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0월 28일> 1993년 10월 28일 - 일본, <도하의 비극 (ドーハの悲劇)>

!@#^& 2019. 10. 27. 21:35

<94년 월드컵 진출이 눈앞에서 좌절되자, 망연자실해 버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모습>


- 도하의 비극(ドーハの悲劇)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수도 도하(Doha)하마드 빈 칼리파 스타디움(Hamad bin Khalifa Stadium)에서 열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라크 대표팀의 경기에서 일어난 사건일본 측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반대로 대한민국으로서는 탈락거의 확정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그야말로 기적 같은 사건이었기에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라운드에서 경기 종료 직전 추가시간 때, 이라크 대표팀의 동점 골이 들어가면서 FIFA 월드컵 첫 출전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던 일본 대표팀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예선 탈락한 결말이었다.


<해당 경기가 열렸던 카타르 도하의 하마드 빈 칼리파 스타디움, 또는 알 알리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은 도하에서 모든 팀전 경기를 치렀는데, 1차 예선 A~F조에서 1위로 통과한 6개국이 서로 한 번씩 맞붙어서 그중 성적이 가장 좋은 상위 2팀월드컵 출전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당시 아시아에 주어진 월드컵 진출권단 2장이었으며, 대륙 간 플레이오프는 없었다[각주:1][각주:2].

당시 일본은 1차 예선 F조에서 7승 1무로, UAE를 제치고 최종 예선진출했다. 반면 이라크는 1차 예선 A조에서 6승 1무 1패승점 13점[각주:3]으로 중국1점차아슬아슬하게 제치고 진출했으며, 일본의 최대 라이벌대한민국은 예선 D조에서 7승 1무로, 2위인 바레인을 제치고 승점 15점으로 여유롭게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일본은 최종예선 첫 경기사우디아라비아전0-0으로 비겼으나 2경기이란전에서 1-2에서 지는 바람에 6개국 중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주전들의 교체를 감행한 3경기 북한전3-0으로 이기면서 반등성공하였고, 뒤이어 4경기에서는 그동안 월드컵 및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대한민국에 미우라 가즈요시(三浦知良, 1967~)결승골1-0 승리를 거두면서 한국을 제치고 선두에 섰다. 

이라크는 첫 북한전에서 2점을 먼저 냈지만, 선수 한 명퇴장되면서 내리 3골을 먹혀 2-3으로 역전패. 열 받은 이라크 축구 협회감독경질하고 1980년대 2번이나 올림픽팀을 이끈 바바 다우드(Emmanuel Baba Dawud, 1934~2009)가 감독에 취임했다. 그리고 맞이한 2경기인 한국전은 2-2로 비겼고 3경기 이란전은 2-1로 이라크의 첫 승리, 4경기인 사우디아라비아전은 1-1로 비겼다.

대한민국은 1경기인 이란전을 0-3으로 가볍게 제압하였으나, 그 뒤 이라크전에서 비기고 지금까지 예선전에서 늘 이겨오던 일본에 일격의 한 방을 맞아 1점 차 패배를 당하였고 그다음 사우디전까지 1-1로 비기면서 마지막 남은 북한전에서 대승일본-이라크 경기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골치아픈 상황이 되었다.



당시 일본마지막 경기에서 1점차 승리만 거두면 월드컵 진출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사우디대한민국 둘중에 한팀패배한다면 어느정도 점수차로 져도, 진출할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마지막 상대북한은 당시 승점 자판기 수준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팀에게 골고루 털렸기 때문에 한국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고, 이란도 지금처럼 전력이 세지 않았기에 사우디가 질 거라는 생각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일본입장에서는 속 편하게 승리를 거두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마침 상대 팀인 이라크득점7득점으로 각 팀 중에서 가장 득점력이 높았으나, 실점 7실점으로 북한 다음으로 높은 상태였으며 일본은 유일하게 진 이란전만 빼면 실점이 없었기에 자신감이 한층 더 높았다.

반대로 대한민국은 일단 마지막 경기는 골득실에서 유리하도록 무조건 다득점으로 승리를 거두고, 일본이나 사우디 두 팀 중 하나가 지거나 비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최종전>

4경기까지 전 경기할리파 국제경기장(Khalifa International Stadium)에서 진행됐으나 최종전3경기 동시 진행을 위해서 일본-이라크전알 알리 경기장에서 개최됐다. 

