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헌(1948년 9월 14일~2003년 8월 4일)'은 한국의 실업가로, 현대그룹의 창시자이자 1세대였던 '정주영(1915~2001)' 명예회장의 8남 3녀 중 5남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취임, 현대를 이끌었으나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으로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사옥에서 투신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비운의 인물이다.
서울 태생으로 1973년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1979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로 졸업한다. 이후,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현대중공업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후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정 회장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에서 중역을 역임했다. 그리고 1995년, 현대그룹 부회장에 취임할 무렵부터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보이게 된다.
2000년, 고령으로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정몽헌은 일명 '왕자의 난' 이라고 불리던 형제들끼리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현대그룹의 단독 회장이 되었지만, 차남이었던 형 '정몽구(1938~)'는 현대차를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독립했고, 동생인 '정몽준(1951~)'도 현대중공업을 이끌고 독립해버려서 남아버린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보다도 규모가 작은 어정쩡한 그룹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 정주영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정몽헌은 1999년 2월 창설된 현대그룹 내의 대북 전문 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아산 측 이사로 2000년 6월에는 회장에 취임하면서, 이듬해 2001년 3월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이 별세한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현대그룹 내에서 대북 사업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사업에서 북한 측과 굵은 파이프(연결고리)가 생긴 정 회장은 북한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김정일(1941~2011)'과도 5차례나 회담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남북정상회담 한국 측 대표단에 뽑히는 등, 한국과 북한과의 관계에서 폭넓은 활약을 보이며 대북 사업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에서 설비 투자와 관광료 등, 2003년 중반까지 북한에 대해서 5억 달러를 웃도는 큰 투자를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북한 측에 비밀리에 큰 액수의 금액을 송금했다는 의혹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의욕적으로 추진한 금강산 관광객은 생각처럼 늘어나지 못했고 현대그룹은 엄청난 적자를 내던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까지 겹치자 정몽헌 회장은 큰 고뇌에 빠지게 된다.
2003년 2월, 5억 달러 대북 비밀 지원이 드러나면서 특별 검사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이 불허한 데 따른 특별 검사 수사는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비밀 송금 당사자인 정몽헌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이어지던 그 와중에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현대 아산 사옥 자신의 사무실에서 정몽헌 회장은 투신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유언에는 유골은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남편의 뒤를 이어서 현대그룹을 계승하게 된 부인 '현정은(1955~)' 씨의 반대로 하남시 정 씨 일가의 묘역에 안장되었고, 금강산에는 고인의 머리카락 등을 넣은 유품상자가 대신 안치되었다.
정몽헌의 사후, 2004년도부터는 금강산 관광이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고, 생전에는 여의치 않았던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도, 개성에서도, 한국 측과 북측이 함께 일하는 장면이 늘어나고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 도로 남북 연결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금강산에서는 이산가족 면회소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사업에 현대아산은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정몽헌이 기업인으로서 공을 들인 대북사업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으로 평범한 주부였던 박왕자 씨가 북한 측 군인에게 피살된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경색되면서 올 스톱,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