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일본명: ダッカ日航機ハイジャック事件, 다카 일본항공기 납치 사건)은 1977년 9월 28일 일본 적군파 1가 일으킨 납치 사건이다.
<해당 여객기의 납치 전 모습(1969년)>
1977년 9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과 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 파키스탄 진나 국제공항, 인도 뭄바이 국제공항, 태국의 돈므앙 국제공항, 그리고 홍콩의 카이탁 국제공항을 거쳐서 도쿄 국제공항行 일본항공 472편이 2경유지인 뭄바이 공항을 이륙한 직후에 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일본 적군파 그룹 5명에 의해서 납치됐다.
비행기는 인도 캘커타 방면으로 일단 항행하다가 진로를 변경,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샤잘랄 국제공항에 착륙하면서 범인 그룹은 인질들의 몸값으로 600만달러 3와 일본에서 4복역 및 구류 중인 동료 9명의 석방, 일본 적군파에 대한 참여를 요구하였고 만일 이것을 거부할 경우 또는 응답이 없으면 인질을 차례차례 살해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때 테러범들로부터 [미국인 인질을 먼저 살해한다]는 조건이 붙었고, 그 후 일본 정부의 대응에 미국에 대한 외교적 배려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또, 이 비행기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James Earl "Jimmy" Carter, Jr., 1924~)의 친구인 미국인 은행가가 타고 있었으며 범인들은 그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납치된 여객기가 착륙했던 해당 공항의 최근 모습>
이후 납치 항공기는 항공기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엔진을 정지시키는 바람에 기내의 온도가 45도 이상까지 올라가면서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때, 마침 탑승했던 일본 항공의 계약직 의사였던 호카리 마사오미(穂苅正臣, 1934~)가 환자들의 치료를 하였고 기장이 공항 관계자에게 에어컨을 작동시키기 위한 보조 동력과 물을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일단 한시름 놓았다.
범인들은 인질로부터 여권과 시계, 돈이나 귀금속류를 빼앗고 수화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하차장에 쌓아 올리면서 바리케이드로 삼았다. 그리고 비행기 창문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게 했고, 기내에서의 요구는 모두 여성 탑승객에게 시켰다.
일본 정부는 지금과 다르게 무력으로의 해결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지, 10월 1일에 후쿠다 다케오(福田 赳夫, 1905~1995) 내각 총리대신이 [한 사람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라면서 몸값 지급 및 [초법적 조치]로 수용된 적군파 구성원의 인도를 하기로 한다.
그런데 석방이 요구된 9명 중 우에가키는 [일본에 남아 연합 적군(赤軍)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치넨은 [일체의 오키나와 해방 투쟁은 오키나와를 거점으로, 오키나와 사람인 자신이 싸워야 할 일이므로 일본 적군과는 정치적·사상적인 일치점이 없다], 오무라는 [정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적군과는 색깔이 다르다]라면서 석방 및 일본 적군파로의 참가를 거부했다.
<당시 납치된 여객기의 모습>
일본 정부는 논의 과정에서 석방 요구 리스트에 오른 두 사람에 대해서는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인 이유로 5석방 거부 방침을 갖고 협상했다. 그러나 이를 납치범 측이 거부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가 굴복하면서 두 사람도 석방됐다.
일본 정부는 같은 날 아침, 운수정무차관인 이시이 하지메(石井一, 1934~)를 파견단장으로 일본항공의 아사다 시즈오(朝田静夫, 1911~1996) 사장 등 회사 임원과 운수성 간부를 중심으로 한, 납치 대책 정부 특사와 교체 승무원, 6톤의 식량, 몸값과 석방한 멤버 6명 등을 일본항공 특별기(더글러스 DC-8-62, 기체 번호: JA8031)를 통해서 다카로 운송한다.
일본 정부가 과격파의 수감자 석방 요구에 응한 것은 1975년 쿠알라룸푸르 사건 이후 2번째가 되었다. 또한, 검찰총장 카미야 히사오(神谷尚男, 1914~2015)와 법무대신 후쿠다 하지메(福田一, 1902~1997)는 법치국가에서의 [법의 파수꾼]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법을 무시한 초법적 조치의 시행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후쿠다는 시행이 결정된 후에 인책 사임한다.
