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2월 9일] 1915년 - 일본 [산케베츠 불곰 사건]

!@#^& 2019. 12. 9. 00:50

오늘의 역사 : [12월 9일] 1915년 - 일본 [산케베츠 불곰 사건]

일본 최악의 수해사건 - 산케베츠 불곰 사건 발생하다

- 산케베츠 불곰 사건(三毛別羆事件)은 1915년 12월 9일부터 12월 14일까지 홋카이도(北海道) 도마마에군(苫前郡) 도마마에정(苫前村) 산케베츠(現 도마마에정 산케이) 로쿠센사와(六線沢) 에서 발생한 곰에 의한 수해로, 일본 역사상 짐승에 의한 최악의 피해를 낸 사건이다.

아무르큰곰이 수차례 민가를 덮쳐, 개척민 7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사건을 접수한 토벌대가 조직되어 문제의 곰이 사살됨으로써 사태는 종식되었다.

 

사건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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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한 로쿠센사와 부근의 최근 모습 (2014년)

- 사건의 현장이 된 홋카이도 산케베츠 로쿠센사는 일본해(동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30k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지구(地区)다.

지명인 산케베츠는 아이누어(アイヌ語)[강 아래쪽으로 흘려보내는 하천]을 뜻하는 [산케페츠(サンケ・ペツ)]에서 유래한다. 또한, 로쿠센사의 주민들은 도호쿠 등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그곳에 처음부터 살았던 원주민은 없었다.

1915년 11월 초순 어느 새벽, 로쿠센사의 이케다(池田) 가에 거대한 큰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르는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당시 피해는 보존식 옥수수에 그쳤다.

마을은 이제 막 개척을 하고 있던 땅이기도 하였고 이러한 야생동물의 습격은 드문 것이 아니었으나, 주인인 이케다 토미조(池田富蔵)는 진창에 남은 곰 발자국 크기(약 30cm)에 우려했다.

해당 사건이 발생한 근처 지리. 당시나 지금이나 험준한 산과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찬 산간벽지였다

11월 20일, 다시 문제의 큰 곰이 나타났다. 말의 피해를 막기 위해 토미조는 주재소(파출소)와 이웃 마을에서 타니 키하치(谷喜八)와 카네코 토미조(金子富蔵), 두 사냥꾼을 불러서 모두 3명이 곰을 기다리기로 했다.

30일, 세 번째로 나타난 큰 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숨통을 끊지 못했고 그날 밤, 토미조는 장남인 토미키치(富吉)와 아내에게 집을 부탁했고 차남 카메지로(亀次郎, 당시 18세)를 더한 4명이 오니시카산(鬼鹿山) 방향으로 향하는 발자국과 혈흔을 확인하였으나, 눈발이 점점 심해져 그 이상의 추격은 포기해야 했다.

사냥꾼 일행은 해당 곰이 [어떠한 이유로 동면에서 깨어난 녀석]이라고 말했고, 발자국의 거대함 때문에 [그 곰은 너무 큰 덩치 때문에, 자신의 몸에 맞는 월동할 구멍을 찾지 못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였으며, [월동 장소를 찾지 못한 곰은 매우 흉폭하다]경고했다.

 

12월 9일

 

1. 오타 가문(太田家)의 참극

-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개척촌에서는 수확한 농작물을 출하하는 작업으로 바빴는데, 특히 산케베츠와 같은 산간오지에서는 그 작업들은 고스란히 인력에 의존해야만 했고, 사건이 발생한 당시 성인 남성은 대부분 마을을 출타한 상태였다.

12월 9일 아침, 산케베츠 강 상류의 오타 가에서 숙식하면서 벌목업에 종사하던 나가마츠 요키치(長松要吉, 당시 59세)가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일하러 나갔고, 당주인 오타 사부로(太田三郎, 당시 42세)도 마을의 얼음 다리(氷橋)에 사용될 재료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氷橋: 목재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를 눈이나 얼음으로 덮어서 얼리고 굳혀서 완성한 다리

집에는 사부로의 내연관계인 아베 마유(阿部マユ, 당시 34세)와 오타가에 입양될 예정이었던 하스미 미키오(蓮見幹雄, 당시 6살) 두 사람만 집에 남아서 팥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낮, 요키치가 식사를 위해 잠시 귀가해보니 토방(土間)의 이로리(囲炉裏) 뒤편에 미키오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囲炉裏: 농가 등에서 마룻바닥을 사각형으로 판뒤, 난방용·취사(炊事)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

자는가 싶어, 요키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을 걸면서 다가가 미키오의 어깨를 짚고 살펴보았다. 그러자 요키치는 미키오의 얼굴 아래로 흘러나온 선혈과 무언가로 날카롭게 도려낸 목덜미의 끔찍한 상처를 발견하곤 경악했다.

