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추 픽추(Machu Picchu)'는 15세기 잉카 제국의 유적으로, 안데스 산록에 속하는 페루의 '우루밤바 계곡(Sacred Valley)'을 탄 산의 능선(표고 2,430m)에 있다.
잉카 제국은 1533년에 스페인에 의해서 멸망했지만, 잉카 이전의 안데스문명은 문자가 없는 관계로 마추픽추의 유적이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당시 수도였던 쿠스코와의 관계나 역할 분담 등, 그 이유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마추 픽추라는 이름의 이 유적은 '나이 든 봉우리(Old Peak)'를 뜻하는 케추아어인 'machu pikchu'를 지명화한 것이다. 산자락에서는 유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흔히 '공중누각',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유적의 배후에 보이는 뾰족한 산은 '와이나 피츄(Huayna Picchu, 젊은 봉우리)'로 해발 2720m다. 산꼭대기에는 신관의 주거지로 보이는 유적이 있고, 산의 중턱에는 마추 픽추의 태양 신전에 대조하는 달의 신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유적에는 3m씩 높아지는 계단식 밭이 40단이며, 3,000단의 계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13㎢로 돌의 건물의 총수는 약 200채가 꼽힌다. 열대 산악수림대 가운데 있으며, 식물은 다양성이 풍부하다. 행정상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속하고 쿠스코 북서쪽 약 70km에 위치한다.
2015년 제39회 '세계유산 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종료 시점에서 페루 내에서 12건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가운데, 쿠스코와 함께 처음(1983년)으로 등록된 유적이다. 기후는 남위 13도로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긴 우기와 5월부터 9월까지 짧은 건기로 나뉜다.
<마추 픽추를 처음으로 발견한 미국의 탐험가 히람 빙햄>
미국의 탐험가 '히람 빙햄 3세(Hiram Bingham III, 1875~1956)'는 1911년 7월 24일에 이 지역의 오래된 잉카 시대의 도로를 탐험하던 중, 산 위에서 유적을 발견했다.
빙햄은 이후로 1915년까지 3차례 유적을 발굴하였다. 그는 마추 픽추에 대해 일련의 서적이나 논문을 발표하였고 가장 유명한 해설인 '잃어버린 잉카의 도시'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1913년 4월호 전체를 마추 픽추 특집으로 다루어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또한, 1930년에 내놓은 저서 '마추픽추:잉카의 요새'는 폐허의 사진과 지도까지 기재되면서 설득력 있는 결정적인 논문이 되었다. 이후 태양을 숭배하는 신관들이 통치했다거나, 태양신에게 처녀들이 제물로 쓰였다는 정설이 형성됐다.
한편으로 마추 픽추라는 이름이 잘못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이유인즉, 유적에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고 빙햄이 현지인들에게 유적의 이름을 물었더니 현지인들이 지금 서 있는 산의 이름을 묻는 줄 알고 마추 픽추라고 답해 유적의 이름이 마추피추라고 잘못 알려졌다는 설이다(확실하지 않음).
마추 픽추를 세계에 널리 알린 빙햄은 예일 대학의 교직을 퇴임 이후, 코네티컷 주의 부지사, 지사를 거쳐서 상원 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잉카 조사의 영향력은 사후 40년 가까이 남게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마추 픽추는 이미 페루인이 발견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그 설에 따르면, 쿠스코의 농장주 아구스틴이 빙햄보다 9년 빨랐던 1902년 7월 14일에 마추픽추를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향후 검증될 것이지만, 빙햄의 아들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과 또, 이 인물에 대해서 복수의 증언이 있다는 점에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마추 픽추 특집을 다룬 내셔널 지오그래픽 1914년 4월호>
마추 픽추 연구의 1인자였지만, 빙햄의 마추 픽추에 관한 발표와 가설이 그 후 연구에 방해가 된건 사실이다. '예일대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Yale Peabody Museum of Natural History)'의 관장 '리처드 L 버거(Richard L. Burger, 1950~)'와 '루시 C. 살라자르(Lucy C. Salazar)' 등의 연구에 의하면, 마추 픽추는 스페인에 의해 쫓긴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16세기 스페인 공문서에 의하면 최후까지 저항하던 마지막 잉카 족은 1572년 열대 분지의 은신처에서 항복했다는 기술이 있으며, 이는 마추 픽추 같은 고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마추 픽추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인티와나타 태양의 신전에 대해서 다루어보자면, 요새가 아닌 동서가 낭떠러지인 마추 픽추는 태양을 알기에 좋은 장소였고 잉카제국에서는 태양을 숭배하고 황제는 태양신의 아들로 추앙받았으며 달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잉카인이 숭고한 태양을 관측하기 위한 건물군으로 추측되고 있다.
