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R 우에쓰 본선 탈선 사고(JR羽越本線脱線事故)는 2005년 12월 25일 우에쓰 본선 기타아마루메역(北余目駅)과 사고시역(砂越駅) 사이 구간에서 폭설로 발생한 열차 탈선 사고이다.
[사고 개요]
- 2005년 12월 25일 19시 14분경, 야마가타현 히가시타가와군 쇼나이정 에노키의 동일본 여객철도(JR동일본) 우에쓰 본선 키타아마루메역과 모래 사고시역 사이에 있는 제2 모가미가와(第2最上川) 교량 근처에서 아키타 발 니가타 행 상행 특급 [이나호 14호(いなほ14号, 열차 번호: 2014M-485계 3000번대 6량 편성·니가타 차량센터 소속 R24편성)]가 교량 통과 직후 가장 가벼운 2량째부터 탈선을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모든 차량이 탈선한다.
그 중 3량이 전복되면서 선두 차량이 선로 옆 농장(養豚・山形和牛肥育畜舎, 양돈·야마가타 와규 비육 축사) 공동 단지 내 양돈 퇴비사에 격돌하며 대파했다. 탈선 시 운행 속도는 기관사의 증언 등으로 보아 약 100km/h으로 보였고 이 사고로 선두 차량에 타고 있던 5명이 사망, 3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가 발생했던 2005년 12월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방에서는 예년과 비교해도 심한 눈보라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또, 발생 당일 18시에는 사카타 시에서 [천둥]이 관측되면서 대기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발생 당시에는 대설·파랑경보가 발표되었지만, 전선을 동반한 온대저기압의 구간에 들어가 있어 횡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돌풍이며(현장 주변 주민으로부터 '지금까지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는 증언이 나와 있다), 산이나 바닷가에서 모래가 씻기거나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성해 놓은 삼림인 방사림의 곰솔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나 목격 정보 등을 통해 원인은 국지적으로 발생한 매우 강한 하강기류인 하향격풍 혹은 토네이도에 휩쓸려 전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고 당일, 모가미강 하구 남쪽에서 사고 현장까지의 일직선상의 비닐하우스 붕괴 및 국도 제7호선 가의 눈을 막기 위하여 둘러친 울타리 방설책에 장착되어 있던 105kg 철판이 날아가 버려 편의점의 처마를 파괴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1
사고로부터 2년 후인 2007년 12월 21일 야마가타현 쇼나이 경찰서에 설치되었던 해당 사고 수사본부는 위촉 전문 기관 감정 결과, 돌풍의 원인을 [토네이도로 보인다]고 발표한다.
사고 후, 야마가타현 경찰이 도쿄 도내의 대학 연구실에 의뢰한 풍동 실험 결과, 해당 열차는 풍속 40m 이상의 돌풍에 습격당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사고 당일 기상청 사카타 측후소가 관측한 최대 순간 풍속은 21.6m, 현장 근처에 JR이 설치한 풍속계의 수치도 20m 정도로 극히 좁은 범위를 이동한 돌풍에 대해 관리 측에서 이상을 감지할 수 없었다.
[사고 배경과 책임]
-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항공·철도 사고 조사위원회의 조사가 계속되었고 2008년 4월 2일 보고서가 공표되었다. 우선 탈선 원인으로 상기한 대로 순간 풍속 40m 정도의 국지적인 돌풍으로 차량이 기울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예견은 거의 불가능해 사고는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향후 대책으로 기상청과 철도 사업자, 행정 등의 제휴나 관측망 강화로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소견 또한 밝혔다. 이 밖에 당시의 상황이나 관계자의 증언 등을 통해 이하의 사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 기관사 과실 여부
- 이 열차에는 기관사(당시 29세)와 차장(당시 26세) 2명이 승무하고 있었다. 사고 발생 당일 사고 열차는 아키타역 발차 시점에서 1시간 1분 지연을 빚고 있었으나 도중에 바람이 강한 구간에선 운전 지령원의 지시에 따라 25km/h에서 진행하는 등 안전 확보를 위한 조처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사고 직전인 사카타역 발차 시점에서의 지연은 1시간 8분으로 확대되었다. 사고 발생 시에도 통상 120km/h로 주행하는 곳을 운전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100~105km/h로 감속하며 운행했던 것이 사고 후 조사에서 판명되어 있다. 무리한 정시운행이나 회복운행 감행 등 안전성을 무시한 무모한 운행을 시행한 흔적은 없었다.