측두부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이미 미키오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요키치는 공포에 떨면서 같이 있었을 마유를 불렀으나 고요했고, 그저 어둑어둑한 안방 거실에서 피비린내와 함께 이상한 냄새만 풍길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사태를 깨달은 요키치는 집을 뛰쳐나와 하류의 가교 현장으로 달려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마을 남자들은 오타 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것이 곰의 소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

입구 반대편 옥수수를 널어놓았던 창문은 찢어졌고, 그곳부터 토방 이로리 이면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곰 발자국이 발견됐다. 아마도 옥수수를 먹으려고 창문으로 다가간 곰의 모습에 마유와 미키오가 놀라 소리를 질렀을 것이고, 이것이 곰을 자극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참고로, 당시 대부분 마을의 집은 볏짚 등으로 만든 허술한 형태였다)

발자국이 이어지는 거실을 살펴보니 타다만 장작이 몇 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피로 물든 곳이 보였다. 빙글빙글 도는 듯한 곰 발자국은 방구석으로 이어졌으며 그곳 역시 선혈에 젖어 있었다.

아마도 불타는 장작을 휘두르며 저항하면서 도망치던 마유가, 곰에게 잡혀서 공격을 받았고 중상을 입었음을 사건 현장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큰 곰은 마유를 끌고는 창문을 통해 야외로 나간 듯, 창틀에는 마유의 것으로 보이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엉켜있었으며, 요키치가 미키오의 죽음을 알았을 때 토방에는 찐 감자가 따뜻한 상태로 굴러다녔다고 한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시간이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오전 10시 반 이후에 산케베츠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오타가 근처 농로를 말을 타고 지나갔을 때, 집에서 숲으로 이어진 무언가를 끌어당긴 흔적과 혈흔을 발견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산에서 끌고 내려와 오타가에서 쉬고 있을 것으로 생각,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기에 이러한 점에서 사건은 오전 10시 반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었고. 사건 소식에 마을은 난리가 났다.

그러나 12월의 홋카이도는 해가 지는 게 워낙 빠르기에(오후 4시 전에 해가 진다) 미키오의 시신을 안방에 안치했을 무렵에는 오후 3시를 지나 날이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남자들은 오타 가에서 500m 정도 하류에 있는 미요케 야스타로(景安太郎, 당시 40세)의 집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했다.

곰 토벌이나 마유의 수색은 다음 날로 해야 했으나, 일단 도마마에정 사무소와 주재소, 그리고 미키오의 친가인 리키비루(力昼村, 現 도마마에정 리키비루)에 연락해야 했다.

그러나 통신수단은 누군가가 직접 알리러 가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오타 집 근처에 사는 남자가 파발꾼으로 뽑혔으나 본인이 두려워하면서 극구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사이토 이시고로(藤石五郎, 당시 42세)가 맡게 됐다.

오타 집보다 한층 더 상류에 집을 지었던 이시고로는 당시 볼일 때문에 당주 야스타로가 오니시카촌(鬼鹿村, 現 오니시카타시로)로 외출해야 했던 메이케이 가로 임신 중인 아내 타케(タケ, 당시 34세)와 셋째 아들 이와오(巌, 당시 6살), 넷째 하루요시(春義, 당시 3살)등 가족 3명을 대피시켰고, 남자 한 명 정도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요키치도 머무르게 한다.

 

12월 10일

 

1. 수색

- 이른 아침, 이시고로는 마을을 나섰고, 남은 남자들은 곰을 토벌하고 마유를 수색 하기위한 약 30명의 수색대를 결성했다. 어제의 발자취를 좇아 숲에 들어선 그들은 150m 정도 전진하자 근처에서 문제의 곰과 조우했다.

말을 가뿐하게 넘는 크기, 전신이 흑갈색 일색이면서도 가슴 언저리에 가사를 걸친듯한(袈裟懸け) 백반을 지닌 곰은 수색대를 곧장 습격했다. 총을 가진 5명이 일제히 총구를 돌렸으나, 손질이 잘 안 되어서 정작 발포된 것은 단 한 자루 뿐이었다.

분노하는 곰으로부터 겁에 질린 수색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곰이 다시 도망쳤기에 수색대는 운 좋게도 피해는 없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수색한 그들은, 오타가에서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분비나무의 둥치에 잔가지가 덧대어져 피로 물든 눈 덮인 구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래 있던 것은 검은 버선을 신고, 포돗빛의 각반이 꼬인 무릎 아래의 다리와 두개골 일부밖에 남지 않은 마유의 시신이 있었다. 해당 곰은 인간의 고기 맛을 알게 되었으며, 마유의 시신을 눈에 숨기려고 한 것은 보존식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다.

2. 오타 가 재습격

밤이 되자 미키오의 부모님과 그 외 3명이 도착, 곧 오타 가의 미키오와 마유의 장례가 치러졌으나 마을 사람들은 곰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해 참석한 것은 로쿠센사에서 3명, 산케베츠에서 두 사람, 미키오의 부모님과 그 지인, 상주인 오타 사부로 등 모두 9명 뿐 이었다.

미키오의 어머니인 하스미 치세(蓮見チセ, 당시 33세)가 술 시중을 하던 오후 8시 반경, 큰 소리와 함께 거실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곰이 마유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서 실내로 난입한다.

관이 내쳐지면서 시신은 나동그라졌고,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대들보 위로 올라가거나 야채 창고나 화장실로 몸을 숨기려 했으며, 이 혼란 속에서 어떤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밀쳐낸 뒤 발판으로 삼아 혼자 대들보 위로 도망쳤다.

