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2월 17일> 1944년 12월 17일 - <말메디 학살 사건>

!@#^& 2019. 12. 16. 21:00


- 말메디 학살 사건(Malmédy massacre)1944년 벌지 전투[각주:1] 와중에 발생한 나치 무장 친위대[각주:2]전쟁 범죄다.


[경위]

-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벨기에 남부에서 프랑스 동부로 전개한 연합군을 상대로 [룬트슈테트 공세[각주:3]]라고 알려진 대공세를 시작했다. 

그 다음 날인 12월 17일, 공세주력제6SS기갑군의 선봉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1915~1976) 친위대 중령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벨기에의 말메디리뉴빌(Ligneuville) 사이에서 미 285포병 관측 대대와 조우했다. 

단시간의 전투 후에 미군 부대는 항복했고, 파이퍼 등 부대 주력은 진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감시를 맡은 독일군 병사들과 함께 포로 150명사거리 근처들판에 모아 무장 해제 한 뒤, 후방에 보내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한 친위대 장교권총을 뽑더니 맨 앞줄에 서 있던 위생병을 쐈고, 그다음 옆에 서 있던 병사를 쏘았다. 다른 친위대원들도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했다]

왜 그런 사태가 발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살 피해자는 자료에 따르면 72명에서 84명. 살아남은 포로 중 상당수는 으로 도망쳤고, 희생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됐다. 미군 정찰부대가 그날 밤 학살 현장발견했고 뉴스는 연합군 내에 빠르게 전해졌다. 

그 후 독일군의 공세는 실패로 끝났고 미군은 1945년 1월 13일, 학살이 발생한 지점을 탈환하면서 1월 14일 15일 시신이 회수됐다.


<학살이 발생한 사건 현장의 현재 모습>


독일군 측기록, 증언에 따르면 미 285포병 관측 대대의 트럭 종대와 조우한 것은 선봉 전차 부대로, 양측의 목적지는 나란히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엥겔스도르프(Engelsdorf)였다. 한시라도 빨리 진군해야겠다고 판단한 선봉 전차부대는 포로수속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대충 무장해제했을 뿐, 포로를 놔두고 진군을 재개해 버렸다. 

그 결과, 방치된 채 서 있던 미군 포로 몇 명이 다시 무기를 들었다. 급했기 때문에 모든 무기를 회수하지 못했고 당연히 무장해제를 완전히 하지 못했다. 그런 전쟁터에 방치된 인간이 무심코 무기에 손을 뻗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거기에 그만 후속 전차부대가 찾아오고 말았다.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후속 전차부대는 무기를 든 몇 명을 확인, 포로가 아닌 적 부대착각해 공격을 개시했다. 불완전하다고는 하지만 무장해제된 미군 병사들이 반격한다는 선택지는커녕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독일군 측은 도망을 제지하기 위해 발포, 희생자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져버렸다. 

당시 무장해제만 하고 그냥 석방해주는 일도 드물지는 않았던 때라 대전 말기혼란 속에서 독일군은 혼란스러웠고, 정보 연락도 잘되지 않는 상태에서 발생하고만 비극이라는 의견이 있다[각주:4].

참고로 이 의견은 독일군 측의 관점이다.


[재판]

- 전후, 파이퍼 친위대 중령을 비롯하여 파이퍼 전투단에 소속되어 있던 무장 친위대원 74명체포되어 1946년 5월 말메디에서 살인 혐의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포로 살해가 파이퍼 등 독일군 지휘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후에 감형됐으며 파이퍼를 포함한 대원들은 1956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현재는 전투 중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다수의 포로가 학살된 것은 사실이나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일부에선 한술 더떠 (특히 같은 추축국일본) 미국이 이 사건을 독일 측을 규탄하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이 재판에서 독일 측의 변호 측 증인으로서 출정한 미군 제30보병 사단 중령증언무시되었고, 오히려 독일군에 협력했다고 해서 고발되어 버린 일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엄연히 독일 측이 저지른 학살이며 주석으로 달아놨듯이, 이러한 생각은 전형적가해자 측축소은폐, 사건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얼마나 많이 은폐했을지...

풀려난 이후 파이퍼는 가명으로 프랑스은닉했지만, 1976년 정체발각되면서 집으로 날아온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죽었다. 




  1. Battle of the Bulge: 1944년 12월 16일~1945년 1월 25일,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이다. 벌지는 영어로 '주머니'라는 뜻으로 독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준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문으로]
  2. Waffen-SS: 나치 독일의 친위대(Schutzstaffel) 소속 무장 전투집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육·해·공군에 이은 제4의 군대로 활약했다. [본문으로]
  3. 연합국 측의 호칭으로 벌지 전투. [본문으로]
  4. 물론 전쟁 범죄에서 가해자의 특징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상대적으로 축소,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저 믿지는 말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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