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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망가지 않겠다]... '와카야마 독극물 카레 사건' 사형수 장남의 기구한 인생

!@#^& 2019. 12. 1. 01:50



[11월30일(土), Abema TIMES]


- 1998년 7월 25일 발생한 와카야마 독극물 카레 사건[각주:1]으로 구속기소 된 하야시 마스미(林 眞須美, 1961~) 사형수의 장남 하야시 씨는 당시 10살이었다. 하야시 씨는 부모가 체포된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것(카레 사건) 이전에 보험금 사기를 하다가 체포되었다]라고 말한 하야시 씨. 하야시 마스미 사형수는 1998년 12월에 카레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체포 전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았던 하야시 씨의 자택에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언론이 몰려오고 있었다. 언론을 향해 호스로 물을 뿌리던 마스미 사형수의 모습이 유명하지만, 하야시 씨는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만이 엄마의 본모습이 아니었다'라고 전해주고 싶었다]라며 목소리를 떨었다.

[자식으로 볼 때 하야시 사형수는 어떤 어머니였는가?]라는 질문에, 하야시 씨는 [교육에 열심이었다. 만약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다면, 난 이런 활동을 하지 않았을 것. 생각이 날수록 행복한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야시 씨는 2019년 여름에 저서 [이제는 도망가지 않겠다. 지금까지 침묵했던 '가족'에 대한 것]을 간행, 사건의 영향에 의해 곤경에 처한 적이 많았던 인생의 절반. 한편으로 분명히 부모님이 저지른 보험금 사기 사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해 나갔으면 하는 생각으로 펜을 잡았다고 한다.


<독극물 혼입으로 인한 살인 혐의로 현재 사형수로 복역 중인 하야시 마스미의 체포 전 모습>


1998년에 일어난 카레 사건 당시 10살이었던 하야시 씨는 이후 가해자의 장남으로서 힘든 인생을 걸어왔다.

사건 발생 후에는 언론이 집안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하야시 씨에게 [아이스크림 사줄게], [연예인 사인을 받아와 줄게] 라고 말해왔다. 보도가 가열되어 가는 한편으로 여름방학이 끝나면 동급생들로부터 [하야시 군과는 놀면 안 된다고 엄마가 말했다]며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나 엄마는 [하지 않았다]고 계속 말하는 바람에 친구들과 거리를 두는 현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 체포 직전에는 언론이 모여들어 학교나 학원을 거의 가지 못하는 상황으로 집안에서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새벽, 하야시 씨의 부모님이 체포됐다. 아이들에겐 집에 온 여성 경찰관이 [아동 상담소에 갈 테니까 짐을 1~2주분으로 정리하도록]이라고 말했다. 하야시 씨는 1주일 정도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당장 돌아오진 못 했다.

부모가 보험금 사기로 수억 엔을 가로챈 적도 있어, 생활적으로는 부유했던 하야시 집안. 하야시 4남매는 아동 상담소에서 비행 청소년이나 부모에게 학대받고 자라난 아이들과 살게 된다.


[범죄자의 가족이라면 무엇을 해도 좋다, 무슨 말을 해도 좋다]라는 사람들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의적인 폭력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하야시 씨. 하야시 씨는 이전까지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승산이 없었고 일방적이며 불합리한 폭력에 계속 노출되었다. 여기에는 직원도 못 본 척했다.

[더 포이즌 서러브레드[각주:2]]란 별명으로 불리거나 여드름을 보곤 [비소의 후유증이 아닌가?]라고 경멸받았다.

장녀의 의지로, 형제 4명은 모두 같은 시설에 왔으나 아동 상담소에서는 남녀 따로 방에서 지낸다. 그래서 첫째 딸과 둘째 딸, 셋째딸은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첫째아들 하야시 씨는 방이 달랐기 때문에 왕따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누나나 여동생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남자로서 쪽팔린다]고 생각해 괴롭힘을 당해 다쳐도 [넘어졌다]고 설명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 결과, 코는 2차례 부러지고 비비탄 총으로 직사 거리에서 얼굴을 맞는 바람에 앞니는 의치가 되어 버렸다.


<체포되기 전, 하야시 마스미 집으로 몰려든 취재진>


2000년에 짐을 회수하기 위해서 잠시 귀가했지만, 그 후 집은 방화 되고 만다. 방화 되기 전부터 집 외벽은 색이 있는 스프레이 등으로 낙서투성이였으나 하야시 씨 등 4명의 형제가 돌아갈 집이 사라지고 만다.

17~18세 무렵에는 견딜 수 없어 시설로부터 탈주를 반복한 하야시 씨. 역의 장애인용 화장실 등에서 잠을 자다가 붙잡혀서 다시 시설로 돌아가는 생활이었다.

아동 상담소에는 18세까지 지낼 수 있었지만, 아동 상담소를 졸업한 후에도 고생의 연속이었다. 주소가 없으므로 일을 구하지 못했고, 출소 후 한동안 노숙생활. 시설의 취업 알선을 받은 누나가 임대 아파트를 하나 빌릴 수 있었으며 하야시 씨도 그 주소를 통해서 겨우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근무처에는 [부모님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하야시 씨. 그러나 근무처 명찰을 본 현지인에게 들켜버리며 점포에 고충이 생겼다.

아르바이트 가게의 점장으로부터 [(하야시 씨가 근무하는 것은) 위생적으로 좋지 않다] 라고 말해, 자신이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퇴직. 이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계속된다.

지금까지 그러한 처사를 계속 받아온 하야시 씨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개명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출소해 온 아버지의 존재가 있다. 출소해 온 아버지를 외면한다는 것은 [개명하거나 은신하는 것은, 어머니의 죄를 인정해버린 것처럼 느껴져 버린다[각주:3]]고 말하는 하야시 씨.

저서의 제목에도 오른 [이젠 도망가지 않겠다]의 말대로 힘찬 모습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1. 축제의 포장마차 카레에 독극물이 혼입되어 4명이 숨지고 63명이 급성 비소에 중독된 사건. [본문으로]
  2. The Poison Thoroughbred: 여기선 독극물 종자라는 멸칭 [본문으로]
  3. 해당 사건은 누명 의혹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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