둘 다 운좋게 무사히 살아남았으나, 당연히 부부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평생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 소동 속에서도, 용케 기를 쓰면서 석유캔을 치며 곰을 위협하는 사람을 보고 용기를 얻은 또 다른 남자가 총을 집어 들곤 곰에게 한 발 쐈다.

뒤이어 300m 정도 떨어진 나카가와(中川) 집에서 식사하던 50명 정도의 남자들이 소리와 비명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미 큰 곰은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희생자가 나오지 않아 안도한 일동은 일단 메이케이 가로 대피하기위해 하류로 향했다.

일본 만화가 야구치 타카오의 羆風 中

3. 메이케이 가의 참극

- 그 무렵 메이케이 집안은 메이케이 야스타로의 부인 야요(ヤヨ, 당시 34세), 장남 리키조(力蔵, 당시 10세), 차남 유지로(勇次郎, 당시 8살), 장녀 히사노(ヒサノ, 당시 6살), 삼남 킨조(金蔵, 당시 3살), 사남 우메키치(梅吉, 당시 1살) 6명이 있었다.

여기에 상기한 사이토 이시고로의 가족으로 메이케이 집안에 피난온 임산부인 타케, 이와오, 하루요시 등 3명, 그리고 요키치까지 합계 10명(타케의 태아까지 포함하면 11명)이 있었다.

전날 오타 가의 소동을 접해, 피난한 여자와 아이들은 불을 피우며 겁에 질린 채 조용히 있었다. 호위(감시역)는 인근으로 식사하러 나갔고, 거기서 오타 가에 곰이 다시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남자로서 남아 있던 것은 요키치 뿐이었고, 주인 야스타로는 상기했듯이 다른 마을로 나가 있어 부재중이었다.

허나.. 도망친 곰은 다름아닌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타 가에서 문제의 곰이 사라진 지 채 20분이 지나지 않은 오후 8시 50분경, 야요가 등에 우메키치를 업은 채 토벌대의 야참을 준비하고 있을 때, 거대한 땅 울림과 함께 창문을 부수고 검은 덩어리가 침입한다.

야요는 [누가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 정체는 야요가 본 적도 없는 거대한 곰이었다. 호박을 삶던 이로리 속의 큰 냄비가 뒤집혀 불꽃은 꺼지고, 혼란 속에서 램프 등의 등불까지 꺼지면서 순식간에 집안은 암흑으로 변했다.

야요는 실외로 도망치려다 공포 때문에 매달린 유지로에게 발을 잡히자, 곰이 달려들어 업고 있던 우메키치를 물어뜯은 뒤 3명을 손아귀에 끌어들이곤 야요의 머리를 깨물었다.

그 직후, 곰은 도망치려고 현관으로 달려가는 요키치에게 정신이 팔려 야요 모자(母子)를 놔주었고 그녀는 유지로와 우메키치를 데리고 공포의 집을 탈출했다.

쫓긴 요키치는 그늘에 숨으려다 곰의 엄니가 허리에 박혔고, 엄청난 고통과 공포에 요키치가 비명을 지르자 곰은 놀랐는지 다시 공격 목표를 바꿔, 7명이 남겨진 실내로 눈을 돌렸다.

곰은 킨조와 하루요시를 일격에 때려죽이고, 이와오를 물어뜯었다. 이때 야채 두는 곳에 숨어 있던 타케가 하필이면 멍석에서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그것을 눈치챈 큰 곰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거실로 끌어내어진 타케는 [배는 찢지 말아줘!] 라고 태아의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곰은 무심하게도 타케를 상체부터 먹기 시작했다.

강 아래로 향하던 일행은 격렬한 소리와 끔찍한 비명소리를 듣고 서둘렀다. 곧이어 중상인 야요와 아이들과 마주쳤고, 메이케이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중상을 입으면서도 기어코 탈출해 온 요키치를 보호한 남자들은 메이케이 가를 에워쌌으나, 두려움으로 어둠이 덮인 집안에 섣불리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안에서는 타케라고 추측되는 여성의 단말마와 신음소리, 고기를 씹으며 뼈를 깨부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곰이 날뛰는 둔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집에 불을 지르자는 방안이나 마구잡이로 일제히 사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아이들의 생존에 희망을 건 야요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격론 끝에, 일동은 두 패로 나뉘어 입구 근처에 총을 겨누며 10여 명을 중심으로 배치, 나머지는 집 뒤쪽으로 돌아섰다. 곰이 나올 것이라 예상되는 위치를 노린 것이다.

사냥꾼이 공포탄을 두 발 쏘자 곰은 입구를 찢으면서 정면에서 기다리던 남자들 앞에 나타났다. 선두의 남자가 쏘려 했으나 또다시 총기불량으로 불발로 끝났고, 다른 사람도 쏘지 못하면서 그 틈에 곰은 사라졌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횃불을 손에 들고 메이케이 집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은 천장까지 젖을 만큼의 피바다, 그리고 무참히 뜯긴 타케, 하루요시, 킨조의 시신이었다.

