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ć, 1981년 10월 3일~)는 스웨덴 말뫼(Malmö) 출신의 축구 선수로 現 MLS, LA 갤럭시(Los Angeles Galaxy) 소속이다. 포지션은 포워드이고 애칭은 이브라카타브라다.
즐라탄은 4개의 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였으며, 5차례 득점왕을 차지한 스트라이커로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다.
<말뫼 FF 시절의 즐라탄>
[탄생~말뫼시대]
- 이브라히모비치의 성이 보여주듯, 발칸반도의 現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옐리나 지방(Bijeljinska regija) 출신 보스니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근교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이주지인 스웨덴에서 만났으며, [이브라히모비치]라는 성은 [이브라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기독교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발칸반도 안에서 비교적 무슬림 비율이 높은 보스니아인들에게 많이 볼 수 있는 성이다.
즐라탄은 장남으로, 두 명의 남동생과 3명의 여동생이 있으며 말뫼의 이민 사회인 로셍오르드(Rosengård)에서 자라면서 6살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득점 능력이 뛰어나서 6점 뒤지고 있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투입, 9득점을 올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1995년, 말뫼 FF(Malmö Fotbollförening)와 계약하고 1999년에는 성인팀 데뷔를 이루었으나 그 시즌 말뫼 FF는 2부 리그로 추락한다. 이 여파로 주전 선수가 하나 둘씩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가운데, 이브라히모비치는 이것을 [주전으로 도달할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해 잔류한다. 그리고 본인의 판단대로 다음 시즌은 주전으로 뛰면서, 26경기 12득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팀의 1부 리그 복귀에 공헌한다.
(통산 47경기 18골)
<아약스 시절의 즐라탄>
[아약스 시대]
- 이 활약을 본 아약스 암스테르담(Amsterdamsche Football Club Ajax NV)과 아스널(Arsenal Football Club) 등 빅 클럽이 즐라탄 영입에 나섰는데, 특히 아스널은 당시 아르센 벵거(Arsène Charles Ernest Wenger, 1949~) 감독이 스스로 등번호 9을 보증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입을 시도했으나 2001년 7월 1일, 당시 10대 선수로선 파격적이면서 팀 사상 최고액인 780만 유로(현재기준 102억 8,359만 8,000원)의 이적료를 제시한 아약스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아약스에서 과거 마르코 판 바스턴(Marco van Basten, 1964~)과 파트릭 클라위버르트(Patrick Steven Kluivert, 1976~), 은완코 카누(Nwankwo Kanu, 1976~) 등이 짊어졌던 등번호 9번을 물려받았다.
데뷔시즌인 2001-02 시즌 KNVB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는 등 곧 팀의 주전을 꿰찬 즐라탄은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4득점, 리그에서도 10득점을 올리면서 주전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다음 시즌은 발의 부상으로 3개월 결장하지만, 복귀 후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16경기 13득점을 기록하였고 아약스의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통산 110경기 48골)
<유벤투스 시절의 즐라탄>
[유벤투스~인터밀란 시대]
- 2004년 7월 1일, 즐라탄은 이적료 1900만 유로(현재 기준 250억 4,637만 원)를 받고 이탈리아의 명문팀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이적 초기에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Alessandro Del Piero, 1974~), 다비드 트레제게(David Sergio Trézéguet, 1977~) 다음인 3번째 FW로 꼽혔지만, 2004-05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 개막전 브레시아전에서 데뷔, 빠르게 골을 꽂아넣으면서 카펠로 감독(Fabio Capello, 1946~)의 신뢰를 얻기 시작한다.
부상이었던 두 선수의 복귀 이후에도 유벤투스 공격수진의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최종 35경기 16골의 좋은 성적을 기록, AC밀란으로부터의 세리에 A 왕좌 탈환에 기여했다. 그리고 2005-06 시즌도 유벤투스의 세리에 A 선두 독주에 공헌하였으나, 2006-07 시즌 유벤투스의 심판 조작 혐의 1로 인한 팀의 2세리에 B 강등의 영향으로 AC밀란 이적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지만, 2006년 8월 10일 2460만 유로(현재기준 324억 2,845만 8,000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의 최대 라이벌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S.p.A.) 이적이 발표됐다.
