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서양 해저 케이블 설치 경로를 기록한 지도>
-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Transatlantic telegraph cable)'이란, 대서양을 지나는 전신(電信)용의 '해저 케이블 1'이다. 첫 케이블은 1858년 영국의 '발렌시아 섬 2'과 미국의 '뉴펀들랜드 섬 3' 사이에 부설되었고, 실용 가능한 최초의 케이블은 1866년에 부설된 바로 이 케이블이다.
1830년대 후반, 영국의 전기기술자 '윌리엄 쿡(William Fothergill Cooke, 1806~1879)'과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1802~1875)', 미국의 '새뮤얼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1872)' 등으로 전신이 실용화되었다. 이윽고 전신은 '모스 부호 4'를 이용한 통신이 일반적으로 되어서 1840년대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육상의 전신망이 급속히 보급되어 갔다.
육상과 대비되는 해저 전신은 전선을 덮는 절연 물질에 적절한 재료를 골라낼 필요가 있었으므로, 육지와 비교하면 부설이 늦었다. 그러나 말레이반도의 'Palaquium' 종류의 수목에서 채취할 수 있는 'Gutta-percha'라고 불리는 수액이 절연물질에 유용한 재료란 사실이 밝혀져 해저케이블 부설의 길은 활짝 열렸다. 첫 해저 케이블은 1850년 브렛 형제에 의해서 처음으로 도버 해협에 부설되었다. 이 케이블은 불의의 사고로 다음 날 절단되었지만, 다음 해인 1851년에 다시 매설되어서 영국과 프랑스를 케이블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해저 케이블은 영국에서 아일랜드,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 등 1855년 시점에서 이미 25개의 해저 케이블이 부설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미국과 유럽을 이어줄 대서양 케이블이 부설되지 않았고, 정보 전달은 증기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1906년, 어딘가의 해저 케이블 부설 작업 현장>
미국의 사업가 '사이러스 필드(Cyrus West Field , 1819~1892)'는 대서양으로 케이블을 통과하는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당연히) 어려움이 예상됐다. 당시의 해저 케이블에서 가장 길었던 것은 '흑해 5'에 부설된 574km의 케이블이었지만, 대서양 간은 그것을 훨씬 웃도는 약 3000km의 케이블이 필요하다. 게다가 케이블은 수심 3000m의 해저를 통하게 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첫 시도였기 때문에 무사히 개통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이러스 필드는 해저 지형에 관해 해양학의 권위자인 '매튜 폰테인 모리(Matthew Fontaine Maury, 1806~1873)'와 상의했다. 모리는 미국의 선원이자 엔지니어였던 '존 머서 브룩(John Mercer Brooke, 1826~1906)'의 장치로 사용 계측한 북대서양의 지형도를 소지하고 있었고, 부설 예정의 지형은 비교적 평탄하다고 확인이 되어서 케이블의 부설에는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필드는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가나 해저 케이블의 제조 업체에 문의, 계획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이러스 필드는 1856년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 사업을 위해서 '애틀랜틱 텔레 그래프' 회사를 창립했다. 자금 35만 파운드(지금 기준으로 몇백억 정도 함)는 필드가 4분의 1을 출자하고, 나머지는 영국 사업가가 출자했다. 회사는 부회장으로 새뮤얼 모스를 앉혔고 주임기사에는 에드워드 화이트 하우스와 찰스 브라이트를 고용했다. 그리고 공학자였던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도 임원 자리에 올랐다.
톰슨은 이 계획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1855년 영국의 물리학자와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의 연구를 바탕으로 전신 방정식을 발표하였는데, 이 식에 의하면 통신 속도는 케이블의 단면적에 비례하는 길이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러니까 긴 거리의 케이블에서는 전송 속도가 늦어지게 된다는 계산이다. 이를 막기 위해 계획보다 굵은 케이블을 만들어야 한다고 톰슨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필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케이블을 굵게 하면 그만큼 비용도 늘어나고 부설하는 데도 3척의 배가 필요하게 된다. 이미 케이블 중 일부는 제작되었고, 주임기사였던 화이트 하우스도 톰슨의 의견을 '소설'이라고 부정했다.
화이트 하우스는 모스와 함께 육상에서 길이 3000km의 케이블을 사용해보았고, 통신 테스트를 해보니 톰슨이 주장하던 전송 속도가 늦어진다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 화이트 하우스는 패러데이로부터 "톰슨의 주장은 완전히 정확한 건 없지 않았냐."라는 의견을 끌어냈고, 이렇게 해서 톰슨의 의견은 무시되는 형태가 되었다. 톰슨 자신은 그 후에도 이 사업에 관여하면서 부설을 위한 항해에도 모두 참가하게 되면서 많은 역할을 해냈지만, 기술적인 지휘는 기본적으로 화이트 하우스가 취하게 되었다. 반면에 자금 조달은 순조롭게 풀리면서 케이블 제조는 급물살을 탔고, 1857년 7월 드디어 케이블은 완성되었고 부설 준비는 끝났다.
