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월간조선>
- 노무현은 한국의 정치가이자 제16대 대통령(2003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이다. 본관은 광주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은 대통령이다.
미 군정 시기인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군(현: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아버지 노판석(1900~1976), 어머니 이순례(1904~1998)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엄마는 임신 중에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백마가 말뚝에 매여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고 한다).
6살 때 이미 천자문을 뗀 신동이었고, 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소농으로 형편이 어렵다]라고 적혀있었지만 학교에서는 줄곧 반장을 맡았으며, 중학교에서도 성적 톱을 다투는 수재였으나 집안 형편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1년 동안 휴학을 했다.
어려운 살림을 생각해서 고교진학을 포기했지만, 큰형 노영현(1933~1973)의 강한 설득과 지원으로 1963년, 명문 부산 상고(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주경야독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상고에서는 엘리트 코스인 은행원을 지망해서 농협에 취직 시험을 봤으나 떨어졌고, 졸업 후에는 삼해공업이라는 작은 어망 회사에 취업했지만 대우에 실망해서 한 달 반 만에 퇴직, 사법 시험 도전을 결의하게 된다. 이때 노무현은 자신의 저서에서 '가난에 고졸로 사회에 나온 것, 취업에 실패하고 독학으로 변호사의 길에 도전하게 된 것은 노무현 정치 역정에서 일종의 희소가치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학창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오른쪽 2번째)>
당시 고졸은 사법 시험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노무현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마을 건너 산기슭에 둘째 형과 작은 토담집을 하나 짓고는 그 집을 마옥당(磨玉堂 : 구슬을 가는 집)이라 이름을 붙이고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울산으로 넘어가서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1966년 11월 자격 시험(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과 1971년에 3급 공무원 1차 시험에 합격한다. 그 뒤 1968년부터 1971년 병역의 의무를 다한 노무현은 공부를 계속하면서 노력한 끝에 드디어, 1975년에 29세의 나이로 제17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면서 인생에 한 줄기 빛을 보게 된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마친 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취임했으나 1978년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노무현은 등기 업무·부동산 조세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했으며 취미로 요트를 즐겼을 정도로 높은 수익을 기록하는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출처: ㅍㅍㅅㅅ)>
그러나 1981년, 다른 변호사의 대리로 '부림사건(부산의 학림 사건으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의 변호를 맡아 학생 운동에 관여한 일이 전환점이 되면서 서서히 정치·사회 문제에 발을 들이는 아스팔트 변호사로 변모했다.
1982년에는 그해, 변호사가 된 문재인(현 대한민국 대통령)이 노무현의 법률 사무소에 입소했고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개설한다. 이후, 1982년 부산에서 발생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3월 18일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띠는 방화 사건)'에서는 피고 측 변호인을 담당하였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큰 걸음을 내딛게 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월 항쟁을 주도했으며 '이석규 장례투쟁(1987년 8월 대한민국 거제도에서 발생한 노동쟁의)'으로 체포와 구류도 경험했다. 노무현은 후에 회고하길, '인권변호사로의 변신은 각오나 결의를 요구받은 것은 아니다...평범한 상식과 양심, 그리고 고문으로 시커멓게 변한 학생의 발톱을 보고 분노로 이어졌다'고 한다.
<13대 국회의원 유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출처: 사람사는세상)>
1988년, 통일민주당의 '김영삼(1927~2015)'에게 발탁되면서 같은 해 4월에 열린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시 동구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는 '이해찬(1952~)', '이상수(1946~)'와 함께 노동위원회 삼총사로 불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제5공화국의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 위원으로서, 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두환과 관련인들을 거침없이 추궁하고 비판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중계된 것을 계기로 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1990년, 민주당의 김영삼과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1932~)의 여당인 민주정의당 김종필(1926~2018)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다. 노무현은 이를 야합으로 규정, 합동에 대한 참여를 일체 거부하고 다른 의원과 함께 1990년 6월에 다시 결성된 민주당에 참여하게 된다. 노무현은 김대중(1924~2009)과 함께 야권 통합 운동을 추진하고 1991년 9월, 통합 야당인 신민주연합당을 출범시켰다.
그 결과 정치적 스승이기도 했던 김영삼에게 밉보인 노무현은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 이후,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신다. 그러다가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으로 다시 당선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서울 종로구가 아닌 부산시의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새천년민주당 소속)해서 다시 낙선하지만, 이기지 못하더라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에 일부 국민의 공감을 얻었고, 2000년 인터넷상에서 정치인으로는 최초의 팬클럽인 노무현의 온라인 서포터 조직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가 결성된다.