실제로 태양의 신전은 동쪽의 벽이 2개 만들어져서, 왼쪽 창문을 통해서 햇살이 좋은 때는 동지, 오른쪽 창문으로 햇살이 좋은 때는 하지로 구별할 수 있다. 또, 처녀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알려졌던 대좌상의 유구도 역시 태양을 관측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해시계라고 추측되고 있다.
또 빙햄이 마추 픽추에서 운반한 다수의 인공적인 유물이 1920년대 뉴욕 타임스지로 포장된 상태 그대로 상자에 담겨서 예일 대학의 지하 창고에서 잠들어 있었다. 살라자르 박사는 청동 귀중품, 도구류, 유골, 특히 항아리를 재조사했다. 그 결과, 항아리의 양식은 모두 15세기의 것이었고, 무덤의 매장물에 대해서는 검소한 것이 많아서 왕족이 아닌 하인의 것으로 추정됐다.
빙햄은 동행한 학자에게 '출토된 뼈는 여성의 뼈가 대부분이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뉴 올리언즈에 위치한 툴란 대학의 자연인류학자인 '존 W 베라노(John W. Verano)'의 새로운 연구에서 뼈는 남녀 같은 비율이었던 점, 많은 가족과 유아가 생활하고 있던 점, 처녀들의 공동생활을 나타내는 것은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뼈의 분석에서는 결핵이나 기생충의 유무, 또한 옥수수 위주의 식생활에 따른 치아의 손상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50세 이상의 노약자가 많이 있어서 그 결과, 이곳 마추 픽추에서의 생활이 상당히 건강에 좋았다고 추측되었다.
또, 뼈에는 폭행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유년기에 머리 부분이 감겨있는 것으로 머리 부분이 변형된 것이 있었으며, 해안지역이나 티티카카 호수 방면과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먼 곳에서 찾아온 장인들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고도의 석축 기술이 필요하므로 장인들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왕족이 마추 픽추에서 사망했을 때는 그곳에서 매장되기보다, 쿠스코에 옮겨 묻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의 '장 피에르 프로첸(Jean-Pierre Protzen, 1934~)' 건축학 교수는 돌담을 딱 겹쳐 쌓는 방법은 돌로 돌을 치거나 깎아내렸다고 추측했다. 이 방법을 페킹이라고 하고, 미리 크게 깬 돌을 소형 투석으로 연속해서 툭툭 두드려보고 표면을 다듬어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이미 잉카 시절 이전부터 시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운반 수단은 마추픽추의 경우에, 경사로를 만들 여지가 없어 어떻게 5-10t이나 되는 거석을 운반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다. 또, 빙햄의 발굴 노트는 무엇을 발굴했느냐보다 오히려 무엇을 먹었느냐 하는 기술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조사에서는 지하에서 그을린 자국이 발견된 것 등으로 보아서 스페인에 의한 침략을 우려해서 주민들이 마을을 태워 버렸다는 설이 연구자로부터 지적되고 있다.
<페루의 쿠스코에 위치한 비니쿤카 레인보우 마운틴(Rainbow Mountain)의 모습>
이 도시는 원래 잉카의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피서지로서 시골 별장 같은 종류였다. 유적에는 큰 궁궐이나 사찰이 왕궁 주위에 있으며, 그곳의 생활을 지탱하는 직원들의 주거지도 있다. 마추 픽추에는 최대 약 750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추정되며. 우기나 왕족 부재 시에는 더 줄어들어 상주 인원은 극소수였다고 추정된다.
이곳은 잉카의 왕 '파차쿠티(Pachacuti, 1438~1471)' 시대였던 1440년경에 건설이 착수되어서 1532년에 스페인이 정복하기까지, 약 80년 동안 인간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가파른 산 위에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라파예트 대학의 '나일스(Niles of Lafayette College)' 교수는 '파차쿠티가 이 곳을 선택한 것은 경치에 압도되었다고밖에 답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예일대의 최근 연구 성과로는 고지대이며 양측이 깎아지른 벼랑 위여서 태양 관측에 가장 적합하고, 종교적인 이념으로 태양에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 장소선정 이유로 꼽힌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급사면에 있는 마추 픽추 정상에는 태양의 신전이 있고 정상에는 '인티와타나(Intihuatana, 태양을 잇는 돌)'가 설치되어 있으며, 하지와 동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창문이 있는 등 태양을 이용한 달력을 관측하고 작성했다는 말이 있다.
잉카의 신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태양신이기 때문에, 태양에 더욱 가까운 산의 정상은 의례장으로서 적당했다. 신전의 밭 등 경작지에서 재배된 농작물은 신에 대한 공물로 재배되었는지, 신이 인간에게 하사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먹혔는지...
어찌 되었건 마추 픽추는 종교 의례적 의미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 마추 픽추는 위대한 인류의 유산으로 세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