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나다 침공(Invasion of Grenada)은 1983년 카리브 해의 섬나라 그레나다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군·동카리브 국가 기구(Organisation of Eastern Caribbean States, OECS)·바베이도스·자메이카군이 침공한 사건이다.
<그레나다 행정지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그레나다는 1974년 독립했다. 당시 총리였던 에릭 게리(Eric Gairy 1922~1997)와 그 일가는 조직화한 갱에 의해서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대응과 외국자본을 유착, 독재를 강화하였고 실업과 빈곤이 확산하면서 그레나다의 현실은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복지·교육·자유의 공동 노력을 내건 [뉴 주얼 운동, New Jewel Movement]을 중심으로 발생한 쿠데타가 1979년에 발생하자 게리 정부는 자신의 군·비밀경찰과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 새롭게 모리스 비숍(Maurice Rupert Bishop 1944~1983)이 총리로 취임하여 인민혁명 정부(People's Revolutionary Government, 이하 PRG)를 수립했다. PRG는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한편, 상공 회의소 등 국내 폭넓은 지지를 받은 의료, 교육이나 관광 사업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주변 지역인 서인도 연방(West Indies Federation, WIAS)은 혁명을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PRG를 불승인하는 결의를 했지만, 정작 불승인을 한 것은 독립 국가인 도미니카와 세인트루시아뿐이었다.
1980년에는 PRG가 포브스 번햄(Forbes Burnham, 1923~1985)정권을 비판하면서 가이아나와 관계가 악화하였고, 자메이카에서도 좌파 정권이 무너지면서 점차 그레나다는 고립해간다. 그 와중에도 그레나다는 공산권과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유엔의 비난 결의에 쿠바와 함께 반대하였고, 정권 성립 직후부터 쿠바 등의 군사 원조를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左)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겸 서기장과 그레나다 총리 포브스 번햄(右)의 모습>
한편, 미국 대통령에 당선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은 공산주의와 대결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분명히 했고, 1980년 11월 [카리브 해 이니셔티브, Caribbean Basin Initiative]를 발표하면서 카리브 개발 은행(Caribbean Development Bank, CDB)에 원조를 하지만, 은행은 그레나다에 원조해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조치는 카리브 공동체 국가의 반발을 낳았고 오히려 WIAS를 제외한 카리브 해 국가를 그레나다와 공존하며 결속시키게 만들어서, 1981년 WIAS가 동카리브 국가 기구(이하 OECS)로 발전하자 그레나다도 그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주변국의 PRG정권에 대한 불신이 불식된 것이 아니었기에 1982년 12월, 동카리브 안보 기구(Regional Security System, RSS)이 성립된다. 이것은 OECS에서 그레나다와 세인트키츠 네비스, 영국령 몬트세랫을 제외하고 바베이도스를 더한 지역 안전 보장 시스템으로 그레나다의 PRG정권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레나다는 소비에트 연방과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군사 협정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동카리브권 내의 군사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1983년 3월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의 군사 기지화를 분명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3월 23일에는 그레나다에 거대한 공항이 건설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소련의 군사 기지가 될것이라고 호소했다. 또, 이 시기에는 OECS와 미국 군함이 바베이도스의 군항에서 출항하면서 그레나다 해역에 접근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보여주기식의 경고가 아니었고,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그레나다 침공을 상정한 군사훈련을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에서 실시하는 등 그레나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나갔다.
<그레나다 침공 당시 미군>
1983년 10월 13일, 비숍 총리는 급진적인 레닌주의자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 1945~) 부총리와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 1938~)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된다.
소식을 접한 미국은 다음날 15일, 비숍 구출을 바베이도스 정부에 의뢰하였으나, 19일 비숍파의 국민이 봉기하면서 군과 전투가 발생하면서 그 와중에 달아나던 비숍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코드 부총리와 오스틴의 혁명군사평의회정부(RMC)가 성립되면서 그레나다 총독은 투옥되고, 계엄령이 내려지는 등 그레나다의 사태는 긴박해졌다.
20일, 미국 정부 내의 각료 그룹은 그레나다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레이건도 침공을 승인했다. 미국이 침공의 이유로 표명한 것은 쿠바 및 소련이 그레나다에 개입하는 것과 그레나다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 그레나다에 있는 미국인 학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21일, 바베이도스에서 그레나다를 제외한 OECS 국가들과 바베이도스의 긴급 회동이 열리면서 자메이카와 미국을 초청하였고 그레나다를 침공하는 결의를 채택한다. 이 회의에서 [OECS 조약 8조에 근거한 적절한 조치]에 의거, 그레나다 총독 아래에서 민주적인 선거 개최를 요구한다는 것이었으나 OECS 조약의 군사적 조치는 외부의 침공을 근거로 하였기에 이 부분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한편, 그레나다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24일부터 상가와 학교가 재개되었다.