2000년 8월, 낙선했던 노무현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된다. 이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이 지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영남지역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후발주자에서 대통령까지...(출처:sisain.co.kr)>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대통령 후보 선출은 미국의 예비 선거제와 비슷한 국민 참여 경선으로 시행됐다. 이때 입후보 등록을 한 정치인은 김중권(1935~), 노무현, 정동영(1953~), 김근태(1947~2011), 이인제(1948~), 한화갑(1938~)의 각 상임고문과 유종근(1944~) 전북 지사를 포함, 총 7명이었다.
여론조사에선 이인제 우세로 당시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던 한나라당 이회창(1935~) 대선 후보의 충청권 독점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인제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기지 못하고 진보 측 진영의 표만 떨어뜨릴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급속히 노무현 대안론이 떠올랐다.
전국에서 치러진 경선에서 노무현은 울산, 광주에서 승리하였고, 영남과 호남에서까지 승리함으로써 민주당 후보가 지역갈등을 넘어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한편 고전하던 이인제는 노무현의 사상, 재산, 남로당 당원이자 비전향 장기수였던 노무현 장인(권오석, 1918~1971)의 좌익 경력까지 전방위적으로 거론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인제 본인의 평가만 떨어질 뿐, 노무현은 승리를 거듭하며 일명 '노풍(노무현 바람)'을 일으키며 4월 2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당시 홍보 포스터(출처: neblog.com)>
그러나 김영삼과의 화해를 연출한 'YS시계 사건'은 진보 개혁의 기수로 지지를 받던 노무현의 이미지를 크게 구기게 된다. 또,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의 측근이나 친족의 체포는 여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노무현에 대한 역풍이었으며 6월 지방 선거와 8월 보궐 선거에 참패하면서 민주당 안팎에서는 대선 후보 교체와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론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모색했고, 조정결과 두 사람은 텔레비전 토론회를 실시해 여론의 지지를 더 많이 받은 후보를 대선후보로 옹립하기로 했다. 텔레비전 토론회는 11월 22일 시행되었으며, 이후 운명의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은 46.8%, 정몽준은 42.2%의 지지율로 노무현이 단일 후보로 결정됐다. 이제 대통령 선거전은 사실상 노무현과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의 1:1 승부가 펼쳐졌다.
그해 11월 13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 약 5만 5000명이 서울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미국과의 수입 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전국 농민 대회를 벌였는데 이 시위에서 노무현은 연설 도중인 오후 4시 40분경, 얼굴에 달걀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출처: SBS, 서민대통령 노무현 편히 잠드소서 中>
2002년 11월 27일~28일, 노무현, 이회창,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외 4명이 대선 후보로 정식 등록을 했고 선거戰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의 계승과 행정 수도를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정치 개혁, 7% 경제 성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반면에 비교적 친미였던 이회창은 김대중 정부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정 및 전환을 공약으로 세우며 대북, 대미 방침에 대한 차이가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투표일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하는 촌극이 일어났다. 대북 정책의 차이나 장래의 대통령을 둘러싼 노무현의 발언 등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판, 이 '배신'은 오히려 노무현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또한 노사모의 노무현에 대한 투표를 호소한 것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노무현은 약 57만 표 차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회창을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노무현은 상대적으로 높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은 국회에서 소수였고 국회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여소야대의 상태였다. 야당측에서는 선거소송, 인신공격, 대통령으로서의 적성을 거론하거나 말꼬리를 잡고는 집요하게 노무현을 공격했다. 이 와중에 집권당인 민주당에서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김대중파와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주류간의 여당 내 항쟁이 격화되었고, 당권파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에 따라 새천년민주당은 하야했다. 이렇게 의회 기반을 크게 훼손당한 노무현은 곤경에 빠졌다.
