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2월 18일> 1970년 12월 18일 - 일본, <가미아카쓰카 파출소 습격사건>

!@#^& 2019. 12. 17. 19:33


- 가미아카쓰카 파출소 습격사건(上赤塚交番襲撃事件)은 1970년 12월 18일 게이힌 안보공동투쟁[각주:1](京浜安保共闘) 멤버 3명에 의하여, 도쿄 이타바시구의 시무라 경찰서 가미아카쓰카 파출소가 습격을 받는다. 

당시 습격 멤버 중 한 명대응경찰에 의해 사살되면서, 일본 좌익운동가가 경찰관에 사살된 첫 케이스가 되었다.


<게이힌 안보공동투쟁 멤버들의 모습>


[개요]

- 사건이 일어나기 전년도 12월에 체포된 혁명 좌파 지도자 가와시마 츠요시(川島豪, 1941~1990)는 사건이 발생 해 봄부터 자신의 탈환(탈옥)옥외 지도부지시했다. 옥외 지도부는 다양한 탈환 방법을 검토한 결과 가와시마를 태운 호송 차량을 습격, 가와시마를 탈환하기로 하면서 그때 보조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파출소 총기 탈취가 계획되었다.

12월 18일 오전 1시경, 혁명 좌파의 요코하마 국립대학(横浜国立大学)시바노 하루히코(柴野春彦, 1946~1970)· 같은 대학의 와타나베 마사노리(渡辺正則)·가나가와 현립 가와사키 고등학생 사토 다카노부(佐藤隆信) 3명이 파출소에 주재하는 경찰관의 총기 탈취를 목적으로, 가미아카쓰카 파출소를 습격했다.

납치범 3명은 고무호스가 포함된 납 파이프, 공작용 칼, 송곳을 무기로 파출소 대기실에 침입한다. 이때 범인 중 한 명인 시바노는 안에 있던 다른 경장과 부딪쳤다. 시바노가 권총이 들어있는 보관함에 손을 뻗자 경장은 시바노를 밀어내었고, 여전히 칼을 든 채 다가오는 시바노에게 권총을 2발 발사한다. 또한, 경장은 순경에게 올라타 흉기를 휘두르는 나머지 두 명에게 다리를 노리며 총 3발을 발사한다. 

이 사건으로 시바노 하루히코가 사망, 다른 2명도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때 순경의 권총에서도 총알이 1발 발사됐으나 본인이 쏜 자각은 없었고 몸싸움 중에 저절로 격발된 것으로 보인다.

경찰관의 총기 탈취에 실패한 혁명 좌파는 파출소 대신 총포사로 총기 탈취 목표물을 변경, 이듬해 2월 [모카 총포사 습격 사건][각주:2]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사건을 다룬 아사히 신문기사>


[이모저모]

시바노를 사살한 경장은 전년도 5월 14일에도 해당 파출소에서 근무 중, 길 안내를 찾아온 남자에게 갑자기 칼로 공격당한다. 이 때는 경찰봉으로 제압했으나 왼손에 부상을 당한다.


 혁명 좌파 옥외 지도부는 호송차 습격에 대해서 가와시마의 확실한 탈환을 위해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중요한 총기 탈취를 위한 파출소 습격에 대해서는 낙관하면서 계획다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파출소 습격은 결행했다고 한다.


 사건 후에는 사망한 시바노의 기일인 18일 전후에 경찰서, 파출소, 독신 기숙사 등 경찰 기관에 대한 폭파 테러가 반복됐고, 신좌익 과격파는 시바노 사살에 대해 보복을 한다. 이러한 테러를 통해서 1972년 2월에 있던 아사마 산장 사건[각주:3]에서 경찰이 범인들을 사살하지 않고 전원 생포할 방침으로 취한 원인이 되었다.


 사건 후 진행된 경찰청 기자회견에서 당시 경무과장이 [경찰관의 권총 사용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고, 뒤늦게 회견장에 나타난 당시 경무부장에게 기자는 [경무과장이 강경한 발언을 하고 있는데 그걸로 괜찮은가요?]라고 묻자 [경무과장 말대로 경찰관의 권총 사용은 정당하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당일 석간에 경무부장의 담화로 게재되면서 이에 분노한 과격파 그룹이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971년 12월 18일 경무부장의 자택에 폭탄이 든 소포를 발송, 경무부장의 부인이 폭발로 사망하였고 13살 4남이 중상을 당한다.


 게이힌 안보공동투쟁은 적군파[각주:4]와 통합을 하면서 연합적군[각주:5]으로써 산속 기지에서 1971년 12월 28일 이 사건에 불참한 멤버에 대한 총괄로서 사건을 재현, 경찰관 역을 맡은 사카구치 히로시(坂口弘)와의 격투 훈련을 벌였다. 

훈련 종료 후, 얼굴 구타에 의한 코피와 부러진 이빨 때문에 호흡이 어려워져 주위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멤버가 연합적군 간부로부터 [사람을 부려 먹는 듯한 그런 신경으론 혁명전사일 수 없다]라고 문제시되어 기둥에 묶인 채 폭행을 당하며 산악 베이스 사건[각주:6]의 최초 희생자가 되었다.


 훗날 혁명 좌파 지도자인 가와시마 츠요시는 자신이 옥외 지도부에 대해 자신의 탈환을 지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가와시마는 면회 온 멤버에 대해 탈환을 시사하는 언동을 반복하고 있었고, 또 옥외 지도부에 대해 탈환을 지시하는 암호문도 보냈다. 

단, 옥외 지도부는 암호 해독을 하지 못했으며 애초 옥중에서 암호를 보내는 것은 엄연히 금지되어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대로 보내졌다.




  1. 일본공산당(혁명 좌파) 가나가와현 위원회 [본문으로]
  2. 真岡銃砲店襲撃事件: 1971년 2월 17일 오전 2시 반경, 전보 배달을 가장해, 혁명 좌파 6명의 남성이 난입하면서 총포상 일가족 4명을 묶고 엽총 10정 (산탄총 9, 소총 1), 공기총 1정, 실탄 2,300여 발을 강탈한 사건. [본문으로]
  3. 浅間山荘事件: 1972년 2월 19일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 군 가루이자와 정에 있는 가와이 악기 소유의 사원용 휴양 시설인 아사마 산장에서 일본 적군의 일부 세력인 연합 적군이 일으킨 사건. [본문으로]
  4. 日本赤軍: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1969년 조직된 일본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였다. [본문으로]
  5. 連合赤軍: 1971년부터 1972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신좌파 테러조직이다. [본문으로]
  6. 山岳ベース事件: 1971년 ~ 1972년 걸쳐 적군파 게릴라인 연합 적군이 일으킨 집단 폭행 살인 사건으로 12명이 희생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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