상반신을 물린 타케의 배는 찢긴 채 태아가 밖으로 나온 상태였는데, 곰이 손을 대지는 않았고 꼬물거리며 조금씩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나 태아는 1시간 후에 사망했다.

로쿠센사와 부근의 현재 모습

리키조는 잡곡을 넣어둔 포대 그늘에 가려져 살육의 현장에서 무사했으나 그 끔찍한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목격했고, 히사노는 기절한 채 무방비한 상태로 거실에서 쓰러져 있었지만, 천운으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부랴부랴 리키조와 히사노를 보호하고 시신을 수습한 일행이 집을 나서려고 하자, 집 안에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러일전쟁에서 참전한 사람이 다시 집으로 들어서자, 멍석 밑에 숨겨져 있던 중상의 이와오를 발견했다.

이와오는 어깨와 가슴이 물려서 큰 상처를 입었으며, 왼쪽 허벅지에서 엉덩이까지 먹혀 뼈만 남아 있었다.

로쿠센사의 모든 주민은 산케베츠 분교장(그 뒤 산케베츠 소학교가 되었으나 현재는 폐교)으로 피난한다. 중상자들도 3km 하류에 있는 츠지(辻) 가에 수용되어 응급 치료를 받았다.

이와오는 어머니인 타케의 참상을 알지도 못한 채, [엄마! 곰 좀 쫓아내 줘!] 라며 헛소리를 하면서 물을 자꾸 요구하다가, 20분 후에 절명한다.

이틀 동안 6명, 태아를 포함하면 7명의 목숨이 사라졌고 3명이 중상을 입었고, 살아남은 중상자들이 고탄베쓰(古丹別)의 사와타니 의원(沢谷医院)에 입원한 것은 12일이었다.

 

12월 11일

- 모든 주민이 분교장으로 대피한 로쿠센사에 사람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겁에 질려 문단속을 단단히 한 산케베츠 농가들은 곰을 피하고자 피워댄 불길만이 10일 밤부터 으스스하게 마을을 밝히고 있었다.

주민들 만으로는 더이상 해결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산케베츠 지구청장(地区区長) 오카와 요미키치(大川女三吉, 당시 47세)와 마을의 장로, 유지, 주재소 순사와 구청 직원, 분교 교사들이 논의, 곰 퇴치의 지원을 경찰이나 행정에 의지하는 것을 결의했다.

한편,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모르고 눈길을 헤친 사이토 이시고로는 지방 관공서와 경찰에 오타 가의 사건 보고를 마친 뒤, 10일은 도마마에에 숙소를 잡고 11일 낮에 돌아갔다.

하류인 산케베츠로 당도하여 그제야 아내와 자식의 비극을 전해 들은 사이토는 멍하니 있다가 설상에 쓰러져 한없이 통곡했다.

 

12월 12일

1. 토벌대 조직

로쿠센사와의 곰 습격 사건 연락을 받은 홋카이도청 경찰부 보안과에서 당시 하보로 분서장인 스가 미츠구(菅貢, 계급은 경위)에게 토벌대 조직을 지시하였고, 곧 토벌대 본부는 산케베츠에 있는 오오카와(大川興三吉)의 집에 설치되었다.

한편, 사망자의 부검을 위해 말썰매로 한발 앞서 현지로 향하던 의사는 정오가 지나서 산길에서 곰의 대변을 발견했다. 그것을 검사하자 안에서 사람의 뼈·머리카락·인육을 발견한다.

스가 경위는 대장으로서 제실(帝室) 임야 관리국 인근의 청년회와 소방단 지원의 청년들과 아이누족에게도 협력을 받아, 무라타 소총(村田銃) 60정과 흉기류, 일본도를 가진 자를 포함해 도합 270명 이상이 모였다.

부대장에는 제실 임야관리국(現 임야청) 하보로 출장소 고탄베쓰 조사구 주임 기수인 키도 안신(喜渡安信)과 산케베츠 분교장 교감인 마쓰다 사다이치(松田定一)를 임명하였다.

대장인 간 경위는 방위선인 우치도메 다리(射止橋)를 봉쇄하는 한편, 토벌대에 수색을 지시한다. 그러나 곰의 모습을 포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치도메 다리의 현재 모습, 팻말엔 산케베츠 현장에서 5km 떨어진 곳이라고 적혀있다.

2. 매복

- 황혼이 다가오면서 토벌대 본부는 검토를 거듭했는데, 그 중에서 [곰은 사냥감을 되찾으려는 습성이 있다. 이것을 이용해 해당 곰을 끌어들이자] 라는 방안이 제안되었지만, 그 사냥감이 무엇(희생자의 시신)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본부 내의 의견은 갈라졌다.

그러나 스가 대장은 목적을 위해 해당 방안을 채택했고, 엄청난 비난을 들을 각오를 하면서 유족과 마을 사람들 앞에 섰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해당 방안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군말없이 조용히 받아들였다.

사태는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이며, 이렇게 희생자의 시신을 먹이로 곰을 유인하려는 전대미문의 작전이 채용된다.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총기 사용에 능숙한 7명이 사수로 선정됐고, 교체 요원 한 명을 제외한 6명이 대들보 위에서 곰을 기다렸다.