<당시, 납치사건을 보고하는 일본항공 임원의 모습>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방글라데시 정부 수뇌가 이 사건의 대응에 쫓기고 있는 틈을 비집고 10월 2일 새벽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쿠데타 부대는 정부 요인의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항 관제탑에 모인 것을 이용했으며, 이 쿠데타군은 몸값 600만 달러의 강탈까지 기획하고 있었다.
그 뒤 계엄령이 발령되어 시내 및 교외에서 2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반란군은 진압됐지만, 공항 근처에서도 전투가 펼쳐지면서 관제탑 내에서도 일본 정부 관계자와 보도진 눈앞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였고 방글라데시 정부군의 사관 11명이 숨졌으며, 사건 해결의 진두지휘를 하던 정부 사령관이 부상하는 등 현지는 긴박했으나 당시에는 보도 지침에 의해서 상세한 사항은 관계자를 제외하면 알 수 없었다.
이때, 총성 등의 소리를 들은 범인 측으로부터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통신이 오자, 방글라데시 측은 [조금 긴급사태다. 병사가 다가오면 쏴도 된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스스로 지켜라]고 답했다. 당시 이시이 정무차관도 쿠데타군에게 맞을 뻔했지만, [일본인이다]라고 말하자 상대는 사과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지휘한 방글라데시 정부군 요인들의 모습>
범인 측은 애초부터 [일본 정부와는 교섭하지 않는다]고 통보했기 때문에, 교섭은 방글라데시 공군의 마무드 사령관에 의해 행해졌다. 이시이가 도착했을 때는 현지에서 인질 일부 해방, 남은 인원은 이송처에서 석방이라는 내용으로 현장은 정리돼 있었다. 마무드는 이 사건 해결을 자신과 나라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이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인해 마무드가 부상했기 때문에 그 후의 통신과 협상은 그의 부하가 대신했다. 그러나 이시이등 일본 측이 범인과 통신을 하면 범인 그룹은 태도가 빡빡해지는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일본 측은 전혀 교섭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2일에 임산부나 환자 등 몇 명의 인질 교환이 이뤄졌고, 적은 식량과 물·간식을 범인 측이 수용했다. 범인은 자신들이 들여온 비스킷만 먹고 물은 인질들을 시켜서 독이 있는지 없는지 맛보게 한 뒤에 주었다. 그 직후, 이집트인 승객의 콜레라 의심이 밝혀지면서 그 승객과 주변에 있던 5명을 석방하고 기내와 승객을 술로 소독했다. 범인들은 패닉을 우려해서 인질들에게 콜레라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구호기가 납치된 여객기가 멈춰 있는 활주로 반대편에 주기 하면서 범인 측은 마무드의 부하들에 의해서 진로를 차량 등으로 막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미국인 은행가를 죽인다는 통신과 함께 카운트다운 5초를 남겨놓고, 이시이 차관은 범인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응답했다. 이때 이시이는 독단적으로 구호기 중 마지막 교환 요원 오쿠히라에게 자신들 일본대표와 인질 전원을 교환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10월 3일, 다카하시 기장과 데드 헤드로 있던 6사와다 기장의 기지로 또 다른 인질 석방에 성공하면서, 승객 118명이 풀려났다.
<풀려난 인질들을 후송할 버스가 해당 여객기로 접근 중인 모습>
쿠데타 종료 직후, 쿠데타군에 의한 몸값 강탈을 우려한 방글라데시의 대통령령에 따라서 강제 이륙 명령이 내려졌고 승무원과 남은 인질들을 태운 납치 여객기는 구호기와 함께 방글라데시를 떠나서 일본 외무성이 미리 교섭장소로 수배한 알제리로 향하게 되었다.
경유지인 쿠웨이트에서 인질 7명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인질 10명을 해방, 그 후 알제리의 공항에 착륙하면서 이곳에 납치범과 석방범은 해당 나라 당국에 투항하였고 그들의 관리하에 마지막 인질 12명과 승무원 7명 전원이 풀려났다.