<케이블 부설 작업을 구경하는 시민들, 연도불명>
[1차 부설공사]
케이블 부설을 위한 항해는 1857년 8월에 이루어졌다. 케이블은 1척의 선박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영국 군함인 '아가멤논(HMS Agamemnon)'과 미국 군함 '나이아가라(USS Niagara)'의 2척에 나누었다. 브라이트는 부설에 걸리는 시간을 짧게 하도록 대서양 중간에서 양 끝에 2척을 세워서 부설하는 방안을 냈지만, 최종적으로는 발렌시아 섬에서 한쪽으로 부설하게 됐다. 이 방법은 시간은 걸리지만, 부설 중에 케이블로 본토와 통신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발렌시아 섬을 기점으로 먼저 나이아가라의 케이블을 부설하면서 대서양을 나아가고, 해상에서 아가멤논과 합류해서 케이블을 접속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이아가라가 540km 설치한 곳에서 케이블의 풀어내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을 알아채고 제동을 걸다가 그만 케이블이 절단되고 말았다. 이 케이블은 그대로 심해로 가라앉았고, 당시엔 이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 공사를 포기해야 했다.
[2차 부설공사]
필드는 이듬해인 1858년, 2번째 부설 공사를 했다. 지난번 실패의 원인이었던 브레이크를 개량해서 일정한 힘 이상 나오지 않게 만들어서 바꿨다. 케이블은 지난번에 부설용으로 제조한 것 대부분이 남아 있어서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절단된 분량과 예비 케이블만을 새로 제작했다.
공사는 6월에 시작됐다. 이번은 브라이트의 안이 채용되어서 처음에 대서양 한복판에서 아가멤논과 나이아가라가 케이블을 접속하고 나서, 양 끝을 향해서 케이블을 부설해 가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이 항해는 순탄치 않아서 대서양 접속 예정 지점으로 향하던 중, 기록적인 폭풍우가 두 배를 덮쳤다. 아가멤논은 때때로 45도까지 기울며 침몰 위기에 빠졌다.
이 폭풍우는 7일 동안 이어져서 선원의 부상과 케이블의 손상을 초래했지만 6월 26일, 아가멤논과 나이아가라는 겨우겨우 해상에서 만나서 케이블의 접속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아가멤논은 동쪽으로, 나이아가라는 서쪽으로 케이블을 부설해갔으나 중간에 여러 차례 케이블이 절단되었고 그때마다 두 선박은 합류지점까지 되돌아와 다시 접속을 시도해야 했다. 그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먹거리와 연료인 석탄이 부족해져 계속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배는 결국 아일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3차 부설공사]
필요한 자재를 확보한 양쪽 선박은 즉시 3번째 부설 공사에 도전했다. 접속 방법은 2번째와 같았고, 1858년 7월 29일에 대서양 해상에서 케이블의 접속을 하면서 나이아가라는 그대로 순조롭게 뉴펀들랜드 섬에 도착했다. 한편 아가멤논은 다시 폭풍에 휩쓸리고, 한때 케이블에 원인 불명의 걸림이 발생하는 사태에도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8월 5일에 발렌시아 섬에 도착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케이블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이 희소식은 영국과 미국 양국에 전해졌고, 양국은 기쁨에 휩싸였다. 신문은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뉴욕에서 15,000명의 축하 행진이 이루어졌다. 기사장이었던 찰스 브라이트는 작위를 받았고,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과 미국의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791~1868)' 대통령 앞으로 축전이 보내졌다. 이때 여왕의 메시지는 16시간 반 걸려서 미국에 전해졌다.
<참고로 부설공사는 3차로 끝나지 않았다...>
간신히 개통한 케이블이었지만, '신호 감쇠 6'가 현저해지면서 정확하게 전달되게 하려면 재송신을 반복하거나 보내는 속도를 떨어뜨려야 했다. 화이트 하우스는 전압을 올려서 대처하려고 했으나 사태는 더 나빠지고, 10월 20일부터 전혀 통신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이 케이블은 불과 2개월여 만에 역할을 마쳤다. 2개월 동안 보낸 전보는 732통이었다.
원인은 주로 케이블이 바닷속에서 '콘덴서 7'가 되면서 신호전류가 누출되는 현상이었다. 콘덴서는 도체로 얇은 부도체를 사이에 둔 것이지만 해수는 전기를 통하기 위해서 전선과 해수에 낀 케이블의 피복이 콘덴서를 형성한다. 모스 부호와 같은 직류 펄스는 교류의 성질을 가지므로, 그 전하를 저축하고 방출하거나 반복한다. 방출은 양측에 일어나기 때문에 누설이 되고, 한층 더 충방전에 의해 파형이 둥글어졌고 그것이 신호 감쇠를 부른 것이다. 대책으로는 신호를 보낼 때 속도를 늦추는 것밖에 없었다. 이것은 톰슨의 지적이 적중한 셈이었다.