거실에 놓인 태아를 포함해 6구 시신의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숲에서 모습을 나타낸 곰에 모두 숨을 죽이며 작전 결행의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기 직전, 곰은 걸음을 멈추곤 안을 경계하면서 몇 번인가 집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숲으로 되돌아갔다. 남자들은 그대로 다음날까지 매복했으나 곰은 나타나지 않았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13일

- 이날, 아사히카와(旭川) 육군 제7사단에서 보병 제28연대가 사태 수습을 위해 투입된다. 장병 30명이 출동한 한편, 해당 곰은 마을 사람이 없는 집들을 제 마음대로 휩쓸고 다녔다.

기르던 닭을 물어 죽이고, 된장이나 청어 절임 등의 보존식을 털었으며 옷이나 침구 등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자가 사용하던 베개나 따뜻하게 데워놓은 난방용 돌 등에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드러냈던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산케베츠 부근의 하천 근방에 있는 8채의 집이 피해를 봤으나, 곰의 발견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뛰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곰의 행동은 점차 신중함이 결여되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찾지 못해 낮임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집에 발을 들이는 등 경계심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행동지역이 점점 하류까지 늘어나면서 본인이 발견될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가 대장은 얼음 다리를 방위선으로 삼아 이곳에 소총수를 배치하며 경계를 강화했다. 곰이 발견되는 건 곧 시간문제였다.

오후 8시경, 다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한 사람이 강 건너편 그루터기의 수상한 그림자에 의문을 느꼈다. 6개인 나무 그루터기가 분명히 1개가 더 늘었고, 게다가 어른거리기 까지 했다.

보고를 받은 간 대장이 [사람이냐?! 아니면 곰이냐?!] 라고 큰소리로 물었으나 그림자는 대답이 없었다.

대장의 명령 아래, 총잡이들이 건너편 강가와 다리 위에서 총을 쐈다. 그러자 수상한 그림자는 움직이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문제의 곰으로, 잡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간 대장은 곧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12월 14일

 

1. 곰의 최후

-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강가를 조사한 일행은 그곳에서 곰의 발자국과 핏자국을 발견했다. 총탄을 맞아서 움직임이 둔해질 것으로 생각, 급히 토벌대 차출 결정이 내려진다.

일행 외에 10일, 심야에 소식을 듣고 산케베츠로 들어간 야마모토 헤이키치(山本兵吉, 1858~1950)라는 사냥꾼이 등장한다.

오니시카촌 온네나이(現 루모이군 오비라정 오니시카타시로)에 살던 헤이키치는 젊은 시절, 고등어 손질할 때 쓰는 식칼 한 자루로 곰을 쓰러뜨려 [식칼 형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군모와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러시아제 라이플을 손에 들고, 수 많은 짐승을 사냥하면서 데시오국(天塩国)에서도 평판이 높은 사냥꾼이었다.

만약 11월에 일어난 이케다 가의 곰 출몰을 그가 알고 있었다면 9일과 10일의 비극도 없었을 것으로 사람들은 안타까워할 정도로, 근방에서는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헤이키치는 때때로 술을 마시면 거칠어지기도 하였으나, 평소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다정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헤이키치는 토벌대와 헤어져 단독으로 산에 들어섰고, 곧 정상 부근의 물참나무에서 쉬고 있던 곰을 발견했다. 녀석은 기슭을 오르는 토벌대만 신경 쓰고 있었고 헤이키치의 존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20m 정도 다가가던 헤이키치는 느릅나무 나무에 일단 몸을 숨기며 총을 겨누었다.

이윽고 총성이 울렸고, 첫 번째 탄알은 곰의 심장 근처를 관통했다. 그러나 곰은 기죽지 않고 일어나 헤이키치를 노려보았고 그는 즉시 다음 탄을 채워 넣고는 재빨리 사격, 두 번째는 곰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12월 14일 오전 10시, 총성을 듣고 긴급히 출동한 토벌대가 본 것은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곰의 사체였다.

2. 쿠마 카제(熊風)

- 곰은 금색 빛 털이 섞인 흑갈색의 수컷으로, 무게 340kg, 신장 2.7m에 달했으며 가슴 언저리에서 등까지 가사를 걸치듯 활 모양의 백반이 섞인 거물이었다.

추정 연령은 7~8세로 보이며, 머리의 털은 바늘처럼 딱딱했고 몸보다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컸다. 이처럼 특색 있는 곰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대원들은 분노나 원한을 폭발, 몽둥이로 때리는 자, 발길질하는 자 등 다양했으며, 이윽고 너 나 할 것 없이 만세를 부르면서 토벌대 200명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끝나고 보니 12일부터 3일간 투입된 토벌대원은 총 600명으로, 아이누족의 개 10마리 이상이 투입되었으며 총기는 60정에 이르는 역대 최고의 토벌이었다.

곰의 시신은 사람들이 끌고 산 아래까지 옮겨졌으며, 그 이후에는 말썰매에 실렸다. 하지만 말이 겁이라도 먹었는지 날뛰면서 도통 말을 듣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람들이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면서 눈이 내렸다. 사건 발생부터 이 사흘은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으나, 심한 눈보라로 바뀌면서 썰매를 끄는 일행에게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곰을 죽이면 하늘이 거칠어진다고 하여 이러한 날씨의 급변에 마을 사람들은 [쿠마 카제(곰 바람)]이라고 부르게 된다.