사고 발생 후 운전사는 곧 열차 무선으로 니가타 지사의 수송 지령에 탈선 사고의 발생을 전하며 구조 요청을 하였고, 차장과 둘이서 구조대 도착까지 구조 작업을 벌였다. 소방대원이 도착했을 때,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저보다 먼저 손님 구조를 부탁드립니다]라며 구조 작업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사고 발생 반년 후인 2006년 6월 25일 자 아사히 신문 야마가타현판 31면에 실린 검증 기사에 의하면, 우에쓰 본선에서 운전 경력 20년의 베테랑 기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돌풍이 원인이었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라며, [만약에 당시 29세인 운전사 말고 내가 운전하고 있었다고 해도 사고를 막지 못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고는 운전기사의 경험이나 능력의 범주를 뛰어넘는 돌풍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마이니치 신문은 2005년 12월 27일 사설에서 [이 노선을 몇 번이나 운전하는 운전사라면,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사고의 원인은 [돌풍이 아니라 운전사의 경험 부족에 의한 인재]라고 하며, [무모한 운행을 감행했다]라는 의견으로 JR동일본의 운행 관리 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현실은 고속 주행 중 운전사에게 그러한 판단은 곤란하였고 사설 게재 후 마이니치 신문에 비난이 쇄도하자 올라온 지 약 2개월 후인 2006년 2월 7일 마이니치 신문이 [검증 기사에서 과학적 견해를 무시한 감정에 치우친 지나친 비판이 있었다]라고 인정했다. 그때, 마이니치 신문의 지면에는 외부인에 의해 구성되는 [열린신문] 위원회에서 위원들의 사설에 대한 발언을 사과 기사 대신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위원들의 발언으로 사설에 대한 비판의견이 실려 있었으나 [사설은 학술논문이 아니다. 기자의 감정이 고조되고 우려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 사설에 냉정함만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의견도 실어 자사를 옹호하고 있다며 욕만 더 먹었다.
2. 운행관리체제와 설비 문제
- 도호쿠 지방 도카이 연안 지역은 겨울만 되면 자주 폭설 경보가 발표되었고, 당시에도 해당 경보가 발효되면서 대규모 한랭전선과 통칭 [폭탄 저기압] 발생이 예측되었다. 실시간 기상 레이더에는 한랭전선 전연 인근에 집중되었고, 통상적인 겨울 적란운의 2배 이상 고도에 이르는 대규모 적란운이 사고 현장에 관측되면서 극심한 천둥을 동반한 눈폭풍이었지만, 이 정보가 철도 측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고 당시 니가타 지사 지령실에 설치된 기상청으로부터 경보·주의보 등의 기상 정보를 수신하기 위한 팩스가 며칠 전부터 고장이 난 채로 되어 있었고, 당연히 그런 정보를 수신할 수 있는 상태에 아니었음이 후에 밝혀졌다. 경보가 발표되어도 해당 노선을 운행해야 할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운행 보류 등의 조치를 마련하지 않고 운행을 계속한 점에서 JR측에 일정한 책임을 묻는 일도 도의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상 정보 활용법의 구체적 연구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 기상청도 일단 [기상 정보 공유]를 JR동일본에게 제안하였으나 사고 시점에서 기상 정보도, 이에 기초한 감속·억제 규준도 없었다.
사고 전날인 12월 24일 아키타 지사 관내에서 수송지령의 운행 오판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운행 사고가 발생한 것이 해당 사고를 당한 승객에 의해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다. 터널 출구에 눈덩이가 발생하였음을 수송지령에 전달되지 않았고, 선행 특급이 문제없이 통과되었다는 이유로 운행을 지령하였고 그 결과, 열차가 터널 출구에서 꼼짝 못 하고 말았다고 한다.
수송지령이 판단한 선행 특급은 전날 중간에 운행을 중단했으며 해당 구간을 운행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해당 열차 운전기사는 대향열차 기사로부터 [눈덩이가 있다]라는 정보를 듣고 터널 출구 바로 앞에서 감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선 등의 사태를 모면했다.
또 사고 현장이 된 제2 모가미가와 교량 부근에는 산인선 아마루베 철교 열차 전락 사고로 문제가 되었던 패들형 풍차형의 풍속계를 사용했다. 2그리고 기존 역장의 눈대중으로 풍속 20m 이상으로 인정된 경우, 수송 지령원에 보고할 의무 규정이 있었으나 풍속계로 자동 방재 시스템 등의 정비를 이유로 2002년 3월 폐지된 상태였다.
2009년 12월 21일 야마가타 현경은 당시 JR동일본 니가타 지사의 수송과 지령실장 등 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지만, 2010년 3월 19일 야마가타 지검은 돌풍의 예측은 불가능했다고 판단해 불기소 처분한다. 참고로 JR동일본은 유족과 부상자 전원과 합의가 이뤄졌음을 2017년에 밝힌 바 있다.
[구조활동]
1. 야마가타 현립 일본해 병원(山形県立日本海病院)
- 이 사고는 야마가타현 사카타시 야마가타 현립 일본해 병원의 대응이 빨랐다. 일본해 병원은 마침 그해 12월 3일 전쟁을 가정한 대처 훈련을 마친 상태였으며, 이 훈련이 보름 후에 발생한 사고 현장에서 도움이 되었다. 일본해 병원은 사고 발생의 소식을 받자 신속하게 응급 의료 센터의 센터장과 간호사로 구성된 의료진을 사고 현장에 급파했다.
21시 전, 현장에 도착하면서 구조대와 함께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좁은 구조 현장에 들어가 부상자에게 응급치료하였고, 구조대에 대한 의학적인 조언을 했다. 이로 인해 크러시 증후군 등을 막을 수 있었고, 사망자 증가 및 구조자의 후유증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3일본해 병원 내에서도 전체 의사를 긴급 소집하며 구조자가 도착할 때까지 초동은 신속하게 준비했다.
