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독일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포츠담의 궁전인 '세실리엔 궁전(Schloss Cecilienhof)'의 모습>
-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현 대만)의 주도로 당시 일본제국에 대해서 나오게 된, 13개 조로 구성된 선언이다. 다른 추축국이 모두 항복한 후에도 미련하게 전쟁을 지속하던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두 방이나 맞고서야 1945년 8월 14일에 이 선언을 받아들였고, 1945년 9월 2일 조인 및 즉각 발효(항복 문서)로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나중에 추가로 참가해서 추인했다.
나치 독일의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정상이 모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에 대해서 논의를 가졌다. 포츠담 선언은 이 회담 기간 중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 총리와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국민정부 주석의 공동성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다만 선언문의 대부분은 미국에 의해 (당연히) 작성되었고, 영국이 약간의 수정을 한 것이며 중화민국을 포함한 다른 연합국은 내용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때 영국 대표로 회담에 참석했던 처칠 총리는 선언 당시 귀국했으며, 장제스를 포함한 중화민국의 멤버는 회담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트루먼이 자신을 포함한 3명의 서명을 대신 했다(장제스는 무선으로 승낙을 얻어서 서명했다). 소련은 서명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선언 수락을 주스위스 및 스웨덴 일본 공사관을 거쳐서 연합국 측에 통보하였고 이것은 8월 15일 일본국민에게 발표되었다(옥음방송[玉音 放送], 당시 일본 제국의 쇼와 일왕이 무조건항복을 알리는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종결의 조서, 大東亜戦争終結ノ詔書>, 줄여서 <종전 조서, 終戦詔書>를 읽은 라디오 방송을 말한다).
그리고 9월 2일, 도쿄만 내에 정박하던 미국 전함 '미주리(USS Missouri, BB-63)'의 갑판에서 일본 정부 전권대리인 A급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와 '대본영(大本營, 당시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의 최고 통수 기관)' 전권의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郎, 1882~1949)' 및 연합 각국 대표가 조항의 성실한 이행 등을 규정한 항복 문서(정전 협정)에 조인했다. 이에 따라 선언은 처음으로 외교문서로 확정되었다.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정부를 대신해서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다>
<일본의 항복에 대한 정의 및 규약>
-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의 선언 -
1. 우리 미합중국 대통령, 중화민국 정부 주석 및 영국 총리대신은 우리의 수억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하고, 일본에 대해 전쟁을 종식할 기회를 얻기로 했다.
2. 3개국의 군대는 증강을 받아서 일본에 마지막 타격을 가할 준비를 이미 갖추었다. 이 군사력은 일본의 저항이 멈출 때까지, 이 나라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일체의 연합국 결의에 의해 지지받고 고무된다.
3. 세계 자유 인민에게 지지를 받은 이 군사력 행사는 나치 독일에 적용할 경우, 독일과 독일군의 완전 파괴를 가져왔음을 보여주듯이 일본과 일본군이 완전히 궤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일본이 무분별한 타산으로 자국을 멸망의 지경에 빠뜨린 군국주의자의 지도를 계속 받을지, 아니면 이성의 길을 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5. 우리의 조건은 다음의 조문에서 나타내는 대로 이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고,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다. 집행의 지연은 인정하지 않는다.
6. 일본국민을 속이고 세계 정복에 나선 잘못을 저지르게 한 세력을 영구히 제거한다. 무책임한 군국주의가 세계로부터 구축되기 전까지는, 평화와 안전과 정의의 새 질서도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7. 제6조의 새 질서가 확립되고 전쟁 능력이 상실된 것이 확인될 때까지는 우리가 지시하는 기본적 목적 달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일본 영역 내의 여러 지점은 점령되어야 한다.
8.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으로 당시 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결의도 이 선언에서 결정되었다)'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또한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및 시코쿠 또는 우리가 결정하는 여러 작은 섬으로 한정되어야 한다(소유한 식민지는 다 포기해라).
9. 일본군은 무장해제 후,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서 평화롭고 생산적으로 생활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10. 우리의 의지는 일본인을 민족으로서 노예화하고 일본국민을 멸망시키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의 포로 학대를 포함한 일체의 전쟁범죄자는 처벌되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일본국민의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을 강화하고 이를 방해하는 모든 장해를 제거해야 하며, 언론과 종교 및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의 존중은 확립되어야 한다.
11. 일본은 경제부흥 하고 부과된 배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생산 수단, 전쟁과 재군비에 관련되지 않는 것을 보유할 수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국제무역으로 복귀가 허용된다.
