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2월 8일> 1980년 12월 8일 - 비틀즈, <존 레논 피살 사건>

!@#^& 2019. 12. 7. 20:48


- 존 레논 피살 사건(Murder of John Lennon)비틀즈리더이자, 그 후 솔로 음악, 정치 활동, 평화주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세계적명성을 얻고 있던 영국뮤지션 [존 레논(John Lennon)]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시에서 피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루어본다.


[개요]

- 존은 이날, 당시 살던 뉴욕의 고급 아파트다코타 하우스(The Dakota、Dakota Apartments) 입구에서 마크 채프먼(Mark David Chapman, 1955~)에게 피살됐다. 이때 존은 아내오노 요코(小野 洋子, 1933~)와 함께 레코드 플랜트(Record Plant Studios) 스튜디오에서 퇴근하던 중이었다.

존은 시내에 있는 루즈벨트 병원(St. Luke's–Roosevelt Hospital Center)으로 이송되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사망이 선고(Dead On Arrival)되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40세로 너무나도 이른 시기에 떠나버렸다. 

지역 뉴스가 존의 죽음을 보도하자마자 병원과 다코타 하우스 앞에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존은 1980년 12월 10일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군의 펀글리프 묘지(Ferncliff Cemetery)에서 화장되어 아내인 요코에 넘겨졌으나, 그녀는 존의 장례는 치르지 않기로 했다. 

미국 전역에 존의 죽음을 보도한 최초미디어ABCNFL 중계[먼데이 나이트 풋볼(Monday Night Football)]에서의 캐스터 하워드 코셀(Howard Cosell, 1918~1995) 아나운서였다.


<당시, 레논의 피살을 보도한 ABC 뉴스>


[암살까지의 과정 & 그 이후]

- 1980년 12월 8일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Annie Leibovitz 1949~)가 미국 격주 잡지인 [롤링 스톤(Rolling Stone)] 관련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서 존의 집을 찾았다. 

리버비츠는 애초 존만 촬영하려고 했었다. 그녀가 말하길 [요코사진표지에 올라가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존이 자신과 아내가 함께 표지에 실리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리버비츠는 요코와 함께 사진이 잡지 표지를 장식할 것을 약속한다.

촬영이 끝난 15시 30분, 리버비츠는 다코타 하우스를 나왔고 존은 RKO 라디오 네트워크(RKO Radio Network)음악 프로그램에 방송될 예정인 샌프란시스코의 DJ, 데이브 쇼린(Dave Sholin)과의 인터뷰에 응한다. 이것이 존 레논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17시 40분, 존 레논을 태울 리무진이 늦게 도착하였고 존과 요코는 [Walking on Thin Ice[각주:1]]믹싱 작업을 하기 위해 레코드 플랜트 스튜디오로 향했다.


<피살당하기 몇 시간 전, 존 레논의 마지막 사진>


존과 요코가 RKO 라디오 네트워크 직원과 함께 리무진으로 향하던 중, 사인요청하는 사람이 여러 명 다가왔다. 그중 한 사람이 존 레논을 피살한 마크 채프먼이었다. 최근 다코타 하우스 밖에서 팬들이 존을 기다리며 사인을 조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온 25세경비원 채프먼은 그해 10월에도 존을 살해하러 뉴욕을 찾았으나 그때는 마음이 바뀌어서 그냥 돌아갔다. 어쨌든 채프먼이 존에게 앨범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각주:2]]를 말없이 건네자 존이 사인을 해주었다. 앨범에 사인을 마친 존이 [이거면 되는가?]라고 묻자, 채프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작가이자 존의 팬인 폴 고레쉬(Paul Goresh, 2018년 사망)는 이 조우의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바로 위 사진). 채프먼은 그날 오전부터 다코타 하우스 밖에서 존을 기다렸으며, 오후에는 보모헬렌 시먼(Helen Seaman)과 함께 귀가하던 존의 아들 (당시 5세)과 만났다고 한다. 채프먼에 따르면 숀의 손을 잠깐 만졌다고 한다.

레논 부부는 22시 50분경 다코타 하우스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레코드 플랜트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존은 아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일단 다코타 하우스로 돌아갔다가, 요코와 함께 근처 레스토랑스테이지 델리(Stage Deli)에 가기로 했다.

