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정면에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투 시스터스(Two Sisters)'산이 보인다. 이곳은 포클랜드 전쟁 중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 중 하나다(3.bp.blogspot)>
[스탠리 외곽에 대한 공격]
스탠리 서쪽에는, 북쪽으로부터 롱던 산(Longdon), 해리엇 산(Harriet), 투 시스터스산(Two Sisters)라는 3개의 산이 연이어 있으며 아르헨티나군의 외곽 방어선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군은 우선 이곳의 공략을 지향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은 6월 8일에 있던 항공 공격의 전과를 과대평가했으며 500~9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멋대로 평가했다. 이에 아르헨티나 본국은 고양되었고, 말비나스 제도 총사령관인 메넨데스(Mario Benjamin Menéndez, 1930~2015) 소장을 상대로 피츠로이의 공격을 요구했으나, 메넨데스 소장은 '부대의 기동력 결여와 항공 및 해상권 상실, 그리고 영국군 공격의 선행이 예측되어서 선공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지었고, 본국의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서 참모장 다엘 소장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파견했다. 그러나 갈티에리 대통령은 이미 말비나스 제도에는 영국군을 물리칠 만한 충분한 병력을 투입했다며 사수 명령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해리엇(Harriet)'산의 모습(유튜브)>
6월 7일, 제3코만도여단은 켄트 산의 사면으로 이동했고, 11일에는 영국 지상군은 공격 개시 준비가 되었다. 양측의 지상 전력은 엇비슷했지만 아르헨티나 측은 항공과 해상에서의 우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또 아르헨티나 측은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몇 주 전부터 진지를 준비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으나, 영국이 스탠리로 직접 상륙할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방어 방향은 바다(서쪽)를 지향하고 있었다. 5월 26일에는 아르헨티나군도 영국군이 샌 칼로스에서 육로로 진격하고 올 공산이 높은 것을 인식했지만, 여전히 영국군이 다시 스탠리에 가까운 곳으로 상륙 작전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던 터라, 샌 칼로스의 공격에 대응하는 남쪽으로 부대를 재배치하지 않았다.
영국군에서는 제2공수대대와 웨일스 근위대대가 제5여단에서 제3코만도 여단의 휘하에 옮겨지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제5여단장 윌슨 준장은 이 조치에 대하여 해병대 무어 소장이 해병대를 편애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 조치는 6월 8일, 항공 공격으로 제5보병여단이 손해를 본 것과 무어 소장이 윌슨 준장의 능력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롱던 산을 방어하는 아르헨티나 군의 모습(fdra-malvinas.blogspot)>
[롱던 산 전투]
6월 11일 19:69(Q) 분경, 스탠리 서쪽의 외곽 방어선에 대한 함포 사격이 개시되었다. 애로우, 야머스, 어벤저, 글러모건이 합계 788발을 사격하고 이 전쟁의 최대 함포 사격이었다. 롱던 산에서 영국 육군 제3공수대대는 이미 전진을 시작했으며, 20:16분에 공격진을 통과했다. 한동안 영국군의 전진에 아르헨티나군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21:30분경에 한 하사가 지뢰를 밟아 발을 날린 것을 계기로 아르헨티나군이 사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포병 지원을 요청했지만, 진지에 대해서는 한정된 효과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군과 같은 롱던 산에 있던 아르헨티나군 부대는 제7보병 연대 B중대 '살바도레스(Carlos Carrizo Salvadores, 1943~)'소령을 중심으로 약 220명이었다. 이곳은 진지를 만들기 좋지 않았고 지뢰 부설도 신통치 않았으나, 롱던산이 원래 천연의 요새인지라, 영국군이 공략하는데 고생을 했다. 특히 야간투시 장비를 갖춘 저격병 및 50구경의 중기관총에 대해서 고전, 영국군은 수류탄과 총검을 이용한 근접 전투에 대전차 무기도 투입하면서, 진지를 소탕했다.
아르헨티나군의 살바도레스 소령은 03:00시에 1개 소대의 증원을 얻어 영국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했지만, 05:00시에는 한계상황이었다. B중대는 퇴각했지만 287명의 인원 중, 철수에 성공한 것은 78명이었고 5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전사 31명에 부상자는 적어도 120명 이상이었다. 한편, 영국 측은 18명의 전사자와 약 4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당시 전투를 표현한 기록화(fdra-malvinas.blogspot)>
[투 시스터스 산 전투]
투 시스터스 산의 공략을 담당한 것은 영국 해병대 제45코만도로, 지휘관은 '앤드루 화이트 헤드(Andrew Whitehead)'소령이었다. 이 산은 이름대로, 동서로 2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이다. 화이트 헤드 소령의 애초 계획은 우선 서쪽 봉우리를 확보한 뒤, 지원을 받고 동쪽을 확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형 관계로 서쪽 봉우리를 확보하는 중대의 행군이 늦어지면서 12일 00:16분에 우선 동쪽 봉우리를 담당하는 2개 중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곧 서쪽 봉우리에 대한 공격도 시작됐다. 이 결과 3개 중대가 거의 동시에 공격하게 되었고 특히, 서쪽의 꼭대기에서는 앞뒤로 적을 보는 형태가 되었다.
동쪽 고갯마루 공격도 순조롭게 진전되었지만, 곧 아르헨티나군의 기관총과 박격포, 야포의 거센 사격을 받아서 1시간 정도 공격이 정체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클라이브 소대장(Clive Dytor, 1956~)이 일어서면서 "전원, 전진!"이라고 외치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미쳤다면서 욕설을 퍼부었지만, 곧바로 중대 전원이 총격을 가하며 공격했다. 이 돌격으로 동쪽 꼭대기도 확보되면서 04:18분까지 진지의 소탕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해리엇 산 전투]
해리엇 산의 공략을 담당한 것은 영국 해병대 제42코만도로 지휘관은 '니콜라스(Nicholas Francis Vaux, 1936~)'소령이었다. 같은 산의 아르헨티나군 진지는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었기에, 니콜라스 소령은 정면 공격을 피해서 우회 공격을 하기로 했다. 즉, 1개 중대로 서쪽에서 양동 공격을 벌이는 한편으로 2개 중대는 남쪽에 진출시키고, 후방으로부터 기습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우선 정찰 소대가 정찰을 한 후, 16:15분 부터 본격적인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때 제7코만도 포병 중대와 함포의 사격이 진행된 것도 있어서 우회 행동은 성공했고, 22:00시부터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우회 공격은 아르헨티나군의 예비병력을 강타한 야간전투였고 경험이 없는 징집병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항복하기 시작했다.
롱던 산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기관총들과 야간투시 장비를 갖춘 저격병 진지는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일부 부대는 600m를 전진하기 위해서 몇 시간이나 걸리는 상황도 있었지만, 새벽에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군은 2명 전사, 13명 부상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손해였는데 반면에 아르헨티나군은 10명 전사, 53명 부상, 300명 이상이 포로가 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이것은 니콜라스 소령의 독창적인 작전에 따라서 아르헨티나 측이 전의를 상실한 점이 크며, 또 항복하려는 병사에 대해서 아르헨티나군 부사관이 총격을 가한 것을 본 영국 해병대가 이들 장교를 적극적으로 공격목표로 삼은 것도 한몫했다(아르헨티나군, 프래깅[상관살해] 안 일어난 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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