12. 일본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지에 의한 평화적 경향의 책임 있는 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이 항목 및 이미 기재한 조건이 달성될 경우 점령군은 철수해야 한다.
13. 우리는 일본 정부가 전 일본군의 즉각적인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그 행동에 대해 일본 정부가 충분히 보장해줄 것을 촉구한다. 그 이외의 선택사항은 신속하고 완전한 괴멸이 있을 뿐이다.
<연합국의 수장(首長)들, (좌측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
1943년 1월,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 안파 호텔에서 가졌던 '카사블랑카 회담(Casablanca Conference)'에서 연합국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자세를 명확히 하였다. 이 방침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뜻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11월 17일에 있던 카이로 선언에서도 이 자세는 확인됐다. 이때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처칠은 조건을 명확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루스벨트의 주장이 관철된다(소련이랑 영국에 도와준 게 얼만데...). 당시 정부 내의 그룹에는 천황제 유지 등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조기에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하자는 제안을 하는 사람도 존재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1945년 2월,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열린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에서는 루스벨트가 병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전처럼 강한 자세로 나가지 못하고, '가라후토청(南樺太, 1907년 3월 15일에 가라후토청관제에 의해 가라후토 민정서가 개편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의 행정 조직으로 현재는 사할린 전체가 러시아의 영토다)', '쿠릴 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러시아 극동 지방의 사할린주에 있는 총 길이 약 1300km의 도서군)', 만주의 권익 등의 대가를 제시하고 소련에 대해서 일본에 대한 전쟁 참여를 요청했다.
4월에 루스벨트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해리 트루먼이 갑작스럽게 대통령이 되었다. 트루먼은 외교 분야의 경험은 없었고, 외교는 주로 루스벨트가 지휘했기 때문에 미국의 외교 정책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일본에 대한 강경함은 변함이 없었고). 트루먼은 일단 독일 항복 후,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미국 정부는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며 '엘리스 M. 자카리아스(Ellis Mark Zacharias, Sr., 1890~1961)' 해군대령의 선전방송이 8월 4일까지 일본에서 14회 송출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전인 5월 9일에 결사항전을 재차 표명하는 등, 이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스탈린에 의해 숨겨져서 일본이나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있었다(실제로는 소련군에 의해서 히틀러의 시체는 비밀리에 처리되었다고 한다).
<포츠담 회담에서 단란한(?) 연합국 수장들의 모습>
미국 정부 내에서 일본을 항복시키는 수단으로서 원자폭탄 개발, 일본 본토 침공작전(이건 언젠가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소련의 대일 참전의 세 가지 수단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원자폭탄은 그 위력을 시험한 결과, 일본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져 개발계획이 착실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한편, 육군 참모 총장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을 중심으로 일본 항복에는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이 필요하지만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을 대륙으로 신경 쓰게 하는 동시에 소련을 중개로 종전을 시도하던 일본에 큰 충격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실제로 일본을 당황하게 하는데 대성공).
반면 국무차관인 '조셉 그루(Joseph Clark Grew, 1880~1965)'를 비롯한 국무부 내 그룹은 정치적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그루는 일본이 수용할 수 있는 항복 가능 방안을 제시하고 항복에 응하게 하는 일명, '조건부 무조건 항복'을 제안하고 있었다. 5월 28일에는 천황제를 보장한 항복 권고 방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시하였고, 한편으로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ewis Stimson, 1867~1950)'은 무조건 항복 원칙을 깨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의 미군 희생자 수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자 다소 마음을 돌리게 된다.
1945년 6월 18일, 백악관 회의에서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이 논의됐다. 스팀슨은 일본 본토 침공 작전에 일단 찬성을 나타내면서도 정치적 해결책이 존재함을 내비쳤다. 이때 '존 맥클로이(John Jay McCloy, 1895~1989)' 해군 차관보는 이 회의 도중 발언하지 않았고, 회의 종료 직전에 트루먼이 맥클로이의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자 맥클로이는 "각하는 다른 방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검토되어야 할 방법으로 만약 우리가 통상공격 및 상륙 이외의 방법을 검토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일본 정부에 설명할 일입니다."라고 정치적 해결책의 중요성을 넌지시 건넸다.
트루먼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냐고 묻자 맥클로이는 "일본이 국가로서 남는 것을 허용하고, 입헌군주제라는 조건으로 일왕의 유지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트루먼은 "그건 바로 내가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화답했고 스팀슨도 "이 방안이 표명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고 동의하였다.
