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립해병대에게 항복한 아르헨티나 해군 코만도의 모습 (레딧)>
<영국군, 스탠리 총공격(6월 13~14일)>
- 6월 12일 아침, 아르헨티나군 수뇌부는 롱던 산에서부터 해리엇 산에 걸쳐서 약 4,500명의 영국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이 정보는 말비나스 주둔 부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6월 13일에는, 말비나스 제도 총사령관 메넨데스 소장과 갈티에리 대통령이 교신을 했다. 여기서 메넨데스는 '영국군이 보인 행태로 보아, 오늘 밤 그들은 최종적 공격을 가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오늘부터 내일까지 스탠리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여있다'라고 경고했지만 갈티에리 대통령은 그저 스탠리를 사수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6월 12일 아르헨티나군은 스탠리에 설치된 트레일러를 개조한 미사일 발사대로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 영국 구축함 글러모건에 적중시켜 반파상태로 만들었다.
6월 13일부터 영국군은 스탠리의 아르헨티나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12일 밤에는 호위함 '액티브(HMS Active [F171])', 애로우가 186발을, 그리고 13일 23(Q)시에는 어벤저, 야머스, 액티브 등이 4시간에 걸쳐서 856발을 쏘았으며, 포병대는 모두 7,120발을 발사했다. 그러나 함포도 포병도 총알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함포는 이 규모의 포격이 이제 한 번밖에 남지 않았고 포병대도 앞으로 2일분의 탄약밖에 남지 않았다.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는 영국군의 모습(CNN)>
먼저 스코틀랜드 근위대대가 '텀블다운 산(Mount Tumbledown)'을 공격했다. 이 산은 아르헨티나의 내곽 방어선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고, 아르헨티나 해병대 제5보병대대가 수비하고 있었다. 이 대대는 비교적 군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 편성되었으며, 원래 대대의 주둔지가 남아메리카 최남단인 티에라델푸에고 섬으로 내한성을 고려한 장비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4월 초순부터 포클랜드 제도에 파견되어서 진지준비도 잘 된 상태였다.
스코틀랜드 근위대대는 우선 17시부터 새로 상륙한 '스콜피온 경전차(FV101 Scorpion)'를 더한 양동 공격을 한 후, 21시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영국 측의 기대와는 달리 아르헨티나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공격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지만, 03시부터 영국군이 야포 사격과 근접 전투를 연계시키면서 진지는 서서히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8시, 텀블다운 산 전투는 종료되었고 영국 측은 사망자 8명, 부상자 35명이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 측은 사망자 20명 이상에 남은 병력 대다수가 부상자였다.
<포클랜드 전쟁에 참가한 구르카 용병의 모습(Psywarrior)>
텀블다운 남쪽의 윌리엄 산은 애초 스코틀랜드 근위 대대가 텀블다운 산을 점령한 후, '구르카(Gurkhas: 네팔 출신의 용병, 흔히 인간 흉기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한다)' 소총 대대에 의해서 공략할 예정이었는데 텀블다운 공략이 뜻밖에 난항으로 시간이 걸리자, 구르카 대대는 이를 기다리지 않고 02:35분부터 전진을 시작했다. 텀블다운 산의 함락과 동시에 윌리엄 산의 아르헨티나군도 후퇴해서 실질적인 반격은 거의 없었지만, 포격과 지뢰, 우군의 오발도 있었기에 구르카 소총 대대에 의한 실제 점령은 13:05분이 지나서였다.
롱던산 동쪽의 '와이어리스 능선(Wireless Ridge)'의 공격을 담당한 것은 제2공수대대였다. 대대는 구스 그린에서의 고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격에 앞서 포병대와 호위함, 제2및 제3공수 대대의 박격포, 기관총 소대 및 배속된 경전차에 의해서 대규모 사격을 퍼부은 뒤에 전진하기로 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군의 반격은 거의 없었고, 차례로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중간중간, 아르헨티나 포병이 자신들이 포기한 진지에 대해서 정확한 사격을 해오는 바람에 약간의 손해가 있었지만 이 또한, 함포사격으로 포병 진지를 격파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최종적으로 제2공수대대는 2명의 전사자를 낸 것만으로 와이어리스 능선의 점령에 성공했다.