존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사인이나 사진 촬영에 응했다. 이에 대해서 생전의 존은 1980년 12월 6일 BBC 라디오 1 인터뷰에서 [모두 다가와서 사인을 조르거나 '안녕' 인사할 뿐, 곤란한 것을 하는 게 아니다[각주:3]] 라고 이야기했다시피 팬들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레논 부부는 별 걱정 없이 다코타 하우스의 보다 안전한 안뜰에 리무진은 정차시키는 대신, 하우스 앞인 72가(72nd Street)에서 내렸다.


<다코타 하우스 전경>


다코타 하우스의 도어맨으로 전 CIA 에이전트José Sanjenís Perdomod와 근처에 있던 택시 운전사는 채프먼이 보도 위에서 현관 아치그늘숨어 있는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존은 채프먼의 앞을 지나가면서 아까 채프먼을 만났던걸 떠올린 것 같았다고 한다. 

몇 초 뒤, 채프먼은 Charter Arms에서 제작.38스페셜 탄환용 회전식 권총, 언더 커버로 존의 등 중앙을 겨냥해 할로 포인트(Hollow Point, 일명 덤덤탄) 탄5발, 약 3m(9~10피트) 떨어진 곳에서 잇달아 발사한다. 

사건 당일 밤, 뉴욕시 경찰이 낸 성명이나 다양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채프먼은 발포하기 전에 큰소리로 [레논 씨(Mr. Lennon)]라고 부르며 쐈다고 하는데, 후에 열린 공판에서 조사목격자 인터뷰에는 딱히 그런 언급이 없었다. 채프먼 본인발포 전에 존의 이름을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하였다.

첫 번째 탄환명중하지 않고 존의 머리 옆을 스쳤으며, 다코타 하우스의 창문에 맞았다. 이어서 2발총탄이 존의 등 왼쪽명중한 다음, 나머지 2발이 존의 왼쪽 어깨관통했다. 존은 총상에서 나오는 출혈과 함께 [총에 맞았어!(I'm shot, I'm shot)]라고 하면서 다코타 하우스의 계단을 얼떨결에 5단 오르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서 지니고 있던 카세트테이프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러자 다코타 하우스의 컨시어지가 레논의 지혈과 함께 경찰을 불렀다.

밖에서는 도어맨인 채프먼이 지니고 있던 총을 쳐서 떨어트리곤, 그 총을 보도의 끝으로 발로 찼다. 채프먼은 코트모자를 벗어 경찰의 도착에 대비한 뒤[각주:4], 보도에 앉았다. 도어맨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Do you know what you"ve just done?)!]고 큰소리로 묻자, 채프먼은 조용히 [네, 내가 존 레논을 쐈어요(Yes, I just shot John Lennon)]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현장에 처음 도착한 경찰은 Steve SpiroPeter Cullen 두 사람으로, 다코타 하우스에서의 발포 사건 신고를 받았을 때 72가 와 브로드웨이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약 2분 후에 경관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너무나도 조용히] 보도 위에 앉아 있는 채프먼을 발견했다. 그때 채프먼은 총을 길거리에 내던지고 J. D.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호밀밭의 파수꾼]페이퍼백을 들고 있었다고 경찰들은 보고하고 있다. 

채프먼은 즉시 체포되어 경찰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졌다. 채프먼은 도망가거나 체포에 저항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존 레논의 안경, 레논의 혈흔이 안경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그 몇 분 후에 현장에 도착한 또 다른 경찰들이 존의 부상심각한 것을 알아채어, 구급차를 기다리지 않고 존을 순찰차뒷좌석에 태운 뒤 루즈벨트 병원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그중 한 순경이 [당신이 존 레넌이요(Are you John Lennon?)?] 묻자 존은 수긍하면서 [(Yes)]라고 답했다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의 보고에 따르면, 존은 말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곤 그 후에 곧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23시 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에서 존을 맞은 것은 스테판 린 박사(Dr. Stephan Lynn)였다. 경찰차 뒷좌석에서 순경이 존을 짊어지고 들것 위에 싣자 응급실로 급히 향했으나, 존은 도착 시에 이미 맥박이 없었고 호흡도 멎은 상태였다. 