(통산 92경기 26골)
<인터밀란 시절의 즐라탄>
2006-07 시즌에는 세리에 A 첫해 기록했던 16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5골을 기록, 인테르의 15번째 스쿠데토(세리에 우승)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세리에 A에서의 활약상이 무색하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무득점으로 침묵, 16강에서 스페인 발렌시아(Valencia Club de Fútbol, S.A.D.)에게 밀려 팀은 탈락했다.
2007-08 시즌은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리그에서 17골을 기록, 인테르의 16번째 우승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세리에 A 최종전인 파르마 FC의 경기에서 후반 도중에 투입되자마자 2골을 넣으면서 인텔의 승리에 기여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서는 5골을 기록했으나 16강전에서 리버풀(Liverpool Football Club)을 넘지 못하고 또다시 탈락한다.
2008-09 시즌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부진하면서 16강전을 잉글랜드의 맨유(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에게 일격을 맞고 세번 연속 탈락했지만, 리그에서는 펄펄 날면서 득점기계같은 모습으로 인테르의 리그 4연패에 공헌, 25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다.
(통산 117경기 66골)
<바르셀로나 시절의 즐라탄>
[FC 바르셀로나 시대]
- 2008-09 시즌 종료 후, [세리에 A에서 해야 할 건 이제 없다]라는 발언으로 이적설에 시달렸지만, 클럽이나 자신도 잔류를 밝혔다. 새 시즌의 등번호가 10번으로 결정되는 등 인테르에 잔류한다고 생각되었지만, 2009년 7월 27일 사무엘 에투(Samuel Eto'o Fils, 1981~)와 교환 + 이적료 4600만 유로(현재기준 606억 3,260만 원)로 트레이드 되면서 FC 바르셀로나와 5년 계약을 맺는다. 등번호는 에투가 달던 9번.
2009-10시즌 바르샤의 스타일에 적응할지 의문이 갔지만, 날이 갈수록 주위 선수와의 연계를 높이면서 리가 개막전인 스포르팅 히혼전(Sporting Gijón)에서 바로 골을 터뜨렸다. 그 후도 순조롭게 골을 거듭하면서 이적 첫 해 선수중, 개막 후 5게임 연속골이라는 바르샤의 클럽 기록을 세우면서 자신의 첫 엘 클라시코에서 3후반부터 앙리(Thierry Daniel Henry, 1977~) 대신 출전하면서 다니 아우베스(Daniel Alves da Silva, 1983~)의 절묘한 크로스에 뛰어들면서 왼발 발리 슛으로 결승골을 터트렸다.
<09시즌 엘클라시코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즐라탄>
하지만 시즌 후반에는 부상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서서히 컨디션을 잃었고 막판에는 벤치에서 시작하는 일도 많아졌다. 최종적으로는 29경기에 출전하면서 16골을 기록했지만, 즐라탄의 기대에 100% 미쳤다고 말하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후에 즐라탄은 당시 과르디올라(Josep Guardiola i Sala, 1971~) 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다고 말했다.
(통산 46경기 22골)
<밀란 시절의 즐라탄>
[AC 밀란 시대]
- 2010년 8월 28일, AC밀란에 임대로 넘어가면서 불과 1년 만에 이룰 것 없다던 세리에 A로 복귀했다. 해당 계약은 이듬해 이적료 2400만 유로(현재 기준 316억 3,440만 원)로 4년 계약의 완전 이적이 가능한 옵션이었다. 등번호는 11번으로 세리에 A를 주름잡은 스타답게 2010-11 시즌 입단 1년 차인 밀란에서도 부동의 존재가 되면서 리그전 14득점을 기록, 인테르에게 5연패를 내주며 기나긴 부진에 허덕이던 밀란에게 7년 만의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토트넘 홋스퍼(Tottenham Hotspur F.C.)에 패하면서 또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밀란으로 완전히 이적한 2011-12시즌에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준준결승에서 한때 몸담은 바르셀로나에 패하면서 탈락하지만, 11시즌 세리에 최다인 28골을 기록하고 자신의 2번째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하는 영광을 맛본다. 또, 동시에 자신의 최고 기록인 공식전 합계 35득점, 15도움을 기록한다.
