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인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 장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사진>
- '가쓰라-태프트 밀약(桂・タフト協定은)' '러일전쟁(日露戦争)' 중이던 1905년 7월 29일에 당시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 겸 임시 외교 대신(장관)이었던 '가쓰라 다로(桂太郎, 1848~1913)'와 필리핀을 방문하고, 다음으로 일본을 찾아온 미국 특사였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육군 장관 사이에서 오간 협정이다. 참고로 태프트는 이후 1909년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일본 측에서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명시하는 편이며, 간혹 '가쓰라-태프트 각서(桂・タフト覚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협정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지만 러시아에 사실상 승리를 거둔 후였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제국 군대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Teddy"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강화 권고를 받아들였다. 또한 미국은 주한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을 해임하였으며, 알렌은 1905년 6월에 대한제국을 떠났다. 이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필리핀 정책을 의회에 지지를 받기 위해서, 태프트 육군 장관을 단장으로 의원 30명(상원 7명, 하원 23명)을 포함한 총 83명의 대형 외교단을 파견키로 했다.
1905년 7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태프트 외교단은 호놀룰루를 경유, 7월 24일에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러일전쟁 중이던 일본을 방문한 목적은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평화협상 역할을 자처한 미국이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요구사항을 직접 확인하는 것과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Alice Lee Roosevelt Longworth, 1884~1980)'를 외교단에 포함함으로써 작년의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 1858~1923)'의 황실 외교에 대한 답례 및 일본이 필리핀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협정에서 미국은 당시 대한제국(이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인했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확인했다. 열강이 세력을 모색하는 시대 속에서 미국과 일본의 수뇌가 상대국의 권리를 서로 인정한 협정이라고 미·일 양국은 말하지만, 당사자이자 피지배국 입장인 한국과 필리핀의 의사 따위 없이 자신들 멋대로 정한 엉터리 같은 밀약이었다. 또,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서 1902년에 체결한 영일(영국과 일본) 동맹을 고려한 것으로 미국, 영국, 일본의 삼국을 통한 동아시아의 안보에 대한 의견이 교환됐다(라고 쓰고 원활한 지배라고 읽는다).
<당시 일본과의 밀약을 지시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협정은 호혜적으로 서명된 문서와 비밀 조약이 아니라 합의를 담은 회의 양해 각서(메모)이며, 이 합의 각서는 1924년에 미국 외교관이었던 테일러 데넷이 미국 의회 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인 사료'라는 이름의 라벨이 붙은 박스 안에서 이를 발견하였고, 이것을 'Current History'라는 이름의 잡지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과 맺은 비밀 협정'이라는 제목으로, 태프트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엘리후 루트(Elihu Root, 1845~1937)'에게 보낸 전문을 게재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협정은 도쿄에서 일본의 가쓰라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특사가 1905년 7월 27일 아침부터 외무 차관 '진다 스테미(珍田 捨巳, 1857~1929)'의 통역이 배석한 모임의 기록에서 기밀이었던 대화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각서에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어서 정확한 밀약의 시기를 알 수 있었다. 한편 일본 측의 원본은 소실되어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엘리후 루트 국무장관은 가쓰라 총리와의 협정을 의회에 보고하지 않았고, 사적 문서로 처리했다. 루스벨트 정권 내부의 고위 관리 가운데 이 밀약의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은 6명 정도였다. 이렇게 일부 사람만 알게 된 것은 당시 미국에서 협정을 조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필리핀 합병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고 조약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적었다. 게다가 앞으로 시작될 포츠머스에서 가질 러시아-일본 교섭의 중개역을 하는 미국이 영일 동맹의 비밀스러운 파트너임을 공식화할 수도 없어서 이 협정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풍자화,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끝나면서 서양 열강들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사실상 용인한다>
회동에서는 주로 3가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다.
- 대일본제국은 미국의 식민지로 되어 있던 필리핀에 대해서 야심이 없음을 표명한다.
- 극동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3국의 사실상의 동맹으로 지켜져야 한다.
- 미국은 대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지도적인 지위를 인정한다.
밀약중,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한반도에서 문제의 광범위한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는 일이 된다면, 다시금 타국과 조약을 맺어서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으로 강제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가쓰라의 주장을 들은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대일본제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성에 직접 공헌하는 것임을 동의했다. 태프트는 또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었다.
태프트는 이 회담에서 합의를 미국 정부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읽은 루스벨트는 7월 31일 '가쓰라와 태프트 간 회담은 모든 점에서 옳은 일, 태프트가 말한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함'을 가쓰라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한 내용의 전문을 태프트에게 전달했다.
전문을 받은 태프트는 8월 7일 마닐라에서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회담의 발언을 모든 부분에서 확인했다'라는 내용의 전문을 가쓰라에게 보냈다. 가쓰라는 다음날 일-러 강화회의의 일본측 전권대리로서 미국 포츠머스에 체제하고 있던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 1855~1911)'에게 이것을 알림으로써, 미-일간의 합의를 둘러싼 일련의 행위는 사실상 완료되는 형태가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러시아-일본의 포츠머스 조약 당시 사진>
가쓰라-태프트 협정 및 제2차 영일 동맹,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강화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실상 열강의 모든 나라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이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접수 하면서, 사실상 보호국이 된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이 을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리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신통치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서 강제로 퇴위당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에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