린 박사와 다른 두 의사, 그리고 간호사 한 명이 15~20분 동안 존을 소생시키려는 조치를 했다. 린 박사는 심장 박동부활시키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존의 흉부절개하고, 직접 심장을 마사지하려 했으나 심장 주변 혈관손상심각한 것을 발견하곤 포기한다. 린 박사에 따르면 존의 사망 선고 시간23시 15분경이었다. 하지만 시각은 23시 7분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존의 시신은 1번가 520에 있는 시신 안치소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검시가 이뤄졌다. 사인은 흉부와 대동맥궁을 관통하고 있는 다수의 총상으로 인한 순환 혈액량의 80% 이상을 잃어버린 [출혈성 쇼크]로 보고되었다. 존의 검시를 담당한 병리학 의사는 해당 보고서에서 [얼마나 신속하게 의료 처치시행하였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총상을 입고 몇 분 이상 생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고 되어있다.

다소 생뚱맞은 얘기로, 병원의 외과 의사는 다른 목격자와 마찬가지로 존의 사망이 선고될 때 병원 내 방송에서 비틀즈의 노래인 [All my loving]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존의 등에 맞은 4발의 총탄 가운데 3발흉부 쪽으로 존의 몸을 관통했고, 또 1발심장 옆대동맥에 그쳐서 합계 총상은 7개였으며 거의 전부가 치명상이었다. 그리고 탄환에 의해 존의 내장 기관, 특히 왼쪽 폐심장 주변주요 혈관이 충격으로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 

린 박사는 [만약 존이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외과 의사 팀이 대기하고 있는 조치실 안에서 똑같이 맞이했더라도 결코 생환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태였다.

린 박사에게 남편의 죽음을 듣게 된 요코는 흐느끼며, [Oh no, no, no, no ... 거짓말이라고 해(tell me it's not true)!]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존의 결혼반지를 건네더니 요코는 침착성을 되찾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요코는 충격 속에서 게펀 레코드(Geffen Records) 사장 데이비드 게펀(David Geffen, 1943~)의 부축을 받으며 해당 병원을 떠났다.


<존 레논은 루즈벨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요코는 병원에 에 있는 5살 아들 숀에게 자신이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남편의 죽음을 언론에 전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요코는 숀이 아마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테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텔레비전 방송으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다.

한편, 그날 저녁 루즈벨트 병원 응급실에서 오토바이 운전 중 사고에 휘말린 WABC-TV 프로듀서알란 j. 웨이스(Alan J. Weiss)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웨이스는 다수의 경관이 에워싼 가운데 존이 들것으로 응급실에 이송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뒤, 와이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자 방송국전화정보를 전달했다. 정보는 곧바로 당시 ABC뉴스의 사장이었던 룬 알레드지(Roone Arledge, 1931~2002)에게도 전해졌다.

ABC 스포츠의 사장이기도 한 알레드지는 그날 밤 먼데이 나이트 풋볼의 종합 프로듀서를 맡고 있었다. 이때 존의 죽음이라는 정보를 전달받은 때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New England Patriots)마이애미 돌핀스(Miami Dolphins)의 경기가 4쿼터 후반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알레드지는 이 프로그램의 방송팀인 하워드 코셀과 프랭크 기포드(Frank Gifford, 1930~2015)에 존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TV 시청자에게 해당 속보를 전달할 것을 제안했다.

참고로 코셀은 1974년에 존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피살 소식을 시청자에게 알려주는 일에 불안을 느꼈으나 결국 그가 소식을 전하게 됐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30초.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 기포드: 무엇이 라인상에 있는지 신경 쓸 수가 없습니다. 하워드, 방송석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을 당신은 전해야죠.


- 코셀: 네, 전해드려야 합니다.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이것은 단지 풋볼 경기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입에 담기조차 꺼릴 것 같은 비극이 뉴욕의 ABC뉴스에서 전해졌습니다. 비틀스 멤버 중에서도 아마 가장 유명한 레논이 뉴욕 웨스트 사이드 맨해튼의 공동 주택 밖에서 배후로 2발[각주:5]의 총격을 받아 루즈벨트 병원에 급히 이송되었으나 도착과 동시에 사망이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뉴스 속보 후에 시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렇겠죠. 프랭크?


- 기포드: (잠시 후) 정말로 그렇습니다.


총격을 전국에 전한 최초TV 방송CNN의 통상적인 뉴스 프로그램으로 저널리스트 캐슬린 설리반(Kathleen Sullivan, 1953~)이 전한 것이었다. 당시 설리반은 존이 총격을 당했으나 그의 상태는 속보 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NBC동부 해안에서 방송되고 있었으며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 Starring Johnny Carson)]에서 임시 속보로 존의 죽음을 알렸다.