통신을 할 수 없게 된 원인은 절연 성능의 열화라고 생각되고 있다. 케이블 대부분은 처음 공사 전에 만들어서 2차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옥외에 방치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복재가 산화되거나 퇴화하였고, 거기에 화이트 하우스가 2000V라는 높은 전압을 가하면서 절연 파괴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해저 케이블은 간혹 상어와 같은 바다생물들이 손상시켜서 연결이 끊어지기도 한다>
거듭되는 실패로, 주주는 50만 파운드를 잃었다. 게다가 다음 해 홍해 횡단 케이블도 실패로 끝나면서 해저 케이블 사업은 근본적인 재검토를 해야 했다. 1859년에 영국 정부는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문가를 모아서 실패의 원인을 살폈다. 그리고 위원회는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사전조사만 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대서양 케이블 자체는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보고를 내놨다.
이를 보고받은 필드는 다시 대서양 횡단케이블 사업에 도전하기로 한다. 자금 조달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영국 자본가로부터 28.5만 파운드와 미국의 자본가로부터 8만 파운드를 모았다. 나머지는 새로 만들어진 케이블 제조사인 'TELCON(Telegraph Construction&Maintenance)' 사로부터의 출자로 보충함으로써 필요 자금을 확보했다.
또 필드는 화이트 하우스를 해고하고, 톰슨을 후임으로 내세웠다. 톰슨은 기존 주장에 따라 구리 및 절연부 단면적을 늘리고 강도 높은 새 케이블을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케이블은 면밀한 연구와 실험을 한 후에 설계되었고, 톰슨은 지금까지의 항해에서 케이블이 수없이 단선된 것은 해저의 깊이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측심기를 발명했는데, 이는 해저 수압에서 수심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 이전의 방법과 비교해서 더욱 정확하고 효율적이었고, 이후 부설 공사에 쓰이게 됐다.
[4차 부설공사]
4번째 부설 공사는 1865년에 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부터 해상에서의 케이블 접속 작업에는 위험이 수반되는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의 기술자였던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 1806~1859)'이 설계한 당시 최대의 증기 여객선 '그레이트 이스턴(SS Great Eastern)'을 사용한 만큼, 케이블 접속할 필요 없이 1척으로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게 됐다(만약 이스턴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배는 3척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레이트 이스턴은 7월 14일에 영국을 출항, 미국으로 향하면서 부설 작업을 펼쳤다. 이때 중간 케이블이 단편(短絡)되는 사고가 2차례 일어났다. 이는 케이블을 덮는 철사가 끊어지고 절연부를 관통한 데 따른 것으로 드러난 만큼 일단 케이블을 올려서 해당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임으로써 대처하였다.
그다음부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전체의 3분의 2까지 부설을 시행한 단계에서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케이블의 가장자리는 해저로 가라앉았다. 케이블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도구가 부족해서 그레이트 이스턴은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5차 부설공사]
4번째 공사도 실패로 끝났지만, 도구만 있으면 케이블을 올리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항해 중에 행해진 통신으로부터 이 케이블은 성능 면에서도 뛰어난 것이 밝혀졌다. 보고를 받은 필드는 새로 대서양에 케이블을 설치하고 다시 해저에 가라앉은 케이블도 끌어 올리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것이 모두 실현되면 대서양에는 2개의 케이블이 깔려야 한다.
새로운 케이블의 부설은 7월 13일부터 열리고, 27일 케이블은 뉴펀들랜드 섬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부설 작업은 성공했다. 그리고 8월 5일부터 일반 통신 사업을 시작한다. 한편, 그레이트 이스턴은 낙하한 케이블 인양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8월 31일, 케이블의 반전에 성공했다. 이 케이블도 뉴펀들랜드까지 접속하면서 계획대로 2개의 케이블을 부설하는 데 성공했다. 2번째의 케이블은 9월 8일부터 통신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러스트>
이렇게 해서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은 완성했다. 타임스는 '세계는 급속한 거대한 하나의 도시가 되고 있다'라고 논하였고, 톰슨 일행에게는 작위가 주어졌다. 필드는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작위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미국 의회는 감사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것으로 그 공적을 기렸다.
이 케이블은 상업적으로 성공, 처음 반년 동안 2만 9천 파운드, 다음 반년에서 43만 파운드의 수입을 올리면서 이 사업이 성공했음을 확실히 인증하게 되었다.
- Submarine communications cable, 물속에서 전기 통신 신호를 전달하기 위하여 바다 아래에 놓는 케이블 [본문으로]
- Valentia Island, 현재의 아일랜드령 [본문으로]
- Newfoundland, 현재의 캐나다령 [본문으로]
- Morse code, 짧은 발신 전류(・)와 긴 발신 전류(-)를 적절히 조합하여 알파벳과 숫자를 표기한 것으로 전신 연락에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 Black Sea, 동남유럽과 서아시아 사이에 있는 바다 [본문으로]
- 다양한 손실 요인에 의해 신호 또는 신호 전력이 약화되는 현상 [본문으로]
- condenser, 전기 회로에서 전기 용량을 전기적 퍼텐셜 에너지로 저장하는 장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