맥클로이는 원폭 투하에 대해서도 사전에 일본에 경고해야 한다고 했지만, 반대로 만약 폭발이 실패했을 때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 수 있다는 반발을 샀다. 트루먼은 맥클로이가 일본에 대한 메시지에 대해 검토해보라고 명령했다. 다만, 원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는 트루먼도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관료들 앞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신중함을 더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말문을 열게 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스팀슨, 맥클로이 등을 중심으로 한 육군은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안에 대한 검토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미주리호에 항복문서 서명을 하기 위해 찾아온 일본 측 인사들>
6월 19일 육군, 해군 국무부의 검토 기관인 '삼인 위원회(Committee of Three)'가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의 토론이 시작됐다. 당시 참여한 '포레스탈(James Forrestal, 1892~1949)' 해군장관의 회상에 따르면 항복 권고에는 대통령부 참모장 '윌리엄 레이히(William Daniel Leahy, 1875~1959)' 원수와 '어니스트 킹(Ernest Joseph King, 1878~1956)', '체스터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1885~1966)'와 같은 해군 수뇌부도 찬성하고 있다고 기술되어있다. 이날 오후 스팀슨이 기초로 토대를 잡아서 일본 항복 권고를 위한 대통령 각서의 구술필기가 시작되었고, 6월 26일 위원회에서는 스팀슨이 각서를 토대로 한 '대일(対日) 계획안'을 제시했다.
<6월 26일의 '대일(対日) 계획안'>
- 우리가 일본에 대해 행사하려고 하는 힘은 다양하고 압도적이다. 이 힘을 행사할 경우 일본의 파괴는 불가피하고 철저하게 될 것이다.
- 연합국은 세계정복을 빌미로 나라를 속인 자들의 권력과 세력을 제거한다.
- 일본의 주권은 일본 본토, 제도로 한정되며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무력화한다.
-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일본민족을 멸망시킬 의지가 없다.
-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영향이 배제될 경우, 우리는 일본이 생존에 필요한 산업을 유지하는 것을 인정한다. 바로 일본과 호혜적인 무역 관계를 구축할 것을 인정한다.
- 전기(前記) 목적을 달성하고 일본 국민의 다수를 대표하는 평화적 정권이 성립하면 연합군은 일본에서 철수한다.
이 항복 권고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이 참전했을 때는 소련 정상도 추가된 명의로 공표된다고 자체적으로 규정하였다. 또, 스팀슨은 개인적 의견으로 일본의 입헌 군주제는 그대로 놔둘 것을 덧붙이면 항복을 실현하기에 좀 더 쉬울 것이라는 의견을 추가했다.
선언 발표 시기는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이 열리기 전으로, 일본이 광신적인 절망의 늪으로 빠지기 전에 필요하다고 했다. 또, 소련의 참전이 이뤄지더라도 소련군의 침공이 진전되기 전에 재빨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위원회에서는 이 권고가 실제로 시행되고, 미국 국민의 전의를 높이는 효과가 있을것이며 실패해도 미국에 피해는 없다고 예측하였다. 스팀슨의 원안을 위원회는 승인했다.
위원회는 실제 항복 권고문을 책정할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검토하는 업무를 가졌다. 트루먼 대통령이 포츠담 회의로 7월 6일에는 미국에서 출국하기 때문에, 위원회는 그전까지 선언문을 작성하고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6월 27일, 최초의 위원회가 열렸다. 첫 회의에는 모두 육군 관계자로, 토의에서는 스팀슨 방안을 원안으로 맥클로이가 실질적인 위원회의 주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국무부 극동 과장인 '조셉 밸런타인(Joseph William Ballantine, 1888~1973)'이 국무 서안의 항복 권고 방안을 제의하면서 난항을 겪게 되었다.
국무부 안은 천황제의 존치에 대해서는 매우 흐릿한 표현이었고, 이 때문에 국무 서안은 회의를 거쳐서 기각되었고 다시 스팀슨 방안을 중심으로 토의되게 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작전부(OPD) 소속인 파히 대령이 중화민국의 장개석을 추가해야 한다는 점과 연합국과 일본이 협상을 벌이지 말자는 등의 의견을 밝혔다.
<1945년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면서 종전의 조서에 서명한 일본 각 장관들>
다음날 6월 28일 회의에서 천황제 보장의 문구를 넣지 말자는 주장이 나왔다. 국무부 내 지일파(知日派)는 천황제 보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들의 의견은 일본에 대해 유화적이라고 비판받았고 국무부 내에서도 여론의 반발을 두려워하는 것도 있어서, 지일파는 고립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1945년 6월에 있던 갤럽 조사에 따르면 33%가 일왕의 처형을 요구하였고 17%가 재판, 11%가 평생 구금, 9%가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고 응답하는 등, 일왕에 대한 미국 여론은 매우 싸늘했다.
