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21일> 1938년 5월 21일 - 쓰야마 30명 대량살인 사건

!@#^& 2019. 5. 21. 15:49

<출처: wemedia.ifeng.com>

- '쓰야마 사건(津山事件)', 또는 '쓰야마 30인 살인(津山三十人殺し)'은 1938년 5월 21일 새벽, 오카야마현 도마타군 니시카모촌 오오아자 유키시게(현 가모초 유키시게)의 카이오, 사카모토 두 부락(마을)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 사건이다. 일반적으로는 쓰야마 사건이라고 불리며, 범인의 이름을 따서 '도이 무쓰오 사건(都井睦雄事件)'이라고도 한다.

범행이 이루어진 2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에 28명이 죽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그중 2명은 12시간 안으로 사망). 또한, 범행 후에 범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피의자 사망으로 불기소 처리 되었다.


<출처: sohu.com>

범인 도이 무쓰오는 1917년 3월 5일, 오카야마현 도마타군 니시카모촌 오오아자 구라미(현 쓰야마 시)마을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 3살 때는 어머니를 동시에 폐결핵으로 잃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후견인이 되었고, 일가는 카모의 중심부인 닷츄로 이사를 했다. 그후 도이가 6살 때 일가(도이, 할머니, 누나 이렇게 3명으로 호주는 도이였다)는 할머니가 태어난 고향인 카이오 마을로 다시 이주하였다. 이토의 집안은 어느 정도 소득과 자산이 있어서, 밭농사와 함께 비교적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도이는 '심상고등소학교(일본에서 국민학교령이 시행되기 전, 소학교의 교과와 고등소학교의 교과를 한 곳으로 배치한 제도다)'를 졸업한 직후, 늑막염을 앓게 된 도이는 의사로부터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서 잠시 집에서 쉬게 된다. 병세는 곧 회복세를 보였고, 실업보습학교에 입학했지만 누나가 결혼한 이후부터는 서서히 학업을 싫어하면서 집안에 틀어박히게 되었고, 같은 나이대의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1937년, 도이는 징병 검사를 받았는데 여기서 결핵을 사유로 입영 불가 판정을 받게 된다(민병으로만 징용은 가능하지만 사실상 불합격이다). 그 무렵부터 도이는 평소에 관계를 맺은 여성들에게 결핵을 이유로 관계를 거절 받게 되었고, 이것은 도이를 격분하게 만든것을 넘어서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출처: plaza.rakuten.co.jp>


도이는 그 해, 수렵 면허를 취득하고 2연발 엽총을 구매했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고베에서 맹수용 12구경 5연발 브라우닝 엽총을 구입했다. 도이가 매일 산에 틀어박혀서 사격연습에만 매달리다 보니 밤마다 엽총을 들고 마을을 배회하는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도이는 범행 준비로 자택이나 토지를 담보로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이가 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된장국에 약을 넣은 것을 본 할머니가 그 일로 손자에게 독살당한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경찰에 고소당해서 압수수색을 당한다. 여기서 엽총 한 자루 외에 일본도·단도 등을 압수되었고 엽총 면허도 취소됐다(이 약과 관련된 할머니의 얘기를 들은 지인이 훗날 도이에게 약에 관해서 물었다고 한다. 그때 도이는, "평소 내가 복용하고 있던 와카모토 위장약을 할머니에게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라고 말은 했다지만, 된장국에 혼입한 약이 정말로 와카모토였던 것인지 그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도이는 압수수색으로 흉기류를 모두 잃었지만, 지인을 통해서 엽총이나 탄약을 몰래 구입하거나 도검 애호가로부터 일본도를 넘겨받아 다시 흉기류를 갖추게 된다.

이전에 평소 관계를 맺고 지냈지만, 도이를 떠나 다른 마을로 시집간 여성이 마을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도이는 1938년 5월 21일 새벽, 범행을 시작한다.


<출처: alpy-alpy.net>


도이는 사건 며칠 전부터 누나를 비롯한 지인 몇 명에게 보낼 장문의 유서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자전거로 이웃마을인 가모초 주재소(파출소)까지 직접 가보면서, 마을 주민이 지원을 요청하는 데 걸릴 시간을 미리 파악해 두는 등(당시, 니시카모 마을 주재소의 순사는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면서 범행을 진행하고 있던 것이 수사로 판명되었다. 자신의 누나를 상대로 보낸 편지에서는 "누나, 빨리 병 나으세요. 이 세상에서 강하게 살아가세요."라는 내용이었다.