그러나 팀은 유벤투스와의 우승 경쟁에 패하면서 2연패를 놓쳐 아약스 시절부터 이어지던 자신의 국내 리그 연속 우승 기록이 8년 만에 끊겼다.
(통산 85경기 56골)
<영광의 파리 생제르맹 시절>
[파리 생제르맹 시대]
2012년 7월 18일, 파리 생제르맹(Paris Saint-Germain Football Club)에 3년 계약으로 이적료 2300만 유로(현재기준 303억 1,630만 원)에 이적한다. 입단 초기 등번호는 18번이었지만, 10번을 착용하던 MF 네네(Anderson Luiz de Carvalho, 1981~)가 시즌 중에 팀을 떠나면서 시즌 도중부터 등번호를 10번으로 변경한다.
즐라탄은 빠르게 적응, 리그에서 30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프랑스 리그 득점왕에 최우수 선수상도 받는 등 파리 생제르맹에게 19년 만의 리그 우승을 안겨주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또한 시즌 중이었던 10월 18일에는 골든풋 상을 받는다. 4
2015년 3월 15일, 보르도(F.C. Girondins de Bordeaux)전에서 판정에 불만을 표하며 [이 똥 같은 나라는 PSG에 맞지 않다]라고 발언한 일이 문제가 되자 클럽 공식 사이트에서 사과했지만, 4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그 뒤 3경기 출전 정지 처분으로 경감된다.
2015년 10월 4일 열린 마르세유전에서 자신이 획득한 2개의 PK로 클럽 통산 득점 기록을 경신한다.
2016년 5월 13일 자신의 트위터로 [왕으로 와서 전설로 떠난다(I came like a king, left like a legend)]라는 말과 함께, 해당 시즌을 끝으로 생제르맹에서의 행보를 마친다.
(통산 180경기 156골)
<맨유 시절의 즐라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대]
- 2016년 6월 30일, 자신의 트위터로 맨유행을 발표하면서 인터밀란 시절 은사 조세 무리뉴(José Mário dos Santos Félix Mourinho, 1963~)와 재회한다. 등번호는 아약스, 바르셀로나 시대와 같은 9번으로 결정하였고, 2017년 2월 5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레스터 시티(Leicester City Football Club)전에서 시즌 15번째 골을 넣으면서 리그 최고령 15득점 기록을 세운다.
2월 16일, 유로파리그 생테티엔(Association Sportive Saint-Étienne Loire)전에서 맨유 이적후 첫 해트 트릭을 달성하면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4월 20일 유로파 8강전 안데를레흐트(Royal Sporting Club Anderlecht)와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으로 교체, 진단 결과 오른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 손상으로 판명되면서 수술 및 장기간 출전이 불가능하게 된다. 부상의 영향으로 계약 연장의 옵션은 사라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계약은 만료된다.
그러다가 8월 2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즐라탄과 새롭게 1년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또, 10번 유니폼을 착용할 것도 함께 발표된다. 그후 11월 18일 리그 제12라운드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nited Football Club)전에 출전하면서 불과 7개월이라는 빠른 속도로 재기한다. 그리고 11월 22일 UEFA 챔피언스리그의 FC 바젤(Fussball Club Basel)전에 교체 출전하면서 축구선수로는 최초로 7번째 클럽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한다.
그뒤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018년 3월 2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브라히모비치의 계약 즉시 해제에 합의했다고 발표하면서 맨유의 생활도 끝이난다.
(통산 53경기 29골)
[LA 갤럭시 시대]
- 2018년 3월 23일 즐라탄은 LA 갤럭시로 이적을 발표했다. 등번호는 9번으로 결정되었고, 3월 31일 로스앤젤레스 FC(Los Angeles Football Club) 경기에 출전하면서 MLS 데뷔를 한다.
<즐라탄, 충격의 MLS 데뷔전 하이라이트>
이 데뷔전에서 약 35m 거리의 롱 슛으로 멋지게 첫 골을 기록하였고, 7월 30일 올랜도 시티(Orlando City SC)전에서 MLS 이적 후 첫 해트트릭을 달성한다.