반면 22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카리브 공동체의 긴급 회동도 그레나다 총독 밑에서 민주적인 총선과 RMC 정권을 비난하는 것은 일치하고 있었지만, 카리브국에 의한 평화 유지군 파견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군대 파견을 주장하는 OECS 국가들에 대해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벨리즈, 바하마가 강하게 반대하면서 회의는 결렬되었다.
(어차피 미국 주도였고, 미군 주력의 침공이므로 약소국인 카리브 지역이 반대·결렬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휴식중인 미군>
10월 25일 새벽 5시에 시작된 그레나다 침공은 선전 포고 없이 이루어졌으며, 월남전 이후 미군의 첫 대규모 군사 행동이었다. 미국에 의해 이 작전은 [ 1Urgent Fury, 억누를 수 없는 분노]라고 명명되었다.
공격군의 총계는 미군 7,300명, OECS에서 353명이 투입되었으며, 미국은 레인저·네이비 실·델타 포스 등의 특수 부대와 해병대 등이 참전하였다.
그레나다 측은 그레나다 병사 약 1,500명 및 쿠바인 약 722명과 소련, 북한, 리비아, 동독, 불가리아에서 온 60명 정도의 2고문이 있었다.
미군은 그레나다 총독구출과 통신기지 파괴를 시행, 육군 레인저부대와 해병대 등이 쿠바인이 건설 중인 국제공항 점거 및 미국인 의대생들의 구출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레나다 각지에서 전투가 발생했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실력의 미군은 정부 관련 시설, 공항, 대학 등의 거점을 차례로 제압했다.
전투는 며칠 동안 이어졌으며 미군은 19명이 사망, 116명이 부상했고 그레나다 측은 병사 45명에 민간인은 적어도 24명이 숨졌고 병사 358명이 부상했다. 또, 쿠바인은 24명이 숨지고 59명이 다치며 638명이 포로가 되었다. 3
<포로들을 감시 중인 미군 병사>
UN은 침공 개시 직후인 10월 25일부터 10월 28일까지 긴급 안전 보장 이사회가 개최되어 가이아나, 니카라과 공동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미국의 거부권 발동으로 이 법안은 부결되었고 11월 2일 유엔 총회 심의에 부쳐진 뒤 찬성 108, 반대 9, 기권 27로 가이아나, 니카라과 공동 결의안에 벨기에의 수정안이 부가된 방안이 통과되었다.
이 유엔 수정안은 군사 간섭 국제법 위반 우려, 그레나다의 주권 보전, 외국군의 즉시 철수 등이 담긴 안이었으나 미군과 동카리브는 결의에 응하지 않고 평화 유지군으로 개명하면서 침공 후 치안 유지를 통해 결과적으로 유엔 결의는 흐지부지된다.
침공 이튿날인 10월 26일, 이사회 특별 회의가 개최되어 31개 회원국 중 쿠바와 수리남이 결석, 15개국이 침공을 비난, 11개국이 침공을 지지한다는 결과로 표결이 이뤄지지 않은 채 회의는 끝났다.
침공 1개월 반 정도 지난 12월 15일, 미군은 표면상 철수했으나 미군과 OECS에 의한 카리브 평화군(Caribbean Peace Force)이 창설되었고, 그레나다의 치안 유지를 맡게 됐다. 1984년 3월에는 그레나다와 세인트키츠 네비스가 카리브 평화군에 참여하였고 12월에는 평화군 감시 아래 선거를 치르면서 허버트 브레이즈(Herbert Blaize, 1918~1989)가 이끄는 새로운 국민당 정권이 수립된다.
이 승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쓰라린 경험을 한 미국에 오랜만의 완전 승리를 안겨준 침공이었다. 이에 대한 자신감인지, 1984년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방문하면서 1만 명의 청중을 모으기도 한다. 그러나 미군 지휘 계통의 문제가 드러났다는 이유로 [골드 워터=니콜스 법(Goldwater-Nichols Department of Defense Reorganization Act of 1986), (PL 99-433)] 의 성립으로 미군의 지휘 계통을 새롭게 정비한다.
침공에 참가한 OECS 국가들과 다른 카리브 해 국가들과의 대립은 격화됐고, 카리브 공동체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지면서 1984년 5월 카리브 해역 내 무역은 전년도와 비교하면 13% 감소하였다. 그러나 그레나다 재건을 하면서 관계는 개선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이를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동구권이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고, 실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서방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면서 보이콧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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