일본 적군파가 알제리를 선택한 것은 이 나라가 납치방지협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당시 알제리는 소련 등의 지원을 받아 동구권의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미국의 과격파인 흑표당의 7멤버 망명을 받아들였고, 선진국의 좌익 과격파 조직 및 쿠바와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등 제3세계의 혁명 조직의 최대 지원국 중 하나인 점이 컸다.
<풀려나는 인질들의 모습>
사건 해결에 많은 협력을 받았으며, 11명의 사망자를 낸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까지 사건을 해결한 방글라데시 당국에 일본 정부는 사례와 사과의 의미를 담고 사절을 보낸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통 크게 일본 정부에 대해서 보상 등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본 국내외로 크게 칭찬받았다. 또, 이 사건은 일본 정부가 보여준 [초법적 조치]를 통해서 당시 테러에 시달리는 나라들에 [일본은 테러까지 수출할 것인가?]등으로 비판받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이 마냥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니라서, 1970년대 세계 각국은 빈발하던 납치 테러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특수 부대 창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그해 독일의 연방경찰 제9국경경비대(GSG-9)를 참고로 납치 사건 등에 대처하는 특수부대를 경시청과 오사카부 경찰에 각각 창설했다.
이들은 애초 [특과 중대] 혹은 [제로 중대] 등으로 통칭하면서 존재 자체를 장기간 비공개로 하고 있었지만, 1995년에 발생한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사건에 출동하면서 범인을 체포, 인질을 구출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해당 특수 부대는 96년, 부대를 증설하고 장비를 강화한 후에 특수급습부대(特殊急襲部隊, SAT)로 개편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 납치사건을 계기로 경찰청은 경비사 공안3과 겸 외사과 조사관실을 설치하고 중동, 유럽, 동남아시아 등에서 일본 적군파의 수사를 하게 됐다. 또한, 엉뚱하게도 후쿠오카현의 결핵 요양소에 입원해 있던 환자가 [인질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같은 입원실 환자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로 숨지게 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의 특수부대인 특수급습부대(SAT)의 훈련 모습>
납치된 DC-8-62기(JA8033)는 그 후 일본 국내로 돌아가서 납치범에 의한 폭탄 폭발 실험으로 파손된 기내 화장실의 수리와 기내 청소 후, 정기 운항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1984년까지 일본항공에서 사용된 후에 멕시코의 아에로멕시코로 매각되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운행됐다.
한편, 석방된 6명 멤버 중 1986년 센스이 히로시(泉水博, 1938~), 1996년 시로사키 츠토무(城崎勉, 1947~), 1997년에는 에키다 유키코(浴田由紀子, 1950~)가 각각 체포되었다. 또, 실행범이었던 오사무 마루오카(丸岡修, 1950~2011)와 니시카와 쥰(西川純, 1950~)이 체포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받아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범인인 와코 하루오(和光春生, 1948~)는 이 사건에서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다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마찬가지로 수감 중이다.
현재까지 나머지 멤버인 사사키 노리오(佐々木規夫, 1948~), 반도 쿠니오(坂東國男, 1947~), 오쿠다이라 준조(奥平純三, 1949~), 다이도지 아야코(大道寺あや子, 1948~), 니헤이 아키라(仁平映, 1946~)는 국제 지명수배되어있다.
<풀려나는 승무원들의 모습>
-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1969년 조직된 일본의 공산주의 무장단체로, 1971년 창설되었고 2002년 해산된다. [본문으로]
- 더글러스 DC-8-62, 등록기호: JA8033, 다카하시 시게오 기장 이하 승무원 14명, 승객 142명. 그중 범인 그룹 5명 [본문으로]
- 당시 환율로 약 170억원. [본문으로]
- 현재(2018년) 기준으로는 약 1450억원. [본문으로]
- 해당 행위가 법률에 범죄로 규정되기 전에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반한다고 여기는 범죄이다. 자연범이나 형법법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 Deadheading: 항공사의 조종사와 승무원 등, 직원들이 업무 중 이동을 위해 여객기에 승객으로 탑승하거나 탑승한 직원을 말하는 업계 용어다. [본문으로]
- Black Panther Party: '흑인의 강인함과 존엄을 표현하기에는 검은 표범이 가장 알맞다'는 주장 아래 조직된 흑인 무장 조직으로, 1966년 창립되었다가 1982년 해산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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