<노 전 대통령의 5년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출처: 충북일보)>
여야 모두 불법 대선자금 의혹이 불거졌다. 경제 운영도 난항을 겪었고,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견한 것은 지지자들의 이탈을 야기했으며 지지율은 급락했다. 기사회생을 위해 노무현은 국민투표에 의한 재신임을 제안했으나 각 방면에서 비판을 받고 철회했다.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를 놓고 외교통상부와 국방부의 한미동맹파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중심으로 한 자주파가 갈등을 빚었다. 2004년 1월 노무현은 외교통상부 간부의 실언과 감독 책임을 이유로 윤영관(1951~)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반기문(1944~)을 임명했다.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9일,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발의했다. 3월 12일 투표(찬성 193, 반대 2)결과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일시적으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고건(1938~)이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당리당략에서 대통령을 탄핵해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야권에 여론이 반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이어졌고 이를 두고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사실상 신임으로 간주했다(152석: 121석으로 압도적인 승리는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야당이 선방한 미완의 승리였다). 5월 14일에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소추가 기각되어서 직무에 복귀했다. 크나큰 시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정치 기반을 대폭 강화하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청와대에서 참모진들과 아침 회의 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출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은 자신의 정권을 참여정부라고 칭하며 보다 진보적이고 이념적인 개혁을 지향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적극적인 정보 공개를 할 뿐만 아니라 중대한 정책 논쟁에 맞닥뜨릴 때마다, 국민에게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인터넷을 이용한 포퓰리즘을 형성하면서 기존 보수 세력의 저항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보수 야당의 거센 반대에 늘 부닥치고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 개혁, 검찰 개혁, 사학법 개정 등 많은 개혁 입법이 좌절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 대상으로 언급한 조직에 척을 지게 된다.
개혁입법이 실패하고 적은 늘고, 경제는 물 건너간 채(임기중 경제 성장률은 평균 4.5%로 경제는 꾸준히 발전했다. 다만, 호황이었던 세계 경제와 당시 대한민국의 수준에 비교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성장률이었다) 정쟁만 한다고 판단한 민심은 정권에 칼을 들이댔고, 이후 열린우리당은 보궐선거에서 참패하게 된다.
이에 노무현은 협치를 내세워서 한나라당에 권력을 넘기는 것을 포함한 선거제도 개혁과 대연정 정권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특히 보수야당을 미워했던 여당, 특히 부산 출신인 노무현을 견제하던 일부 호남 지지층의 큰 반발을 사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반대만을 위한 반대, 정권의 흔들기는 다음 정권을 위해 이제 끝내야 한다며 지역주의 타파와 함께 대연정 제안을 고집한다.
2005년 9월 7일, 노무현과 박근혜(1952~) 한나라당 대표와의 단독 회담이 열렸다. 2시간 30분간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눴으나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으며, 대연정 구상은 어느 정치파벌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폐기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레임덕을 풍자한 만평(출처: 오마이뉴스)>
2006년 5월 31일에 있던 지방 선거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양극화 심화에 대한 비판과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에 대한 습격 사건까지 겹치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참패를 당했다. 사실상 대통령 및 정부 여당에 대한 신임 선거였기 때문에, 대통령 책임론이 불거졌지만 '한두 번의 선거 결과에 현혹되어선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해 여야 모두에 또 다른 비판이 일었다. 이 선거 결과로 이전부터 불리던 '레임덕'의 이미지가 갈수록 강해져서 지지율은 20%를 밑돌게 됐다.
2006년 8월, 노무현은 임기가 끝난 윤영철(1937~) 헌법재판소장 후임으로 전효숙(1951~)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내정했다. 그러나 임명절차에 법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국회가 동의하지 않아 헌재 소장 자리는 공석이 된다(이후 약 4달정도 주선회[1946~] 헌법재판관이 권한대행을 맡다가 2007년 1월, 이강국[1945~] 대법관이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된다)
2006년 12월, 노무현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석상에서 한국의 국방력에 대한 자신감을 밝히고 주한미군 기지 이전,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퇴역 군인에 대한 강한 비판과 우려를 표명한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다. 다만,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은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출처: 브레이크뉴스>
거듭된 보궐선거의 패배와 차기 대권을 내다본 열린우리당에서는 김근태를 중심으로 한때 같은 식구였던 민주당과의 재통합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통합신당론). 노무현은 재통합을 지역주의로의 회귀라며 비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당원들을 독려했다. 또, 차기 대선의 유력한 진보 대선 후보로 주목받았지만 정치인이 아닌 관료 출신이라 한계가 있었던 고건의 경쟁력을 약하게 보았고, 사실상 대선 불출마 쪽으로 몰아갔다(“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
열린우리당 친노 세력도 노무현의 뜻에 따라 당을 사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김근태 등이 당의 진로에 관한 결정을 전당대회를 앞두고, 외부인력의 수용을 막는다며 기간당원제 철폐를 단행하자 개정절차에 미비가 있다며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인정했다. 여기에 이르자 열린우리당 현직 의원들이 전당대회를 기다리지 않고 탈당을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현실을 깨닫고 청와대에 친노세력을 초청해서 당의 분열을 막도록 방침을 바꾸라고 촉구한 결과, 당헌 개정은 다시 의결됐지만 현직 의원의 탈당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2007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 야당이자 유지 보수인 이명박 후보에게 압도적인 패배와 함께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노무현 본인은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는 담담함과 다음 정권에 대한 배려와 함께 정권 교체를 받아들인다.