3. 해부

- 눈보라를 뚫고 5km의 내리막길을 1시간 반가량 끌고 온 곰의 사체는 산케베츠 청년 회관에 옮겨졌다.

이때, 우류군(雨竜郡)에서 찾아온 어느 아이누족 부부는 [이 곰은 며칠 전에 우류에서 여자를 잡아먹은 짐승]이라며 [그 증거로 배에서 붉은 내의 조각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한 사냥꾼은 [아사히카와에서 여자를 잡아먹은 곰이라면 살색의 각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곰을 사냥한 야마모토 헤이키치는 [이 곰이 데시오(天塩)에서 함바집 여자를 잡아먹고 산케베츠로 쫓겨오던 놈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해부가 시작되었고, 위장을 가르자 과연, 곰 뱃속에는 붉은 천, 살색의 각반, 그리고 아베 마유가 착용하고 있던 포돗빛 각반이 엉킨 머리카락과 함께 발견되었고, 모두 슬픔에 잠겼다.

대대로 내려온 지역의 전통으로, 희생자들의 공양을 위해 곰고기는 익혀 먹었으나, 딱딱하고 힘줄이 많아 맛과 식감 모두 좋지 않았다고 한다. 벗긴 가죽은 판자에 붙여 건조한 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곰은 당시 금액인 50엔에 매각되었고 해당 돈은 피해자들에게 전달되었다(참고로 모피나 두개골의 행방은 묘연하다).

산케베츠 불곰을 잡은 사냥꾼, 야마모토 헤이키치의 모습

4. 그 후

- 머리에 상처를 입었으나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준 야요는 순조롭게 회복했지만, 야요의 등 뒤에서 물어뜯긴 우메키치는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2년 8개월 만에 숨졌다(혹자는 이 아이을 포함해 사건의 사망자를 8명으로 포함하기도 한다).

같은 집에서 곰의 습격으로부터 생환한 메이케이 유지로는 사건 27년 후,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다.

곰에게 물렸던 요키치도 회복되어 다음 해 봄, 일하러 돌아왔으나 강으로 추락해 사망한다. 이것이 곰에게 물린 상처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태는 해결되었으나 이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공포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마을 밖에서 의지할 수 있는 연줄을 가진 주민들은 일찌감치 로쿠센사를 떠났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연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헐린 가옥을 수리하고 불을 쬐면서 겨우 월동했으나, 봄이 되어도 마을은 활기를 되찾지 못하였고, 가족을 잃은 오타 사부로는 문제의 집을 태워버리곤 하보로로 떠났고, 그 후 본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아오모리로 옮겼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고 한다.

이후, 로쿠센사는 하나 둘 씩 마을을 떠나면서 하류의 츠지 가를 제외한 해당 마을은 텅 비어졌고, 그 뒤 완벽한 무인지대가 되었다.

곰을 잡은 야마모토 헤이키치는 그 뒤에도 사냥꾼으로 산야를 달렸으며, 1950년에 9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장수했다. 손자의 말에 따르면 평생 쓰러뜨린 곰이 3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사건 당시 해당 마을 구청장의 아들인 오카와 하루요시(大川春義 당시 7세)은 그 후 이름난 곰 사냥꾼이 되었다.

이것은 희생자 한 사람당 10마리의 곰을 잡겠다는 다짐에 따른 것으로, 62년에 걸쳐 100마리 이상 잡았으며 은퇴한 뒤에는 희생된 마을 사람들의 위령비인 [熊害慰霊碑](바로 위 이미지) 옛 산케베츠 신사에 세웠다.

참고로, 하루요시는 20살 때 사냥꾼이 되었으나 한동안 겁이 나서 정작 불곰을 앞에 두고 총을 발사 하지 못하는 새가슴 이었으나, 32세 때 처음으로 불곰을 잡는데 성공해 아버지와 지역 주민들의 박수를 받는다.

이후, 1942년에 4마리를 잡았고, 그 다음해인 1943년에는 3마리의 곰을 잡는 등 사냥꾼으로의 능력이 개화한다. 그리고 1944년 태평양 전쟁에 참전, 곰 사냥으로 단련한 발군의 사격솜씨로 활약했다(100m 밖 움직이는 표적에 연속으로 명중).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하루요시는 계속 홋카이도에서 불곰을 사냥하였으며, 1977년에 100마리를 잡으면서 68세의 나이로 사냥꾼에서 은퇴한다(그가 활약하던 시기 불곰에 의한 피해는 기존에서 3분의 1까지 감소하였다고 한다).

은퇴 후, 조용히 살던 하루요시는 1985년 12월 9일 산케베츠 소학교에서 열렸던 해당 사건의 70회 법회에서 연설을 하고자 강연 단상에서 [아, 여러분...]이라고 말하곤 쓰러졌고,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하루요시는 산중에서 불곰을 노릴 때 매우 금욕적이고 엄격했다고 한다. 가지고 다니는 음식은 오직 매실 주먹밥과 물 뿐이었고, 곰이 냄새를 알아 차리지 못하게 담배 한 번 피우는 일도 없었다.

