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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2011년 7월 23일 - 원저우 철도 추돌 탈선 사고

!@#^& 2019. 7. 22. 16:38

'윈저우 철도 추돌 탈선 사고'는 중국 저장성 원저우시에서 2011년 7월 23일 20시 34분경(중국 표준시)에 발생한 중국 고속 철도의 충돌·탈선 사고로, 43명이 죽고 211명이 다친 대형 사고다.

2011년 7월 23일 오후 8시 34분경(현지 시각=UTC+8), 저장성 항저우 항저우역 발(發) 푸젠성 푸저우시 푸저우 남역행 고속철도 D3115열차(CRH1B, 편성 번호:CRH1-046B 승객 1072명, 정원은 1299명)가 사고 현장에서 32km 남쪽에 낙뢰를 맞아 동력을 잃고(중국 측 발표라서 단정할 수 없다), 사고 현장이 되는 원저우시 소우쇼 근처의 고가 다리 철도 터널 앞에서 정차하던 곳에서 현장 북쪽에서 주행 중인 베이징시 베이징 남역 발(發) 푸저우역행 D301열차(CRH2E편성 번호:CRH2-139E 승객 558명, 정원은 630명)가 추돌했다.

D301열차 선두 4량(최후미만 이등석 나머지는 침대차)과 D3115열차 15량째(일등석) 및 16량째(일등석 선두 차량)이 탈선, D301열차 선두 4량은 높이 20m의 고가에서 추락하고, 그 중 D301열차 제4호 차량은 고가철도 다리 옆에서 수직으로 허공에 매달렸다.

중국 철도부는 D3115열차(부딪힌 측)가 낙뢰로 정전되면서 동력을 잃은 것으로 후속 D301열차(추돌 측)가 부딪힌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또 당시(8시경), 푸젠성 샤먼시 샤먼역 발 항저우역 행 고속철도 D3212열차에 벼락이 떨어져 전기 계통이 고장 나서 D3212열차는 사고 현장으로부터 약 5km의 장소에서 정차 중이었다.

한편, 본래의 운행 도표는 D301열차(추돌 측)가 D3115열차(부딪힌 측)보다 선행하게 되어 있어서 원래 운행 도표에서 기차 순서가 역전되면서 열차 운행 제어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또, 추돌된 D3115열차 운전사는 사고 직전에 철도부로부터 '차량 주행의 정지' 지시를 받고 그것에 따른 것을 증언했다. 본인은 주행의 속행을 주장했으나 결국 지시에 따랐기 때문에 차량을 정지시켰다는 것에서, 인위적 판단 실수도 겹쳐서 일어났다는 얘기도 제기되었다.

당시 원자바오 총리는 원인 규명을 도모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이미 사고 차량의 해체와 매립이 진행되고 있어서 사고의 중요한 증거나 정보는 어이없게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사고 발생 2일 만인 25일, 오전 8시에 운행을 재개시켰다.

사고 발생으로부터 며칠 후, 중국 정부는 사고 희생자 한 명의 유족에게 50만 위안(현재 기준으로 8,564만 5,000원)의 배상금 지급을 결정했다. 또, 중국중앙(CCTV)TV는 정부가 배상 절차에 합의하면 수만 위안의 장려금을 추가하겠다고 밝혔고, 일부 유족은 이미 절차를 밟아 배상금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유족과 중국의 인터넷 내에서는 '금액이 낮다, 높다'라고 양쪽에서 거센 비판이 나왔다.

또 사고를 당했던 차량은 7월 27일 시점에서 매립되거나, 중국 철로의 차량 기지로 옮겨졌다. 그러나 철도부의 사고 원인 보고 이후로 사고 원인 규명은 일절 이뤄지지 않았다. 매립 작업이 개시되면서 생존자 수색 중단에 구조 대원 한 명이 반대하면서 혼자 수색을 하였고, 사고 20시간 후에 2살 여자아이가 구조됐다고 보도되자 '매립이 너무 이르다', '생존자가 있을 것',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각 방면에서 비판이 가해졌지만 결국 수색은 종결되었고, 매립 작업에 들어갔다.

철도부는 기자회견에서 '매립 처리한 원인은 구조현장이 되는 고가교 아래가 진흙탕이고 복잡한 환경이며 구조를 더 잘 하기 위해서지, 당신이 믿을지 안 믿겠느냐는 말인데 나는 이 설명을 믿는다', '이런 대형사고가 전 세계에 알려진 이상 철도사고 자체를 은폐할 리 없다'고 말했다.

매립 작업이 완료된 후 출입금지가 풀렸고, 곧바로 현지 경찰과 유가족, 사고현장 인근 주민들이 현장으로 향했다. 이후 유족들은 정부와 철도부를 상대로 형사소송을 제기할 태세를 보였다.

2011년 7월 26일에는 한번 묻힌 차량이 다시 나와서 이송됐다. 이는 당국이 증거 인멸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간 것이며, 일부 매체와 평론가는 '국내외의 비난을 조속히 수습시키고 싶어서 행한 것'이라고 평했다.

2011년 7월 28일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스스로 사고 현장을 시찰하며, 병원에서 부상자의 만남을 가졌다. 원자바오 총리는 사고 현장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단호한 사고 원인의 진상 규명'을 약속하면서 '안전을 제일 우선한다'와 안전 문제에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달 25일에는 유족들 약 40명이 원저우시 정부 청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다. 그 후, 2011년 12월 28일 국무원(중국의 중앙행정기관)은 사고 조사 보고서를 공표, 관계자의 처분을 시행했다.

이달 31일 광둥성의 유력지 '남방도시보'에서 '이런 참혹한 사고와 철도부의 너무한 사고 처리에 대해서는 다음 글자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이라는 내용과 중국 당국을 규탄하는 기사를 게재, 중국 내 인터넷상에서 칭찬이 잇따랐다.

다음 달 8월 1일에는 중국 공산당의 홍보 부문에서 '신문 등 언론이 탈선 사고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되었다. 이 사고에 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확산하는 것을 '철도부나 정부가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인 건 아닌가'라고 시사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 후 중국 국내에서의 영향으로는 중국 경제성장기 무렵에 자란 중산층이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SNS를 이용, 중국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일명 '넷 반란'을 보여주면서 대규모 데모가 일어나는 등, 잠깐 악화 일로를 걸었다. 

또, 중국 내 사고 보도 규제에 대해서도 국내외 언론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반기를 들고 있어서 원자바오 총리는 사고 진상의 투명화와 공개 입장을 밝혔다(물론 흐지부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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