<퇴임 후 고향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출처: 인스티즈)>
KTX를 타고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가 근처에 새집을 지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 잠깐의 시간이 노 전 대통령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여유로웠던 시절이었다. 늘 노무현을 만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노무현은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하곤 하였다.
그러나 퇴임 후, 노무현 측근과 친족이 잇따라 체포됐다. 2008년 11월에 노무현 정부의 한 측근이 뇌물 공여 혐의로 체포됐다. 또, 노무현의 형인 노건평(1942~)이 증권 회사인 세종증권의 인수를 한국 농협 간부에게 요구하면서 약 20억 원 상당의 대가를 챙겼다는 의혹이 부상한다.
2004년, 박연차(1945~) 태광실업 회장에 대해선 경남 지사 보궐 선거에 출마한 열린 우리당 후보를 전면 지원하도록 요청했으며, 2005년 4.30 보궐 선거에서는 5억 원을 똑같이 나오게 했다. 2006년 1월에는 농협 세종 증권 인수에 개입하면서 30억 원 가까운 비자금을 챙긴 혐의도 있다. 이로 인해 박연차는 최종적으로 2년 6개월 실형과 벌금 291억 원을 선고받았다.
또 노무현 자신도 수사 대상으로 지목되어서, 2009년 4월 30일 대검찰청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자금 의혹에 대하여 포괄 수재 혐의로 소환 및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문재인의 긴급발표 모습>
노무현은 자신이 활동하던 홈페이지 마지막 게시글에서 '더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라는 글로 당시 상황에 대한 괴로움과 자책감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냈다.
검찰 조사 후 구속이나 불구속이냐를 놓고 검찰이 1달 가까이 허둥거리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5월 23일 새벽, 노무현은 자신의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로 불리는 바위의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심각한 외상으로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3시간 후인 양산시에 위치한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서거하였다. 당시 나이 62세였다. 당시 언론은 일반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특별 보도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등 국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외신에서도 긴급뉴스로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노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PC에서는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가 발견되었고, 그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5.23 새벽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장례행렬이 봉하마을을 떠나고 있다(출처: 미주 중앙일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신이 안치된 경남 김해시 교외의 봉하마을에는 연일 수많은 조문객이 운집하였다. 서거 당일인 5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의 조문객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고, 대형 사이트(네이버, 다음, 네이트, 야후, Google, MSN)에서는 로고를 흑백으로 대체하였으며 특설 페이지도 마련했다. 또, NC소프트는 5월 29일 10:00에서 17:00까지 모든 게임의 서비스를 일시 정지 하면서 애도를 표했다.
한편, 이명박 정부는 5월 24일에 임시 국무 회의를 가졌고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국민장 기간을 23일부터 29일인 7일로 정했다. 그리고 5월 26일 행정안전부가 영결식 날짜와 장소를 공식 발표했다.
<영결식이 엄수된 경복궁 흥례문 앞뜰(출처: 경향신문)>
영결식은 5월 29일 오전 11시경,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엄수됐다.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은 이날 오전 5시경 봉하마을에 있는 안치소를 출발해서 서울의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었다. 영결식에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김대중,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 각계 인사, 외국 사절 등 약 3,000명이 참석했다. 공동 장의위원장은 당시 총리인 한승수(1936~), 노무현 정부 시절 총리였던 한명숙(1944~)이 맡았다.
영결식을 마친 장례 행렬은 도보로 서울 광장으로 이동해서 오후 1시 30분, 발인과 함께 노제(발인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가 열렸다. 많은 시민이 추모를 위해 찾아왔는데, 경찰의 추산 약 18만 명이 모였다.
서울광장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다수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역으로 향했고 오후 6시 5분경, 시신이 수원시에 도착하면서 고인의 유언으로 화장되었다. 5월 30일 오전 1시 40분경, 유골은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왔고 봉화산 정토원 법당에 안치되었다가 49재가 끝나고, 집 뒷산에 안치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
사후, 노무현은 2017년 4월에 있던 여론 조사에서 48.7%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역대 대통령 중에서 호감도 1위로 꼽히고 있다.
2017년 5월 20~22날에 여론 조사 전문 기관인 리서치뷰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의 선호도 조사(역대 대통령 중, 가장 호감이 간 사람을 딱 한 사람만 뽑는 조사)에서 54.2%를 기록하면서 노무현을 가장 호감이 간 전직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이 절반을 넘어섰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세대별로는 20대~50대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대는 73.7%, 30대는 72.0%, 40대는 72.8%, 50대는 46.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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