뉴욕의 록 전문 채널 WNEW-FM 102.7은 즉시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 전용 다이얼을 개설하여 청취자들로부터 전화를 접수한다. 이윽고 미국의 방송국은 프로그램 내용을 존과 비틀즈의 특집으로 변경한다.

다음날 요코는 성명을 발표했다. [존의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습니다. 존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를 위해 같은 일을 하세요. 사랑을 담아 요코, 숀(There is no funeral for John. John loved and prayed for the human race. Please do the same for him. Love, Yoko and Sean)]


<얼굴을 가린채 모습을 드러낸 채프먼>


[여파]

[존의 죽음에 이은 슬픔분출, 의심, 사람들에게 공유정신적 황폐에는 존과 로버트 케네디, 정신적 지도자 마틴 루터 킹용감하고 인기 있는 정치인 같은 세계적 저명인사 암살에 대한 반응과 비슷하게 확대되었고, 밀도가 있었다.

그러나 존은 정치적인 비유시적으로 사용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사회에 대한 정신적인 관심은 자신의 창조성을 기르고 넓히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내향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이전과 다른 충격을 준 점이었다. 

그의 상상력이 가져온 충격, 그의 천재성이 많은 사람에게 깊게 남긴 영향. 그런 것 모두가 너무나도 빠르고 무서운 형태잃어버린 것이며, 그것이 지난주 전 세계에서 개탄하고 슬퍼했던 바이다]

<제이 콕스(Jay Cocks, 1944~) [TIME], 1980년 12월 22일>


- 존의 피살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지금까지 없는 규모로 깊은 슬픔이 분출하였다. 존의 시신은 상기했듯이 1980년 12월 10일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군의 하츠데일에 있는 펀글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으며 장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요코는 다코타 하우스 밖에서 기도를 바치는 군중노랫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하겠다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일요일센트럴 파크에 다시 모여서 10분묵념하도록 요청한다. 

1980년 12월 14일, 요코의 요청에 부응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존을 추모하면서 10분간의 묵념을 했다. 영국 리버풀에는 3,000명이 모였으며 살해 현장 부근인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는 최대 225,000명 이상이 모였다. 그 10분 동안 뉴욕의 모든 라디오 방송국은 방송을 중단했다. 

또, 적어도 3명의 비틀즈 이 뒤를 쫓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요코는 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절망에 빠지지 말라는 광고를 내며 당부했다. 그리고 요코는 1981년에 솔로 앨범 [Season of Glass]를 발표하였는데 앨범 표지에는 존의 피범벅이 된 안경 사진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해에는 싱글 Walking on Thin Ice를 발표했다.

채프먼은 변호사정신질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2급 모살(Second-degree murder)죄로 유죄를 선고받아 뉴욕주 법에 따라서 최소 20년에서 최대 종신까지의 무기형을 선고받는다. 

20년이 지난 2000년가석방 신청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채프먼은 2019년 현재까지 가석방 신청10차례 기각되면서 지금까지 웬데 교정 시설(Wende Correctional Facility)복역 중이다[각주:6].


<뉴욕 센트럴 파크에 모인 팬들의 추모 영상>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m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aa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하려고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발 밑에는 지옥이 없고 

머리 위에는 빈 하늘만 

펼쳐 있다고 상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하,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m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다지 어렵진 않을 거예요 

신념을 위해 죽이지도 않고 죽일 일도 없고, 

또 종교마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속에 숨쉰다고 상상해 봐요... 그대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게 아니랍니다 

그대 언젠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랄께요 

그러면 우리의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n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그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봐요 

탐할 필요나 배고픔도 없고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 존재한다고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요... 그대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게 아니랍니다 

그대 언젠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랄께요 

그러면 우리의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1. 존이 리드 기타를 담당한 요코의 곡 [본문으로]
  2. 1980년 11월 17일 존 레논이 5년 만에 발표한 7번째 정규 앨범이자 존 레논 생전에 발매된 마지막 앨범. [본문으로]
  3. 전주 KCC 이지스야... 이게 팬서비스다. [본문으로]
  4. 무기를 숨기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에 제시하고자. [본문으로]
  5. 이때는 정확한 격발 수를 알지 못했다. [본문으로]
  6. 참고로 이 살인범이 나오면 복수하겠다며 벼르고 있는 존 레넌의 팬들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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