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미이케 탄광의 모습. 당시 폭발로 땅이 울리는 소리와 진동이 몇km 떨어진 곳까지 닿았다고 한다.
촬영자는 당시 오무타시에 거주하던 마을 주민이 찍었다(현재는 고인)>
- 미쓰이 미이케 탄광 폭발 사건(三井三池三川炭鉱炭塵爆発)은 1963년 11월 9일,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미카와정(三川町) 미쓰이 미이케(三井三池) 탄광 미카와 수갱에서 발생한, [탄진]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석탄가루에 의한 분진 폭발 사고다.
사망자 458명,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 839명이 발생한 이 사고는, 전후(戦後) 일본 최악의 탄광 사고, 산재 사고다.
<평소, 해당 탄광으로 출근하는 광부들의 모습>
1963년 11월 9일 오후 3시 12분, 미쓰이 광산 미이케 광업소 미카와 제1사갱의 갱구에서 약 1600m 부근의 사갱으로 탄진 폭발이 일어났다. 갱내에서 캐낸 석탄을 가득 실은 광차의 연결이 어긋나면서 스파크를 발생하였고 탈선, 폭주하면서 이로 인해 대량의 탄진이 갱내에 퍼져 인화·폭발한 것이 원인이다.
당시 갱내는 약 1,40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상기한 대로 사망자 458명에 구출된 940명 중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가 839명이 발생한다. 이 탄진이 폭발함에 따라 일산화탄소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사망자 중 20명만 폭사, 나머지는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희생자였다.
오후 3시 40분, 미쓰이 광산이 사고를 인식했으나 구조는 지체되었고 폭발 참사 이후 23명의 미카와 광산 구조대가 가장 빠른 오후 5시 28분에 도착했으나 이미 사고 발생 2시간 이상 지난 뒤였고, 가장 늦게 도착한 구조대는 7시간이나 지난 다음에야 도착하였다. 사고 시 미카와 갱내의 일산화탄소 농도는 6%의 고농도로, 내부를 5~6시간 머물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연히 지연될수록 피해자는 늘어났다.
탄광에는 탄진폭발 사고의 가능성이 항상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탄진폭발 사고가 일어날 리가 없다], [실제로 몇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미신과도 같은 [안전신화]의 믿음이 있었다. 덧붙여, 사고 전에 미이케 쟁의(三井三池争議)라고 하는 노동쟁의가 일어나면서 미쓰이 광산과 노조 간에 차질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안전 대책은 뒤로 밀려났다.
이러한 것들이 사고 자체와 초동구조 지연의 원인이 되면서, 사망자와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를 늘리는 요인이 되었다.
<사고 현장의 지도>
당시 규슈 공업대 교수였던 아라키 시노부는 사고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추측, 결론짓고 있다.
탄진폭발의 방지책으로서 탄진 제거와 주기적으로 물 뿌리기, 돌가루 살포에 소홀함에 따라 갱내에 탄진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용 삭감으로 인해 광차의 부품교환을 게을리하고 있어 부품은 점점 녹슬었고, 광차의 연결고리가 망가지면서 탈선되어 마찰열 혹은 마찰 불꽃이 갱도 내 탄진에 착화했다.
한편, 미쓰이 미이케 탄광 측이 고용한 학자에 의하면 사고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추측·결론지어져 있다.
양탄(揚炭) 벨트 위의 채굴된 석탄에 부착되어 있던 탄진으로 불꽃이 튀었다. 이것은 불가항력에 의한 사고이다.
후쿠오카현 경찰과 지방 검찰청은 아라키 시노부의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미쓰이 미이케 탄광 간부를 기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소에 적극적인 후쿠오카 지검 검사 다수가 갑자기 전근을 가게 되면서, 새롭게 구성된 검사 그룹은 사고 원인의 과학적인 입증은 할 수 없다면서 미쓰이 미이케 탄광 간부에 대해서는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한편, 피해자나 그 가족·유족과의 사이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의 후유증 환자에 대한 보상 문제로 기나긴 재판을 벌였으며 20년이 훌쩍 지난 1987년 7월 20일 화해파 원고단(454명)은 후쿠오카 지방 법원이 제시한 화해 안(합의금 총액 약 9.1억엔)을 받아들이면서 화해가 성립했다.
그러나 화해에 참가하지 않은 32명의 새 원고단 및 해당 소송보다 먼저 제소했던 4가족의 소송은 계속되었다.
1993년 3월 26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은 [갱도 속에 다량의 탄진이 퇴적하지 않도록 관리할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었다]며, 회사의 과실 책임을 인정하는 손해 배상을 명령하였고 1998년 대법원에서 이 판결은 확정된다.
<합동 영결식 모습>
이 탄진폭발 사고로 미쓰이 미이케 탄광의 경영은 악화하면서 폐광을 앞당기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후유증 환자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위에서는 [가스환(ガス患)]으로 불리며 차별까지 받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고 후 50년을 경과한 시점에서 80명 이상의 환자가 투병 중이며, 오무타시 쇼와정(昭和町)의 엔메이(延命) 공원 한 쪽에 [미카와 광산 대재해 순직자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다.
참고로 해당 갱은 태평양 전쟁을 위해 석탄 증산이 요구되는 가운데, 1937년부터 건설이 개시되어 194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전후 부흥기 미쓰이 광산의 주력 수갱으로 1949년에는 쇼와 일왕이 시찰하러 올 정도였다.
1997년 3월, 미쓰이 미이케 탄광 폐광 후 그 시설 중 몇몇은 중요 문화재·사적·근대화 산업 유산 등 문화재로 등록되었으나 사고가 발생한 미카와 수갱은 그 대상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오늘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 <11월 11일> 2000년 11월 11일 - 오스트리아, <카프룬 대참사> (0) | 2019.11.10 |
---|---|
오늘의 역사 : <11월 10일> 1697년 11월 10일 -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 태어나다> (0) | 2019.11.10 |
오늘의 역사 : <11월 8일> 1957년 11월 8일 - <팬 아메리칸 항공 007편 실종 사고> (0) | 2019.11.08 |
오늘의 역사 : <11월 7일> 1940년 11월 7일 - 미국, <타코마 다리 붕괴하다> (0) | 2019.11.06 |
오늘의 역사 : <11월 6일> 1985년 11월 6일 - <콜롬비아 대법원 점거 사건> (0) | 2019.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