양국과거 상대 전적은 일본의 1무 3패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각주:4] 이후 9년 반 만에 다시 맞붙는 대결이었다. 일본은 북한과 대한민국전에서 성공한 4-3-3전술을 사용하였는데, 미우라 가즈요시, 나카야마 마사시(中山 雅史, 1967~)·하세가와 겐타(長谷川健太, 1965~)의 변칙 쓰리톱과 중반의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는 모리야스 하지메(森保一, 1968~)[각주:5]가 들어갔다. 

경기는 시작 5분 만에 나카야마의 포스트 플레이에서 하세가와가 을 날렸고, 크로스바를 치고 튕긴 것을 미우라 가즈요시가 헤딩으로 연결하면서 일본이 일찌감치 앞선다. 그 후는 이라크가 동점 골을 노리면서 일본의 수비로부터 역습이 전개되는 형태로 전반전1-0으로 끝났다. 한편 동시에 치러진 다른 팀의 경기는 [사우디아라비아 2-1 이란], [한국 0-0 북한]스코어로 이대로 끝난다면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후반전으로 접어들자, 이라크의 측면 공격활발해지면서 54분 셰냐이셸동점골을 만든다. 그러자 일본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중반부터 체력이 떨어지면서 세컨드 볼 회수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후 이라크가 더욱 볼 점유율을 높이고 공세강화하였고 다른 경기에서 사우디와 대한민국이 득점본격적으로 하면서, 일본은 이 경기를 잡지 못하면 예선 탈락비극을 맞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라크는 몇 번인가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으나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했고, 64분에는 일본의 수비골키퍼까지 드리블로 제친 슛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으며 오히려 일본이 69분 라모스 루이(ラモス瑠偉 1957~)스루패스오프사이드에서 간신히 벗어난 나카야마가 받아서 골로 결정지으면서 2-1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 이라크의 체력도 떨어짐으로써 교착상태인 채 일본의 승리가 다가온다. 그리고 89분 50초, 라모스의 패스차단한 이라크는 자신의 진영으로부터 역습을 하고 일본의 왼쪽(백 스탠드 쪽)에서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이 킥 전에 90분이 지나면서 추가 시간에 돌입, 여기서 이라크는 문전에 직접 센터링을 하지 않고 재빨리 짧게 코너킥을 개시. 순간 의표를 찔린 일본은 대응에 나섰으나 이라크에 밀려 센터링을 허용한다. 이를 니어 포스트 측에 있던 움란헤딩슛을 날렸고 공은 골키퍼 마쓰나가 시게타쓰(松永成立, 1962~)머리 위포물선으로 그리며 그대로 골이 되었고 동점(90분 17초)

이라크의 동점 골이 확정되자 일본 선수 대부분충격놀라움, 좌절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뒤, 일본은 경기가 재개되자 전선으로 롱 패스를 시도하였으나 공이 그대로 터치 라인을 지날 때 주심세르주 무헌터헬러휘슬이 울리면서 경기는 2-2 무승부종료일본 대표 선수 대부분은 그라운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선수와 스태프가 말을 걸어서야 비틀비틀 일어섰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통곡하거나, 감독과 코치에게 의지하며 겨우 운동장을 떠났다. 

이때 사이드백이었던 가쓰야 도시노부(勝矢寿延, 1961~)는 지금까지 일본이 참패해서 월드컵 예선탈락했던 이미지만 있었기 때문에, 무승부라는 결과로 예선 탈락이라는 상황에 다른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의아해하였다고 한다[각주:6].

일본-이라크전보다 몇 분 일찍 마치게 된 다른 장소의 결과는 [사우디아라비아 4-3 이란] [한국 3-0 북한]의 스코어였기 때문에 최종 순위는 아래 그림과 같다. 



사우디아라비아한국본선 진출권획득. 골득실에서 한국에 미치지 못하고 3위로 떨어진 일본은 바로 손안까지 들어왔던 출전권을 그대로 한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때, 일본의 리드를 미리 들었던 한국 선수들은 승리 후에도 탈락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일본 동점, 경기 종료]라는 결과를 알게 되자 모두 얼싸안고 환희에 휩싸였다.