1938년 5월 20일 오후 5시경, 도이는 전봇대에 올라가서 송전선을 절단해서 카이오 마을만 정전시킨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정전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서 전기 관리업체에 신고를 하거나 원인 파악 등 조처를 하지 않았다(완전 시골 마을에 1930년대라서 전기를 지금처럼 쓰던 시대가 아니었다).

5월 21일 1시 40분경, 도이는 행동을 개시한다. 목닫이의 학생복에 군용 각반과 지카타비(일본의 전통 버선 타비를 모델로 하여 20세기에 만든 양말)를 입고, 머리에는 머리띠를 두르면서 소형 회중전등을 양쪽에 1개씩 묶어 붙였다. 목에는 자전거용 내셔널 램프를 들고 허리에는 일본도 한 자루와 비수를 두 자루, 손에는 개조한 9연발 브라우닝 엽총을 쥐었다.


<출처: hayabusa.open2ch.net>

도이는 인근 주민들을 약 1시간 반 안에 걸쳐서 차례로 개조 엽총과 일본 칼로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련의 범행은 지극히 계획적이고 냉정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상기했듯이 사망자 30명(즉사 28명, 중상 후 사망 2명), 부상 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가운데 5명이 16세 미만(최연소는 5세)이었다. 총 11채의 집이 표적이 되었는데 그중 3채가 일가 전원이 피살되었고, 4채의 집은 생존자가 각각 1명뿐이었다. 범행을 당한 집들의 생존자들은 격렬한 총성과 고함, 비명을 듣고 곧바로 몸을 숨기는 등 도움이 되었으며, 2명은 습격의 밤에 마을에 없었기 때문에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느 집에서는 그 집의 주인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도이는 "그렇게까지 목숨이 아까우냐? 좋아, 살려주마" 라고 말하곤 그 자리를 떠났다.


<출처: matome.naver.jp>


<도이의 살인행각>


1. 도이는 처음에 집에서 곤히 잠을 자던 할머니의 목을 도끼로 쳐서 즉사시켰다.

2. 이웃의 A 집에 침입, 아내와 아이 3명을 살해.

3. B 집으로 침입, 아내 B, 딸 둘을 사살.

4. C 집에 침입, C와 아내를 사살한다. 또, 농사를 도우러 왔던 친척도 사살. 주인의 모친이 살려달라고 발밑에서 매달리며 목숨을 구걸하자 도이는 "너희 집에는 별다른 원한은 없지만, (도이가 원한을 품고 있던 있는 집의) 며느리를 들였기 때문에 죽이게 되었다"라고 말하며 엽총을 발포했다(탄환의 속도가 떨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 늑골(갈비뼈)로 피탄되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5. D 집으로 침입, D, 장남과 아내, 5녀, 6녀를 사살. 4녀는 이웃집으로 도망쳤다.

6. D 집의 넷째 딸이 들어온 E 집, E는 바닥에 딸을 숨겼지만 E의 아버지가 사살됐다. D가의 넷째 딸, E 집의 넷째 딸이 부상했다.

7. F 집으로 침입, F와 어머니를 사살.

8. G 집에 침입, G의 아내와 양잠을 도우려고 머무르던 두 딸을 사살. 이때 G는 피가 낭자한 도이가 엽총을 들이밀면서 겁을 주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자 도이는 "넌 내 험담을 하지 않았으니, 봐주겠어" 라고 말하며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9. H의 집으로 침입, H의 여동생과 모친을 사살한다. 도망친 H는 옆 마을 주재소에 참상을 알렸다.

10. I 집에 침입, I의 부모님과 아내, 아이를 사살.

11. J 집에 침입, J의 아내는 덧문을 열어서 밖을 엿보고 있을 때 사살됐다.

12. K 집에 침입, K와 아내를 사살.



<출처: matome.naver.jp>

약 1시간 반에 이르는 범행 후 도이는 유서를 쓰기 위한 연필과 종이를 빌리기 위해서 이웃 마을의 외딴집을 찾았다. 집의 사람들은 피범벅인 도이의 괴이한 모습에 놀라움과 극도의 두려움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집의 아이가 예전에 도이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듣던 인연으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연필과 종이를 받았다. 도이는 떠날 때 이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했다.