이적 첫해인 2018년 시즌은 27경기 20득점을 기록하며 연간 베스트 11에 선출되었고, MLS 신인상에도 뽑혔다. 만족한 구단 측은 12월 18일 즐라탄과 1년 계약을 체결한다.
2019년 6월, 이브라히모비치의 연봉 액수가 공개되었는데 MLS 사상 최고액인 720만 달러(86억 9,040만 원)였다.
(현재 진행 중)
[국가대표 경력]
즐라탄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2001년 1월 31일 페로 제도전이다. 이 데뷔전을 계기로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 20세의 나이로 선출됐지만, 조별리그인 아르헨티나 전과 16강전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2경기 30분 출전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뒤 유로 2004 본선에선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팀을 8강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네덜란드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배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8경기 8득점을 기록하며, 스웨덴 대표로 본선 티켓을 획득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귀신같이 부진에 빠지면서 조별리그 도중, 노장이었던 마르쿠스 알베크(Marcus Allback, 1973~)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는 등 무득점에 그치며 팀도 개최국 독일에게 패해 16강에 그친다.
2006년 9월 유로 예선 기간에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크리스티안 빌헬름손(Christian Ulf Wilhelmsson, 1979~), 올로프 멜베리(Erik Olof Mellberg, 1977~)등과 함께 국가대표에서 추방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7년 3월, 대표팀에 복귀했다.
<유로2004 스웨덴과 이탈리아의 조별리그 경기>
유로 2008에서는 조별리그 1경기였던 그리스전에서 화끈한 중거리 슛을 터뜨렸다. 이 골은 즐라탄이 대표팀에서 무려 2년 8개월 만에 넣은 골이 됐다. 경기는 이후 스웨덴이 추가 골을 넣으면서 2-0으로 지난 대회 챔피언이었던 그리스에 승리를 거둔다.
제2경기 스페인전에서 당시 잘 나가던 페르난도 토레스(Fernando José Torres Sanz, 1984~)에게 선제 골을 내주었지만, 즐라탄이 동점골을 꽂아넣으며 1-1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러나 후반 추가시간에 다비드 비야(David Villa Sánchez, 1981~)의 결승골로 경기는 1-2로 아쉽게 패한다.
제3경기 러시아전에서 풀타임 출전하였으나 불발로 끝나고, 경기도 0-2로 패하면서 그대로 본선에서 탈락, 자존심을 구긴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같은조에 있었던 스페인, 러시아는 각각 우승과 준결승까지 진출하면서 실력을 과시한다.
2010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는 덴마크·포르투갈등 강호들과 같은 그룹안에 들면서 최종 결과 3위로 본선 출전이 무산됐다. 그뒤 2009년 12월 24일, 대표팀 은퇴를 표명하면서 [잠시동안 대표팀으로 플레이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한다. 그러다가 2010 월드컵 종료 후 복귀를 결정하면서 2010년 8월 11일 스코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 결승골을 기록한다.
<즐라탄의 인생경기인 잉글랜드와의 친선전. 이 경기에서 즐라탄은 혼자서 4골을 넣으며 팀을 하드 캐리 한다. 특히 4번째 골은 그저 대단...>
헨리크 라르손(Henrik Edward Larsson, 1971~)의 은퇴 후에는 대표팀 주장으로 임명된다. 유로 2012 예선에서는 핀란드전에서 해트 트릭을 달성하는 등 팀 최다인 5골을 터뜨리면서 스웨덴의 4회 연속 유로 본선 진출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맞이한 유로 2012 본선. 조별 리그 제1차전은 개최국 우크라이나전으로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세리에의 득점 기계였던 안드리 솁첸코(Андрі́й Микола́йович Шевче́нко, 1976~)에 연거푸 골을 허용하면서 1-2로 역전패한다. 두 번째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도 2-3으로 패했고, 2연속 역전패를 당했다.
이로써 스웨덴의 조별 리그 탈락이 확정된 가운데 맞이한 제3차전 프랑스전에서 호쾌한 발리슛으로 2-0, 스웨덴의 대회 첫 승리에 기여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즐라탄은 UEFA 선정 대회 우수 선수 23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즐라탄은 팀의 조기 탈락에 낙담한 모습이었지만 2014 월드컵을 목표로 다시 한 번 국가대표팀을 이끈다.
