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이질 바이러스의 모습>
- 오무타 집단 이질 발병 사건(大牟田爆発赤痢事件: 오무타 폭발 이질 사건)은 1937년 9월 25일, 후쿠오카현 오무타(大牟田)시 내에서 발생한 집단 이질 감염 사건이다. 일본 정부의 조사로 원인은 이질이라고 단정되어 있지만, 현재까지 그 조사 결과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오무타시의 모습, 참고로 오무타는 나가사키, 기타큐슈, 아라오 등지와 더불어 조선인 57,900여 명이 강제노역으로 끌려간 곳 중 하나다>
1937년 9월 25일 저녁부터 오무타시 내에서 다수의 사람이 고열과 구토, 경련을 일으키면서 잇달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 시내 각 병원에서는 갑자기 급증한 환자의 대응에 쫓겼고 다음 날 26일에는 사망자까지 발생한다. 당시 오무타시의 인구가 11만 명이었는데 10월까지 환자 수는 12,332명, 사망자는 712명으로 시민의 10% 이상의 사람이 이질 환자라는 대참사가 되었다.
내무부와 육군성,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거기에 규슈 제국 대학(현 규슈 대학), 나가사키 의과 대학(현 나가사키 대학 의학부), 구마모토 의과 대학(현 구마모토 대학 의학부)등 여러 기관의 조사 결과, 원인은 상수도 저수지 우물을 관리했던 파수꾼 일가의 유아(이질균 보균자)의 기저귀를 빤 오수가 우물의 파손된 장소에서 상수도로 침입한 것이 원인으로 단정 지었다.
그에 대한 징계로 당시 오무타시 수도 과장은 시장·부시장과 함께 책임을 지고 사임했는데, 후에 후생성(현 후생노동성)은 수도 오염에 의한 전염병 집단 발생의 대표적 예로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악의 집단 이질 사건으로 정리하고 있다.
<1 마이크로미터(1 µm) 크기에서 현미경으로 관찰한 이질균의 모습>
상기한 바와 같이 내무부에 의해 원인은 단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수도 과장은 애초부터 [수도 오염설]을 비판해 왔고 해당 인물 사후, 일본 국내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해서 이하의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수도 과장이 직접 조사한 내용]
- 이질(이질의 일종) 증세와 비슷하지만, 이질은 아니다.
- 오모타시 수도과에 의해 수질조사, 세균배양시험이 실시되었지만 이질균을 발견하지 못했다.
- 사고 발생의 해 봄에 해당 오염이 시작된 수원은 개수되면서, 저수지 우물을 거치지 않는 취수로로 변경됐다.
- 해당 식수원을 상용한 주민들 중, 한 명의 환자도 나오지 않았다. 수도 오염설의 핵심이 된 것은 파수꾼의 유아(당시 1세)의 기저귀 세탁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아이는 이질이 아니라 소화 불량이었다. 이것은 담당의의 진단서와 진료기록카드에 기재되어 있다.
- 9월 21~25일 사이에 미이케항(三池港)에 기항, 급수를 받은 9척의 배에 전보를 보내서 선원들의 상황을 확인한 결과 모든 배에서 [이상 없음]이라는 답장이 왔다.
- 수돗물을 음용한 모든 가정으로부터 환자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고, 미쓰이 미이케 염료 공업소 주변의 주택가에 환자가 집중되어 있었다.
[사건 당일 미쓰이 미이케 염료 공업소의 폭발 사고]
미쓰이 미이케 염료 공업소에서 이질 발병 사건 발생 당일이었던 오후 6시와 26일 오전 0시 20분, 2차례의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2번째 폭발 당시 소방조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갔지만, 정작 회사는 소방 조직의 출입을 거부한 것.
환자는 먼저 인후(목구멍)를 바이러스에게 침공당한 것과 시내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쓰러진 시간대,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시각과 맞아떨어짐이 드러났다.
당시 시대 배경으로, 사건 발생 2달 전에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면서 1중일전쟁의 가능성이 짙어졌고 이 공업소에서는 고엽제, 합성염료 등 군수품 제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군과 해당 공업소 내에서 비밀리에 이질 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가, 그것이 오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이질균이 검출되고 있고, 또 조사에 참가한 각 대학이 환자에게서 검출한 이질균은 각각 다른 종류인 것으로 결과가 나와서 이것 역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Marco Polo Bridge Incident: 1937년 7월 7일에 베이핑(현 베이징시)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 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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