<도하의 비극 당시 일본-이라크 경기, 후반 41분부터 끝까지 나옴. 

경기 후 말을 잇지 못하는 패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테레비 도쿄(テレビ東京)NHK BS1텔레비전 중계를, 닛폰 방송(ニッポン放送)라디오 중계했다.

테레비 도쿄의 방송에서는 현지 실황쿠보타 미츠히코(久保田光彦: 1956~) 아나운서, 해설을 마에다 히데키(前田秀樹 1954~)가 맡았고 도쿄의 스튜디오에서는 가네코 가쓰히코(金子勝彦, 1934~)가 사회를 보았으며, 게스트로 가마모토 쿠니시게(釜本邦茂, 1944~) 당시 감바 오사카 감독, 모리 다카지(森孝慈, 1943~2011)[각주:7][각주:8] 당시 우라와 레즈 감독, 당시 일본 대표팀 주장인 하시라타니 데쓰지(柱谷哲二, 1964~)의 친형인 하시라타니 고이치(柱谷幸一, 1961~) 당시 우라와 레즈 선수가 나왔다[각주:9].

후반 추가시간 통한동점골이 나오자 구보타 아나운서는 [결정 났다!]라고 외친 후 해설과 함께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일본 쪽 제작진방송 사고인가 싶어서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침묵이 30초 가까이 이어진 이후에야 아나운서가 [어쩔 수 없겠네요]라고 겨우 말을 이어갔다. 

시합이 끝난 후, 스튜디오로 화면이 넘어와도 모든 출연진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특히 하시라타니는 방송 중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감싸 안고 울고 있었다. 모리 감독은 통한의 동점골에 대해 [이게 축구예요]라고 말했고, 가네코는 [축구 세계에서는 천국지옥을 봐야 진정한 서포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였으며 게스트중 가장 아쉬워한 하시라타니는 쥐어짜듯이 [1개월, 힘들었겠지만 가슴을 펴고 돌아오라]라고 동생 데쓰지등 일본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해당 프로그램 시청률은 일본 시각으로 심야 대에도 불구하고, 방송 사상 최고48.1%를 기록했다.


<경기가 끝난 뒤, BS1 실황>


NHK BS1 방송은 실황을 야마모토 히로시(山本浩 1953~) 아나운서, 해설을 다나카 고지(田中 孝司, 1955~)가 맡았으며 스튜디오에서는 도모다 미유키(友田幸岐, 1965~)가 사회를 보았고, 해설은 오카다 다케시(岡田武史,  1956~)다시마 고조(田嶋幸三, 1957~)가 맡았다. 

경기 종료 후 오카다는 말을 잇지 못했고, 도모다는 [축구무서움이 나왔습니다]라고 코멘트한다. 이때 해설로 나온 오카다4년 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 중에 갑작스럽게 일본 대표팀 감독을 이어받았으나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출전을 이루는 업적을 만들어내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지휘봉을 잡아 일본의 원정 첫 16강 진출을 이루어낸다.

닛폰 방송의 라디오 중계는 실황으로 모로오카 마사오(師岡正雄, 1960~) 아나운서, 해설은 고타니 다이스케(小谷泰介, 1955~)가 맡았는데 이라크의 동점골 직후, 고타니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반응, 한 마디로 '좌절' 그자체>


<이모저모>

- 추가시간에 돌입할 무렵, 당시 일본축구협회 가와부치 사부로(川淵三郎, 1936~) 강화 위원장은 [이렇게 모든 게 잘 풀려도 괜찮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이라크의 동점골이 나오자 [아, 역시... 신은 '그렇게 놔둘 수 없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라고 회고한다.