2012년 11월 14일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4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승리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4번째 골이 25~30m의 위치로부터의 바이시클 킥은 즐라탄 자신의 인생골로 인정할 뿐 아니라, 동료나 상대 팀으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이 골로 2013년, 최고의 골을 넣은 선수에게 수여하는 FIFA 푸슈카시상(FIFA Puskás Award)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2014년 월드컵 예선에서 포르투갈과의 플레이오프전에 밀리면서 또다시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진출을 놓고 겨룬 포르투갈과 스웨덴의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 하이라이트. 당시 파리의 왕은 혼자 2골을 넣으면서 팀을 이끌었으나, 포르투갈에는 메시와 함께 신계를 양분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2014년 9월 4일, 에스토니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2득점을 올리며 대표 통산 50득점 달성에 성공. 이것으로 스웨덴 대표 통산 득점 기록을 82년 만에 경신하였고 9월 8일 유로 2016 예선과 호주전에서 통산 100경기 출전을 달성한다.
2015년 11월 14일, 덴마크를 홈에 불러들인 유로 2016 예선 플레이오프전에서 PK로 결승점을 올렸고 2015년 11월 17일 열린 플레이오프 두 번째 경기에서는 멀티 골로 팀을 유로 본선 진출로 이끌었다.
유로 2016 대회 기간 중,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즐라탄은 스웨덴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2016년 6월 22일, 유로 2016 조별 리그 3경기였던 벨기에전에서 패하면서 스웨덴의 탈락이 결정되었고 이 경기가 즐라탄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통산 116경기 62골)
[플레이스타일]
- 발밑 기술과 발군의 피지컬을 겸비하고 있다. 195cm의 장신으로 공중전과 몸싸움에 매우 강하고, 빠르고 정확한 볼 컨트롤에 스피드까지 있어서 견실한 포스트 플레이도 가능한 만능형 공격수이다.
신체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아크로바틱한 슈팅도 자신 있으며, 스스로 점수를 딸 뿐만 아니라 어시스트도 능숙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진기명기 같은 플레이를 선보인다.
[에피소드]
- 유년기부터 스웨덴에서 한국인에게 태권도를 배웠으며, 이미 17세 때 유단자였다. 그래서 아크로바틱하고 유연성 있게 골을 집어넣곤 한다.
- 동시대에 같이 플레이했던 선수 중 최고는 유벤투스와 인터밀란팀 동료였던 파트리크 비에라(Patrick Vieira, 1976~)라고 말한 바 있다.
- 스웨덴어 사전에 [zlatanera(지배한다)]라고 하는 의미로, 즐라탄에 의한 조어가 신어로서 정식 등록되었다.
- 2014년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는 세계 운동선수의 연봉을 공개했다. 즐라탄의 연봉은 4040만달러(현재 기준 487억 6,280만 원)이며 전 세계의 선수 중 12위로, 축구 선수 중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 1984~), 리오넬 메시(Lionel Andrés Messi Cuccittini, 1987~) 다음인 3위였다.
- 아약스, 인터밀란, 바르셀로나, PSG까지 4클럽에서 한솥밥 먹었던 마스웨우(Maxwell Scherrer Cabelino Andrade, 1981~)와 정말로 친한 친구이며, 가족끼리 서로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 칼치오폴리(Calciopoli): 이탈리아의 축구 리그인 세리에 A와 세리에 B가 연관된 축구 스캔들로, 2006년 5월 이탈리아 경찰 측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으며, 당시 리그 챔피언인 유벤투스 FC를 포함해 AC 밀란, AC 피오렌티나, SS 라치오, 레지나 칼초 등이 연루되었다. [본문으로]
- 이 징계로 유벤투스는 세리에 B로 강등되었고, 2006-07 시즌 승점이 9점 삭감되었으며 즐라탄이 뛰었던 04~06 두 시즌의 리그 우승도 박탈당했다. [본문으로]
- El Clásico: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Fútbol Club Barcelona)와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 Club de Fútbol)의 더비 경기다. [본문으로]
- Golden Foot: 28세 이상의 뛰어난 현역 축구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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