그 뒤 3.5km 떨어진 아라사카 고개 꼭대기에서 유서를 추가로 작성한 뒤, 엽총으로 자살했다. 도이의 시신은 이튿날 아침, 산을 수색하다가 발견되었다. 엽총을 쏴서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어서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유서의 내용에는 범행을 저지른 이유,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 두 살 때부터 도이를 길러준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 등이 적혀있었다. "할머니는 죽여서는 안 되지만 나중에 남겨질 것을 생각해서 그만,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에는 "날이 밝아진다. 죽죠."라는 문장으로 유서는 끝이 났다.

도이는 유서에서, 이날 범행을 일으킬 결의를 한 것은 이전 도이와 관계가 있었음에도 다른 집으로 시집간 여성이 카이오 마을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 여성은 친정에 도이가 침입했을 때 도망쳐 결국 살아남았고, 반대로 그 여자가 도망친 옆집의 부인이 사살되기도 하였다.


<출처: news.infoseek.co.jp>

사건은 라디오나 신문 등의 매스컴에 의해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카이오 마을에 미친 영향은 컸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일가가 전멸하거나 일가의 대부분을 잃은 곳도 있고, 마을 대부분이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어서 일손이 부족해져서 생활이 어려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도이의 친척으로, 도이로부터 굳이 습격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일가가 미리 계획을 알았음에도 감추고 있던 것은 아니냐는 괜한 의심을 받아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건 이후, 범인 도이가 경찰 조사를 받기 전 자살하고 많은 피해자가 숨졌기에 생존자들의 증언만 남았다. 그런데 생존자 대부분이 숨진 피해자들의 평소 행실에 대한 잘잘못을 도이에게 뒤집어씌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면, 도이와 관계가 있었다고 소문난 여성이라도 본인이 그냥 부정해 버리면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부분도 많이 남았다. 1975년에 간행된 해당 지역의 향토역사책에서는 본 사건에 대해서 간략하게 '도이 무츠오 사건이 발생했다'라고 다룰 뿐이다.


<출처:徒然雑感備忘録>

최근 2015년 봄, 폐가로 남아 있던 도이의 생가가 무너졌다. 카이오 마을의 인구는 사건 당시인 1938년 23가구 111명이었으나, 2010년 조사에 의하면 13가구 37명으로 많이 줄어든 상태다.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가구들도 사건 후 마을을 떠나버렸고, 폐허인 가옥도 많다.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카이오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제 한 명도 없다고 한다(세월도 벌써 80년이나 흘렀으니...)

사건 발생 70년 만인 2008년, '주간 아사히' 5월 13일 자 기사에서 쓰야마 사건 관계자에 의한 증언이 실렸다.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90대 노인에 따르면 도이는 마을이 정전되었을 때 자주 수리를 부탁받았다고 한다. 또 사건이 발생한 그 날 중에 '쇼와 귀신곰 사건(1926년에 지바현 가토리군 구가마을 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인데...그게 12년 뒤에 호외로 나왔다?)'이라는 호외가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마을에 남아 있었다고 여겨진 '요바이( 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일본의 옛 풍습이다. 일반적으로 서일본에서 보이는 풍습)'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

이 증언은 사법성(현 법무성) 형사국의 "쓰야마 사건 보고서"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출처: 蛋蛋赞>

한편, 2008년 7월 21일 아사히TV의 '슈퍼 모닝' 의 코너인 '시공 미스터리'에서 '여덟 무덤 마을 70년째의 진실'로서 사건의 특집이 다루어졌다. 취재한 마을 사람들은 요바이의 풍습이 당시 있었다고 증언했고, 용의자도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용의자는 당시 소꿉친구와 약혼했으나 폐결핵에 걸린 도이와의 결혼을 주위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둘은 파국, 여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 용의자는 그 일로 범행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커서, 폐결핵에 걸린 자신을 흉본 마을 사람을 차례로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도이는 어릴 적 알고 지내던 여자를 일부러 찾지 않았다는 당시 소문도 있다. 

그 여자는 사건 후 카이오 마을을 떠나서 다른 마을로 이사했다. 현재(2008년) 90세가 넘은 고령에 피해자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참사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 간주되어서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역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다.


<출처: matome.naver.jp>

마지막으로 용의자인 도이의 누나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서 죽기 전까지 우동점(바로 위 사진의 건물)을 운영하다가, 1996~97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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