최종적으로 국무 서안을 일부 참고하면서도, 스팀슨 방안을 기본으로 항목의 초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6월 29일 새벽에 완성된 초안이 맥클로이에게 전달되었다. 이날 위원회에서 국무부는 초안이 재검토돼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고, OPD는 선언 발표 시점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 직후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권고를 하였다. 맥클로이는 스팀슨에게 초안을 보냈고 6월 30일부터 스팀슨과 함께 초안 수정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때 스팀슨은 회고록에서 '상당한 수정'을 하였다고 한다.
7월 2일 스팀슨은 이 수정된 초안과 6월 26일의 대일 계획안의 일부를 수정한 것을 트루먼에 제출했다. 이 수정 초안은 13조 항으로 '현 왕통의 입헌 군주제를 배제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들어갔고, 2항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라는 문구는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주석이었던 장제스는 처칠보다 자신의 이름이 앞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는 자신은 국가원수니까...)
7월 3일, '제임스 F·번즈(James Francis Byrnes, 1882~1972)'가 새로운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 번즈는 트루먼이 신뢰하는 사적인 조언자였기에 그의 취임은 스팀슨의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7월 6일 국무부는 스팀슨 초안의 추가 개정을 요구하였고 7월 7일 간부회의에서 초안이 '일본 정부'에게 호소하고 있었던 부분이 '일본 국민'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번즈 장관은 전 국무장관과 상의하면서 일왕제 보장 조항을 일단 삭제할 것을 생각한다. 번즈는 일본을 점령할 때, 일왕제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본 다음, 일왕의 존속을 미국이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포츠담 회담의 공식 일정에서 대일 문제는 의제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스팀슨은 일본이 소련을 통해서 평화 중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였고, 일본이 소련의 주머니에 뛰어들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이 회담 중, 항복 권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번즈 장관이 반대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 초안 2항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됐던 부분을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변경하면서, 일왕제 보장 조항을 '일본 국민은 자신의 정치 형태를 결정할 수 있음'과 일왕을 언급하지 않는 형태로 바꾸는 것을 제안한다.
트루먼은 최종적으로 일부분의 수정과 함께 공표를 결정하였고, 7월 24일에 영국으로 성명 안이 제시되면서 다음 날 7월 25일, 처칠이 수정안에 응답했다. 그 내용은 성명이 호소하는 대상을 '일본 국민'에서 '일본 정부'로 다시 변경하는 것, 민주화의 주체를 '일본 정부'라고 명기하는 것, 점령 대상을 '일본 영토'에서 '일본 영토의 여러 지점'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트루먼은 영국의 수정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명 발출을 준비함과 동시에 원폭 투하 명령을 승인했다. 회담에 불참한 장제스에게 전보로 초안이 전달되었고 장제스는 선언문의 한 곳만 고쳐서 보내왔다. 내용인즉, 본인이 국가원수이므로 처칠보다 앞에 자신의 이름이 놓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7월 26일, 포츠담 선언으로 알려진 항복 권고가 트루먼, 처칠, 장제스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또한 선언문은 포츠담 협정의 부속 의정서에 '검토된 미국 제안'으로서 부기 되었다.
<1945년 당시 도쿄의 모습>
베를린 시간으로 7월 26일 오후 9시 20분, 선언 발표와 동시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전시 정보국(OWI)에 이 선언을 온갖 수단을 통해서 일본 국민에게 알릴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일본 시각으로 7월 27일 오전 5시, OWI 서해안 단파 송신기에서 영어 방송이 시작됐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4시 5분부터 일본어로 방송됐다. 일본어의 전문은 OWI 프란시스코 지부가 작성하였고, 워싱턴 D.C. 국무부의 언어 전문가가 전화로 체크한 뒤에 일본 소요 시간으로 오전 7시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되었다.
그 뒤 일본어 방송은 서해안 11의 단파 송신기, 호놀룰루의 단파 송신기, 사이판의 중파 송신기가 되풀이했다. 모든 정시 프로그램은 중지되었고 오로지 선언 방송만 반복했다. 서해안에서는 20의 언어로 선언이 방송되었고, 이후 며칠에 걸쳐서 일정 간격으로 선언 방송이 반복되었는데 이때 일본 측은 외무성, 동맹 통신사, 육군, 해군의 각 수신 시설이 제일 먼저 수신한다.
