 '신이 실제로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인정받은 점에서 대로우의 승리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로우가 벌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 자체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재판으로 법률을 폐지하려고 한 ACLU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1967년에 이 법률의 폐지가 결정될 때까지 40년 동안 반 진화 논법이 존속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