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프랑스 경찰의 호위를 받고있는 사가와 잇세이>
<일본의 식인 살인범, 사가와 잇세이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9년 6월 15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1981년, 사가와 잇세이가 파리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총으로 살해하고, 그다음 이틀 동안 그녀의 몸 일부를 먹었다. 그는 간신히 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살인으로 이득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은 사가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작가, 잡지 칼럼니스트, 소설가, 식당 평론가, 텔레비전 해설가, 심지어 AV 배우로 일본에서 10년여 동안 상대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후로 가난, 사라진 명성과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그는 곧, 자신의 끔찍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주면서 그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려고 하는 영화에 의해서 고국에서 다시 한 번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예고편, 최근 건강이 크게 악화된 사가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카니바]는 12일, 일본에서 개봉하는 프랑스-미국 합작작품으로 웹사이트 [exquisiteterror.com]의 리뷰는 이 영화를 [상세한 촬영]과 사가와에 대한 [은밀하게 취하는 폐소공포증 같은 묘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Asian Movie Pulse]는 [강렬함]과 [독특한 경험, 진정한 오리지널 영화]라고 평했다.
2017년, 베니스영화제 상영 당시 참석했던 많은 사람이 퇴장하는 등 영화제에서의 반응은 싱거웠다. 같은 해 토론토 영화제에서도 반응이 비슷하였는데, 곧 일본 관객들이 그들의 평가를 논하는 차례가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심 자체를 거의 받지 못하고 조용히 묻혔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사가와는 네덜란드 학생인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를 설득,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쏘았고, 그녀의 시체를 성적으로 학대하였으며 그녀의 몸 일부를 먹었다.
그는 불로니으 산림공원의 연못에 시체의 남은 것을 처리하려다가 붙잡혔다. 경찰은 사가와의 냉장고에 있는 접시에서 르네의 일부를 발견했다.
그가 재판을 받기 전에 법원은 사가와가 재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고, 그는 망명에 전념했다. 사가와의 부유한 부모는 곧, 파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아들을 석방해 달라고 당국에 탄원했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태우는 것에 기뻐했을 뿐이다.
일본을 돌아온 그는 석방되었고 일본 사회에 재편입되면서, 새로운 지위인 연예인의 삶을 누려왔다.
<1992년 당시, 사가와 잇세이의 모습>
사가와가 인기 잡지의 칼럼니스트로 초청받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안갯속]과 두어 권의 소설을 썼다. 그는 텔레비전 프로와 심지어 고기 요리를 샘플링하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 쇼에도 출연했으며, 심지어 AV 영화 에서는 그가 서양 여배우의 엉덩이를 물어뜯는 역할도 하였다(물론 살살 시늉만 하였다). 그 후, 그의 명성은 급속하게 쇠퇴해 갔고, 사가와는 상속금과 인터뷰 비용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사가와의 동생인 준 씨는 2013년 11월,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뒤 줄곧 돌보고 있다. 좀 더 최근에 준은 일본의 주간지에서 그의 형이 위 절제 수술을 받아서 더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가와는 튜브를 통해 배 안으로 직접 음식이 공급되며, 만성 당뇨병으로 병세가 악화하였다. 준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형이 여전히 좋아하는 여배우인 토다 에리카와 이시하라 사토미와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올해 초 70세가 되면서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자를 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와타나베 마코토 홋카이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부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이름을 들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모든 사람이 그를 거의 잊어버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작 일본 국내에서 많이 잊힌 사가와... 해외에서는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는데 말이다)
와타나베 부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텔레비전에서 그를 본 기억이 없으므로 이 영화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관심을 끌려는 의도라는 것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의 다큐멘터리 호러쇼다]
와타나베는 일본 언론들이 여성을 살해하고 소비한 사실을 너무나도 자유롭게 인정한 남성을 미디어에 고용한 것이 어떻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설명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때 [어쩔 수 없었다]고 시인했다.
그는 [그들이 왜 사가와를 오락에 이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비록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없지만, 그를 고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어야 했고, 그가 악명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와타나베는 일본 언론이 오늘날은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가와의 유명인사화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가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많은 일본인의 눈에는 그가 유죄로 판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책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간과될 수 있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를 고용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려 하지 않았다]
정치인이자 현재 도쿄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 교수인 나카바야시 미에코는 그런 당혹감을 반색했다.
그녀는 [당시 언론이 어떻게 이 사건의 사실을 무시하고 칼럼과 TV 출연료를 지급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마약과 같은 것으로 처벌을 받고 복귀하는 연예인을 볼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카바야시는 [사가와를 통한 홍보 의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일본 경제 거품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주려 했던 방송사와 출판사들 사이에 존재했던 경쟁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작자와 출판사는 사가와가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개인적인 연줄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가 한 짓으로, 현재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회사는 사가와로 다시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배급하고 있는 토카나의 오사와 마사키 부편집장은 11개 영화관이 이 영화를 상영하기로 합의했으며, 3주에서 5주 사이에 상영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업체들도 모두 카니바 배급을 거부해서 이 영화를 일본에 가져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사가와가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 더 많은 일본인이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고, 특히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죠, 카니바에는 몇 가지 선정적인 장면이 담겨 있지만, 이 영화는 식인 풍습의 공포뿐만 아니라 인류의 어두운 행위와 욕망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