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프랑스 폭동(2005 French riots)은 2005년 10월 27일,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북아프리카 출신 3명의 청년이 경찰에 쫓겨 들어온 변전소에서 감전되면서 죽거나 다친 것을 계기로, 프랑스 젊은이들이 일으킨 폭동이다. 최종적으로 프랑스 각지 도시와 교외로 확대되었다.
10월 27일, 파리 동쪽에 있는 생상드니(Seine-Saint-Denis) 끌리쉬-쑤-부와(Clichy-sous-Bois)에서 강도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이 북아프리카 출신의 청년 3명을 추적한 결과, 변전소에서 두명이 감전사하고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날 밤 수십 명의 젊은이가 소방차나 경찰에 투석하거나 차에 방화하는 등 폭동으로 확대되었으며, 경찰관이 쏜 최루탄이 모스크에 굴러 들어간 것도 사태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발단의 사건이 일어났던 끌리쉬-쑤-부와 등 프랑스어로 [Banlieue]라고 불리는 교외 지역은 빈곤층이 사는 단지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슬럼화되어 있고 실업·차별·장래에 대한 절망 등이 쌓이며 그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에서는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기동대의 도입 등 강경한 치안 대책이 취해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해당 지역 청년들과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었다.
당시 청년층(18~24세) 실업률은 23.1%, 이민 인구는 431만 명(1999년 조사)으로 이민자가 많은 지구에서는 실업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40%에 이르는 심각한 상태였다.
<사건 일지>
- 10월 27일: 18시경, 청년 두 명이 감전사. 22시경 [경찰이 몰아넣었다]로 방화 등의 폭동이 시작된다.
- 10월 30일: 생상드니의 폭동 진압으로 경찰이 모스크에 최루탄을 던지다.
- 10월 31일: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 1955~) 당시 내무장관은 [무관용 정책]을 표명.
- 11월 1일: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 1953~) 당시 총리는 감전사건 유족을 총리실에 초대, 사건 조사를 약속.
- 11월 3일~4일: 파리 교외에서 르노 자동차 판매점이나 버스 차고가 불태워지다.
- 11월 5일: 파리 교외에 경관 2,300명을 배치하고 폭력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차량 등이 불태워졌다. 파출소나 소방서 등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시설뿐만 아니라, 학교나 어린이집·편의점 등 닥치는 대로 방화가 확대되고 있었다.
- 11월 5일 밤: 파리 시내로 파급,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 등에서 방화.
- 11월 6일: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Jacques René Chirac, 1932~2019)은 긴급 회의를 개최하고 단속 강화·철저를 발표. 4일 전에 폭도에게 습격당해 혼수 상태였던 남성이 숨짐. 이슬람교단연맹(UOIF)은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령(파트와)을 발표했다.
- 11월 6일 밤: 전국에서 새로 1,408대의 차가 방화된다. 밤에는 395명이 구속되고 폭도와의 충돌로 경찰관 34명이 부상했다.
- 11월 7일: 총리, 야간 외출 금지령의 권한을 수장(首長)에 주는 것을 표명. 르 항씨(Le Raincy)에서 18세 미만 야간 외출 금지령이 발령.
- 11월 7일 밤: 전국에서 1,073대의 차가 태워졌다. 330명이 체포.
- 11월 8일: 정부는 위기 관리를 위한 임시 국무 회의를 열고 12일 비상 사태 선언을 선언, 해당 지역에는 야간 외출금지의 권한을 부여. 그러나 그 효과에 대해 각계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사태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는 질서 회복의 당부를 확인했다.
<당시 변전소에서 감전사한 청년들의 추모비>
- 11월 8일 밤~9일: 617대의 차가 불타고 전국에서 새로 280명이 체포됐다. 비상 사태 선언은 북부 솜(Somme)주, 중부 루아레(Loiret)주, 파리 근교의 에손(Essonne)주 등에서 야간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 11월 9일 밤~10일: 14일 연속으로 방화가 있었다. 방화된 차량은 481대, 구속된 사람은 203명. 프랑스 남동부 알프마리팀(Alpes-Maritimes), 북부 솜, 센마리팀, 외르(Eure), 중북부 루아레주의 5곳에 야간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폭동이 시작된 생상드니에서는 폭동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발령은 보류되었다.
- 11월 10일 밤~11일: 15일 연속으로 전국에서 차량 463대가 방화 되었고 201명이 구속됐다. 지난밤보다 조금 감소했다. 인터넷상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11월 11일 밤~12일: 16일 연속으로 차 380대가 불타고 162명이 구속됐다. 12~13일 파리에서 집회를 금지, 3,000명의 경찰력이 경계.
- 11월 12일: 프랑스 제3의 대도시, 리옹(Lyon)시의 중심부에서 청년 단체와 경관대의 충돌이 발생했다. 남서부 툴루즈(Toulouse ) 시에서도 차가 불에 탔다. 2개 지역에서 새롭게 야간 외출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7개 지역으로 늘어났다. 한편, 몇몇 지역에는 평온을 호소하는 주민이나 여러 단체의 시위가 이루어졌다. 파리 시내에서는 구속된 이민자의 국외 추방 방침을 비판하는 인권단체 주최의 집회가 열렸다.
- 11월 12일 밤~13일: 17일 연속으로 전국에 차 315대가 불타고 161명이 구속됐다.
- 11월 13일 밤~14일: 18일 연속으로 전국에서 불태워진 차는 280대, 115명이 구속됐다. 한때 300곳 이상 지역으로 확산하던 폭동은 20~30곳으로 줄어들면서, 서서히 수습되어간다.
- 11월 14일: 정부는 긴급 각료 회의에서 비상사태 법의 적용을 3개월 연장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폭동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시라크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TV에서 새로운 제도를 창설하는 것과 고용에서의 차별을 없앤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다.
- 11월 14일 밤~15일: 19일 연속으로, 적어도 250대의 차가 방화되었고 71명이 구속됐다.
- 11월 15일: 프랑스 국민 회의(하원)는 비상사태 법의 적용 기간을 3개월 연장하는 정부 제안을 여당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프랑스 사회당 등 야당은 비판적이었다.
- 11월 16일 밤~17일: 20일 연속, 불탄 차는 98대. 평상시 평균에 거의 일치하는 수라고 한다.
- 11월 17일: 프랑스 국가 경찰 총국은 평상시로 되돌아왔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1960년대부터, 고도 경제 성장을 떠받치는 노동력으로서 100만 명이 넘는 이민자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도시 외곽에 머무르면서 저소득층이 사는 임대 연립 주택(HLM)등에 살았다.
그들의 2세와 3세인 청년들이 이 폭동에 다수 참여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적법은 출생지주의로 되어있으며, 이민자의 자손은 프랑스 국적을 가진다. 그러나 빈곤, 고등교육의 기회, 취직 차별 등을 둘러싸고 불만이 쌓여있었다.
현재까지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프랑스의 뇌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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