생전 100마리가 넘는 많은 곰을 잡은 반면에, 불곰을 산신처럼 섬겼던 그는 죽은 곰을 위한 위령제도 빠짐없이 했으며, 늘 입버릇 처럼 [산에 들어서면, 곰에 대한 나쁜 말은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다.

사냥꾼 말년에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새끼를 감싸던 어미 곰을 잡는 걸 주저하기도 했다.

그는 희생자의 복수를 생각해 곰 사냥꾼의 길로 들어섰으나, 100마리를 달성 한 후에는 [정말로 나쁜 것은 곰이 아닌, 그 거처를 황폐하게 만든 인간, 바로 자신들이 아닐까] 생각했다고도 한다.

또, 하루요시의 아들 타카요시(高義) 역시 사냥꾼이 되어서 1980년에는 아버지 하루요시가 추적하던, 체중 500kg이나 되는 곰 [홋카이 타로(北海太郎)]를 8년 동안 추적한 끝에 기어코 사냥한다.

그 5년 뒤에는 다른 사냥꾼과 둘이서, 몸무게 350kg의 곰 [골짜기의 지로(渓谷の次郎)]도 잡았다(현재는 타카요시도 고인).

홋카이 타로의 박제된 모습, 좌측 인물은 타카요시와 같이 당시에 해당 곰을 사냥한 하야시 토요유키.

 

사건의 기록

당시 산케베츠 불곰 사건을 다룬 지역 신문 홋카이 타임스 기사

1. 보도

- 사건이 신문 등으로 보도된 것은 12월 13일 [홋카이 타임스(北海タイムス)] [오타루 신문(小樽新聞)]이 가장 빠르게 소식을 알렸고, [하코다테 마이니치 신문(函館毎日新聞)]이 14일, [하코다테 신문(函館新聞)]은 19일에야 소식을 게재했다.


▼홋카이 타임스는 1887년에 창간→1998년 폐간

▼오타루 신문은 1894년에 창간→1942년 폐간

▼하코다테  마이니치 신문은 1878년 창간→1937년 폐간


이러한 지연은 통신수단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1910년대였고, 사건이 깊숙한 산중의 마을에서 일어난 것도 재앙이자 소식 지연의 한 원인이었다.

다만 홋카이 타임스는 13일부터 25일까지 매일 기사를 게재하였고,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날은 과거에 곰으로 인한 수해 사건을 [곰 이야기]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오타루 신문도 1월 28일까지 사건 기사를 싣고, 야마모토 헤이키치와 인터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진다. 그것은 1878년 1월 11~18일에 일어난 [삿포로 오카다마 사건(札幌丘珠事件)]의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서 사건을 일으킨 곰의 박제가 당시 메이지 일왕이 관람한 것으로 널리 보도되었고, 이것이 곰 수해 사건의 대표로 인지된 영향이 있었다.


아무르큰곰의 모습

▼삿포로 오카다마 사건(札幌丘珠事件): 1878년 1월 11일~18일에 걸쳐, 현 삿포로시 히가시구 오카다마쵸에서 발생했던 일본 역사상 4번째로 큰 피해를 낸 수해 사건으로, 동면에서 깨어난 아무르큰곰이 사냥꾼과 개척민 부부를 덮쳐, 사망자 3명과 중상자 2명이 발생했다.

이후, 해당 곰은 18일 낮 사살 되었고 삿포로 농업학교로 옮겨져 교수의 지도하에 학생들의 손에 해부되었다. 이때 학교 1기생으로 동석한 교육자 오오시마 마사타케(大島 正健, 1859-1938)의 회고 기록이 남아있다.


뜻하지 않은 재료에 환희의 목소리를 높은 학생들은 지도교수 아래 곧바로 해부 실습에 착수했다. (중략) 교수의 눈을 피해 두세 놈이 몰래 한 덩어리 살을 잘라냈다. 그리곤 휴식시간을 기다리다 못해 소사실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그 살점이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에 올려졌다. 나도 모르게 희귀한 고기를 깨물었는데, 누구 할 것 없이 [곰고기는 냄새가 심하구만, 무서울 정도로 질기고]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각이 되자, 교수가 부르는 소리에 모두 시큰둥하게 부검실에 모여 내장절개에 나섰는데, 학생 중 한명이 이상하게 부풀어오른 커다란 뱃살을 힘껏 열어젖혔더니,

질퍽질퍽하게 흘러나오는 내용물, 붉은 두건이 있는 손이 있었다. 마누라(희생된 부부 중 아내)의 쥐어뜯긴 머리카락이 있었다. 악취가 퍼지면서 눈을 가리는 참상에 학생들은 악을 쓰며 자리를 피했다. (중략)

(학생들은) 야외로 뛰어나가 입에 손가락을 넣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맛본 곰의 고기를 뱉어냈다.