<영국군 제2공수대대의 모습(dailymail)>
<영국군, 스탠리 탈환>
이제 영국군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다수의 아르헨티나군이 함락된 진지로부터 스탠리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영국군의 무어 소장은 아르헨티나 군대를 공격하지 말 것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아르헨티나군의 말비나스 제도 총사령관 메넨데스 소장은 14일 새벽, 더는 버틸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10시에 갈티에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스탠리를 더는 지킬 수 없으며, 전투를 계속한다면 많은 아르헨티나 병사들이 희생되어서 항복보다도 좋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갈티에리 대통령은 아직도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메넨데스 소장은 자신의 책임하에 항복하게 되었다.
12:00~13:30분에는 이미 전장에서 실질적인 휴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14일 23:59분, 메넨데스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정식으로 휴전과 항복이 발효되었다.
<영국군의 플리머스 함에서, 아르헨티나 수비대를 지휘하던 Alfredo Astiz 중령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mercopress)>
<종결>
스탠리 함락 다음 날인 15일, 갈티에리 대통령은 전투 종결 선언을 하고 2일 후에 실각했다. 6월 20일에는 영국군이 사우스 샌드위치 섬을 다시 점령하면서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휴전 선언을 하였다. 이렇게 72일에 달한 양국의 전쟁은 사실상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전후, 아르헨티나 그리고 영국은?>
이후, 아르헨티나는 '라울 알폰신(Raúl Ricardo Alfonsín, 1927~2009)'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되었다. 갈티에리 대통령은 여러 범죄 혐의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징역 12년만 선고받았으며 비데라 등의 다른 군인들과 함께 1990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아르헨티나 사령관으로 더러운 전쟁을 지도하고 많은 시민을 비밀리에 살해한 메넨데스는 자신이 한 행위와 대조적으로 책임을 면했다. 또한 항복한 1만명 이상의 아르헨티나군 병사는 우루과이를 경유해서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르헨티나는 당연하게도 국제적인 평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이 회복에는 문민 정권의 과제가 되었다.
한편, 패배한 군은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덩달아 예산 등도 대폭 삭감되어서 개전 전에는 15만 5000명 정도였던 아르헨티나군은 2000년에는 7만 1000명 정도로 뚝 떨어지면서 과거와 비교하면 안습 수준으로 군사력이 급추락했다.
또, 영국이 NATO나 EC(옛 유럽연합)의 일원으로서 다른 가맹국에 협력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서 이탈리아나 서독, 스페인등의 EC가맹국은 아르헨티나에게 경제 제재를 발동했다. 많은 선조들이 이곳 나라에서 넘어와서 아르헨티나에게는 정신적 고향이었던 유럽의 이 행위에 아르헨티나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심각한 정체성 상실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이 조치가 새로운 정체성을 또한 확립시켰는데 라틴 아메리카의 일원으로서 다시한번 자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서 총 3번의 연임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한다(National Review)>
많은 함정의 손실과 255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승리한 영국은 마가렛 대처 총리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동안 무리한 정책으로 지지율이 형편없었던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이후 연임에 성공하면서 승승장구, 기세를 올린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영국 경제를 부활시켰다.
또한 지금까지 2등 시민 취급을 받던 포클랜드 주민들도 영국 본토 정부로부터 정중하게 취급받으며 영국 시민으로서 한층 대접받게 되었고, 영국과 칠레로부터 투자를 받으면서 섬의 경제 및 인프라는 많이 발전하였다. 분쟁 전에는 소수의 부대만 주둔했지만, 분쟁 후에는 최소한의 방공 부대를 배치하면서 비행대대를 파견하면서 좀 더 견고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아르헨티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영국은 쿨하게 요지부동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Daily Express)>
<전후 양국의 관계>
그 후에도 양국의 국교 단절 상태가 계속됐지만, 1986년 6월 22일 열린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 준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보여준 대활약으로 잉글랜드 팀에게 2대 1로 승리하면서 패전의 굴욕이 남아있던 아르헨티나 국민을 열광시켰다.
1989년 10월,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개전 이후 이어지던 적대 관계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듬해 1990년 2월 5일 양국은 외교 관계를 정식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현재도 서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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