포츠담 선언의 발표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는 이 선언에 대한 대응을 검토했다. 선언문을 번역하고, 외교부 정례 회장단회의에서 '수락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협상의 여지는 있다', '잠자코 있는 것이 현명하고, 신문에는 코멘트 없음'으로 게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적당하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한편 이를 받은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한국명 박무덕], 1882~1950)'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와 국무 회의에서 "본 선언은 조건부 강화이며 이를 거부할 때는 극히 중대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발언한다. 그러나 육·해군에서 단호하게 저항하는 슬로건을 내어서 지도하도록 주장했고, 결국 정부는 내용에 대해서 공식 언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외무대신(외교부 장관)인 도고 시게노리, 한국명 박무덕으로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도공 '박평의'의 후손으로 한국계 일본인이다. 전후 A급 전범으로 감옥에서 생애를 마감한다>
7월 27일, 일본 정부는 선언의 존재를 논평 없이 담백하게 공표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28일 신문 보도에서는 요미우리 신문에서 '가소로운 대일 항복 조건', 마이니치 신문에서는 '가소롭다! 미영 공동 선언' 등, 신문사의 논평이 이어졌다. 또한 육군에서는 정부가 선언을 무시할 것을 공식 표명해야 한다는 강경한 요구가 있었다.
이날 총리인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1868~1948)'는 기자 회견에서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모작과 생각으로 정부로서는 이를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고 묵살할것이며, 전쟁 완수에 매진할것"이라고 말해 다음날 아사히 신문에서 '정부는 묵살'등으로 보도되었다. 이 표현은 동맹통신사에서는'Ignore(무시)'로 영어 번역되었고, 로이터와 AP통신에서는 'Reject(거부)'로 번역돼 보도됐다.
트루먼은 7월 25일 일기에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라고 기재했듯이 일본 측의 거부는 예상되었고, 오히려 선언에 의한 항복이 아니라 선언의 거부로 원자폭탄에 의한 핵 공격을 정당화하면서 이로 인해 항복의 효과가 더욱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묵살의 대가로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졌고 히로시마시의 막대한 피해가 전해졌다. 또, 8월 9일 새벽에 소련이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만주국, 한반도 북부, 남 사할린 섬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면서 대일 선전포고 및 포츠담 선언에 공식적으로 참여했다.
충격을 받은 스즈키 총리는 이날 최고전쟁지도회의 첫머리에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며 의견을 촉구했다.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회의 도중에 나가사키시에 추가로 원자폭탄 투하가 전해져서 '국체 보전,' '자발적 무장 해제', '일본인의 전범재판 참가'를 조건으로 선언 수락 방침이 우세해졌다. 일부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천황이 배석한 최고 전쟁지도회의로 미루어졌다.
<포츠담 선언을 비웃는 당시 일간지의 보도, 이 묵살은 곧이어 감당할수 없는 한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몇 번의 어전 회의 끝에 8월 14일에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며 이날 종전의 조칙이 울렸다. 이날 '카세 토시카즈(加瀬俊一 , 1903~2004)' 스위스 공사를 통해 선언수락 관련 조서를 발표한다는 취지와 수락과 더불어 각종 준비가 돼 있다는 내용이 연합국 측에 전달됐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정부는 선언의 수락과 항복 결정을 국민에게 발표하면서 일본은 항복한다. 일본 국내외에서는 잠시동안 차분함과 함께 혼란이 있었고,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어가자 '쿠데타를 일으켜서 옥음 방송을 중단시키고 본토 결전을 위한 내각을 수립하자'는 아직도 환상에 빠져있는 육군 청년 장교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15일 새벽에 일부 부대가 황궁의 일부나 사단 법인 일본 방송 협회 등을 점거했지만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궁성 사건, 宮城事件으로 이것도 다음에 다루어봅시다).
9월 2일 일본 정부는 미국 전함 미주리의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그 후도 각 전선에 잔존한 일본군과 중국군·미국군의 소규모 전투는 계속되었고 차례차례로 격파당한다.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의기양양하게 평양으로 입성한 소련군의 모습>
현재 일본 정부의 견해는 "(세계 정복의 기술된) 포츠담 선언 제6항은 당시 연합국 측의 정치적 의도를 표명한 글이다, 그 상세한 것에 대해서 정부가 대답할 입장이 아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과의 평화 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Treaty of San Francisco: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 조약으로 일본은 공식적으로 국권을 회복한다)의 연합국 사이에서 전쟁 상태가 종결될 때까지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점령 관리의 원칙을 나타낸 것이다. 포츠담 선언의 효력은 일본과의 평화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는 동시에 끝났다"라는 교묘한 말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함께 포츠담 선언은 효력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