2. 재조사

다시 산케베츠 사건을 세상에 알린 논픽션 작가 기무라 모리타케의 생전 모습

- 논픽션 작가인 기무라 모리타케(木村盛武, 1920~2019)는 아사히카와, 고탄베쓰의 영림서에 농림 기관으로 일하던 1961년부터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58년이 경과, 게다가 거의 자료가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따로 살던 당시 마을 사람들을 찾아내 정교한 청취를 시행했다.

많은 당사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생존한 사람들도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취재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햇수로 4년의 조사를 거쳐서 보고 [수해사 최대의 참극, 도마마에 불곰 사건(獣害史最大の惨劇苫前羆事件)]을 정리했다.

통곡의 계곡

이것은 1980년에 복각되었고, 나아가 1994년에는 교도 문화사에서 [통곡의 계곡(慟哭の谷), The Devil's Valley(ISBN 978-4905664895)]로 출판된다.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 1927~2006)도 사건을 취재하고 이를 소설 [쿠마 아라시(곰 폭풍, 羆嵐)]로 정리했다. 이 작품은 TBS 라디오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으며, 1983년에 출판된 [エゾヒグマ百科], [ヒグマそこが知りたい] 등에도 이 사건의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사건 분석

청어박 제조에 사용되는 압착기

1. 원인

- 사건은, 동면에 실패한 곰이 배고픔에 흉포함까지 더해져 일으킨 예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같은 케이스의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고 최근 이 설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오히려 에도시대 후기부터 계속되던, 청어를 원료로 하는 비료인 청어박(鰊粕) 제조를 위한 장작을 얻기 위해 이루어진 삼림 벌채와 메이지 유신 이후 내륙 지역 개척이 맞물려서 야생 동물과 인간의 활동 범위가 겹쳐진 결과가 일으킨 사건으로 보고 있다.

2. 교훈

- 이 사건을 기록한 기무라 모리타케는 왜 이 정도의 큰 참사가 되었는지 분석하고 있다.

처음에 출몰했을 때 상처를 입혔음에도 곰을 놓친 것과, 일반 농민의 총기 관리 부족이 초래한 불발의 연속 등도 요인이지만, 여기에서는 곰의 행동에 대해 언급한다.

2-1.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사건 발생 후, 마을 사람들은 불을 때면서 곰을 피해 사람들이 메이케이 집으로 피난했을 때나 분교장으로 대피할 때 많은 모닥불이 태워진 것이 기록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야생 동물은 불을 무서워한다]라는 뜬소문을 믿었으나 실제로는 오타, 메이케이 가의 습격으로 보듯이 곰은 등화와 모닥불 등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2. 집착심이 강하다

- 사건은 이 정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옥수수를 몇 번이나 노리고 있던 점과 이전에 다수의 여자를 물어 죽인 곰이 산케베츠에서도 여자의 의류 등에 이상한 집착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아베 마유를 잡아먹었을 때 남은 시신을 눈에 숨긴 것, 오타 가에 여러 번 출몰한 것 등도 곰의 특성에 의한다. 그러면서 말의 피해는 전혀 없었으며, 이 곰이 여자나 어린이의 고기 맛을 기억해 버린 것도 원인이다.

2-3. 도망치면 쫓는다

- 메이케이 집에서 야요 일행이 구사일생한 이유는 곰이 도망가던 요키치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록 포식 중이라도 곰은 도망치는 것을 반사적으로 쫓아가는 습성이 있다.

2-4. 죽은 척은 무의미

- 메이케이 가의 참극에서 기절해 무방비하게 누워있던 메이케이 히사노와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태아는 곰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다. 이것은 움직이지 않아서 공격당한 게 아니라 단지 그 외에 음식(사람)이 있었을 뿐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도 히사노는 여자였으나 아직 어렸고, 큰 곰은 성인여성의 고기를 선호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유로 임산부는 덮쳤으나 태아는 건드리지 않았다.

2-5. 한번 인간의 맛을 기억한 개체는 위험

- 일반적으로 곰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덮치는 것은 갑자기 인간과 만난 공포심이라 일컬어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방울 등을 울려서 인간의 존재를 미리 알리고 맞대면할 기회를 줄이면 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의 무력함과 인육의 맛을 알게 된 곰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경우 방울 소리를 백날 울려봤자 [나 여깄소] 하고 사냥감의 존재를 알리게 되어 오히려 위험하다.

 

사건의 기억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현재 모습

- 도마마에 향토 자료관(5월~10월까지 영업)에 전시품이나 기록이 있으며 실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읍민들에 의해서 당시의 정경이 재현된 [산케베츠 불곰 사건 복원지]가 있다.

울창하게 나무들이 무성한 한편, 당시의 생활을 재현한 가옥의 복원, 사건을 해설하는 간판, 희생자들의 위령비, 그리고 민가를 덮치려는 곰의 조각상이 있다.

장소는 국도 239호 고탄베쓰 사거리에서 홋카이도 도로 1049호 도마마에 고다이라선을 남쪽으로 들어가 약 16km 지점이다. 참고로 근처에 민가는 없으며, 실제로 곰이 출몰하기도 하므로 찾아갈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사건으로부터 100년이 된 2015년 10월 15일, 복원지에서 현지 유지들의 백주기 추모 법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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