- 또, 가와부치는 이 경기가 텔레비전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축구의 재미를 강렬하게 부각하게 되어 올림픽을 뛰어넘는 최대의 스포츠 행사인 FIFA 월드컵의 인기를 일본에 결정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 당시 일본 축구 관계자는 FIFA 관계자의 독일인으로부터 [이것이 축구다]라는 말을 들으며 [그런 경험을 일본 축구계는 앞으로 100년 동안 수십 번 더 경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알아가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 가와부치는 일본으로의 귀국행 비행기에 타기 전, [내일부터 우리에게 강한 비난의 목소리가 날아오겠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선수들을 태운 전세기가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팬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 많은 언론이나 팬들은 월드컵 출전을 바로 코앞에서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월드컵 출전을 놓쳐버린 선수들 당사자에게는 복잡한 심경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마쓰나가는 [일본은 축구 선진국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 이런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나 브라질, 스페인이면 이렇게 환영을 받지 않겠지, 앞으로 대표를 짊어지고 싸울 선수들에게 야유할 때야말로 진짜 일본 축구의 시작이겠구나]라고 느꼈다고 회고하였다. 또, 실제로 현장에서 취재한 베테랑 기자 중에는 이러한 국내의 반응을 씁쓸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 경기 종료 몇 시간 후에 발행된 요미우리 신문 10월 29일 자 조간에서는 이미 [도하의 비극]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현지에서 취재한 요미우리 신문 기자는 1986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우승 후보였던 스페인 FC바르셀로나가 루마니아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에 승부차기에서 패했던 [세비야의 비극]을 떠올리며 기사를 썼다고 한다. 그 날 이후,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도하의 비극]이라는 문구가 일본에서 널리 쓰이게 된다.


<도하의 기적으로 극적으로 월드컵에 진출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귀국현장>


- 한국 선수들은 본선 진출 결정에 크게 기뻐하며, 경기 후 호텔에서 축하 파티를 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가서 TV를 켜자 일본 선수와 서포터가 우는 영상을 보면서 모두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아쉬워하고 분해할 줄 몰랐다는 것. 

- 또한, 일본과 한국은 도하의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으며 당시 산프레체 히로시마 소속이었던 노정윤(1971~)의 호의로 일본 선수들이 불고기와 김치를 받기도 했다.

- 대한민국은 극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했기 때문에, 국내에선 [도하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대한축구협회는 동점골을 넣은 움란을 한국으로 초청해 국빈급 대우로 대접했고, 한국 TV 프로그램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협회 국제부 방에는 움란의 사인 볼이 장식되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 기적이 있다면 비극도 있다. 2006년 아시안 게임 카타르 대회 야구 경기에서 대회 3연패를 노린 한국 대표가 대만과 일본 대표에게 연패한 충격을 한국에선 [도하 참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던 2016 AFC U-23 챔피언십 카타르 결승전에서 맞붙은 한국과 일본이 두 골을 넣은 한국팀이 내리 3골을 일본에 내주며 3-2로 역전패한 경기를 한국에서는 축구판 [도하 참사]라고 부른다[각주:10].

- 일본 후지 텔레비전도 움란과 이라크 대표 선수 몇 명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뉴스 프로그램에서 도하의 비극의 소감을 묻거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과의 리벤지 매치를 시키기도 했다.

- 이후, 진출한 아시아 두 국가는 이듬해 월드컵에서 선전하면서 90년 대회 당시 전패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아시아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세웠다. 특히 사우디는 16강까지 진출하였고, 한국도 비록 16강은 아슬아슬하게 진출하진 못했으나 스페인에 2-2, 볼리비아에 0-0, 독일에 내리 3골을 먹히고도 2골을 따라잡는 선전을 보이면서 2무 1패로 선전하였다.




  1. 현재는 4.5장이다. [본문으로]
  2. 2026년 월드컵부터 참가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아시아 지역은 8장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본문으로]
  3.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은 2점이었다. 무승부는 현재랑 동일하게 1점. [본문으로]
  4. 1984년 4월 21일, 일본 1-2 이라크로 이라크의 승리. [본문으로]
  5. 현재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본문으로]
  6. 비겨서 탈락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좌절하는가?라는 의미. [본문으로]
  7. 참고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한국과의 일전을 치른 바 있다. [본문으로]
  8. 물론 한국의 승리로 일본은 탈락하였고, 한국은 32년 만에 월드컵에 다시 진출하였다. [본문으로]
  9. 바로 위 동영상이 테레비 도쿄에서 방영한 경기 실황으로, 경기가 끝난 뒤 스튜디오에 나오는 게스트가 해당 인물들이다. [본문으로]
  10. 올림픽은 두 팀 나란히 진출, 일본은 조별리그 탈락, 한국은 8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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