쇼나이 아마루메 병원(庄内余目病院) 등 구조자가 이송된 다른 병원도 구급대원과 병원과의 대화·연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구급대원과 의사와의 연계도 면밀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2. 소방·경찰 등
- 사고 발생 직후부터 현지 사카타 지구 소방 조합을 주로 야마가타 현 쇼나이 지방, 모가미 지방, 무라야마 지방, 니시 무라야마, 야마가타시 소방 본부의 특별 구조대 등이 야마가타현 소방 광역 지원부대로 출동하였고 야마가타현 경찰도 기동대가 출동하면서 각 기관이 협력하는 신속한 구조 활동을 펼쳤다.
다음날 26일 오후부터는 야마가타현 소방 광역 지원부대와 오키타마 지방 소방 본부나 야마가타현 소방 방재 항공대도 동참하면서 야마가타 현내 14개 소방 본부에서 각종 부대가 총동원된다. 야마가타 현경의 요청으로 미야기현 경찰 기동대도 28일 이후부터 활동을 펼쳤다.
3. 기타
- 승객이었던 니가타현 미쓰케시 소방본부 소방관이나, JR동일본 니가타 지사 사원이 허리나 등에 전치 수개월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구조 활동을 시행하였고,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면서 독려하고 있었다.
당초 승객의 목격 정보로부터, 아키타현 내에 거주하는 모자 2명이 차 안에 갇혔다고 보도되고 있었지만, 그 모자는 사고 현장에서 70km 이상 앞인 우고혼조역에서 하차한 것이 며칠 후에 판명, 해프닝으로 끝났다.
[복구활동과 여파, 그 후 대책]
1. 복구 활동
- 이 사고로 인해 사카타~쓰루오카 구간이 한때 통행 불가 상태가 되었다. 이 구간은 일본해 쥬칸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 침대차 특급인 [아케보노(あけぼの)]. [일본해(日本海)],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トワイライトエクスプレス)]가 전 구간 운행을 멈췄다. 화물 열차도 일부 구간 운행정지와 도호쿠 본선, 도카이도 본선 경유로 수송 루트가 변경되는 것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이 발생했다. 주간 특급열차, 보통열차도 일부 구간에서 버스 대행수송으로 대신했으며 리쿠우사이선(陸羽西線) 직통열차는 해당 선 내에서만 운행되었다.
현장 주변의 폭설로 피해자 수색과 사고 차량의 철거는 해를 넘긴 2006년 1월 1일까지 걸렸고, 거기에 맞추어 복구공사까지 완료하면서 1월 19일부터 운행이 재개되었다. 다만, 사고 현장 부근은 잠시동안 45km/h 이하로 서행 운행을 시행하였고 2006년 11월 30일 사고 현장 안팎 2.3km 구간에 걸쳐 방풍 울타리 설치 공사가 완료되면서 그 후엔 평상운행으로 돌아갔다.
사고 차량은 대파되었지만, 수사 자료로 경찰로부터 증거물건의 보전명령이 내려져 있었고, 수사가 종료되자 전체 차량은 2007년 3월 31일 폐차가 되었다. 또한 차량 보충으로 아오모리 차량 센터에서 니가타 차량 센터에 2006년도 중에 동형 열차 4량이 전속하고 있다.
2. 교통수단에서의 강풍 대책 강화
- 기상청에서는 일반 기상레이더를 개조하는 형태로 도플러 레이더의 정비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나리타 국제공항 등 전국 8개 공항과 지바현 카시와시에만 설치된 도플러 레이더 운용을 2006년 12월 니가타 지방 기상대에서 시작하였고, 2007년 2월에는 센다이 관구 기상대, 나고야 지방 기상대에서도 운용을 개시했다. 앞으로도 몇 년에 걸쳐 전국의 기상대에 도플러 레이더를 설치하고, 일반 기상 예보에도 활용할 계획.
이 사고를 통해 JR동일본은 2006년 2월 1일, JR동일본 연구개발센터 내에 [방재 연구소]를 설립, 이어서 2007년 1월 29일에는 아마루메역 옥상에 1억 엔을 들여서 JR그룹과 철도 사업자로는 처음인 도플러 레이더(탐지 가능 거리 약 30km)을 설치하면서 그해 3월부터 운용을 시작했다. 이 사고 대책으로 JR동일본이 계상한 대책 비용은 방풍 울타리나 도플러 레이더의 설치 공사를 포함하면 100억 엔(1063억 원)을 넘는다.
사고를 일으킨 돌풍에 대한 대책으로서, 기상청 기상 연구소는 JR동일본 철도 종합 기술 연구소 등과 공동으로 2007년 7월부터 3년 계획으로 사고 현장 주변의 쇼나이 지역에서 돌풍 탐지 시스템의 개발을 향한 관측을 시행했다. 이 연구는 상기한 아마루메역의 도플러 레이더와 쇼나이 공항의 도플러 레이더, 약 25곳의 지상 기상 관측점 등에서 얻어진 데이터를 분석 및 시뮬레이션하며 돌풍이 발생한 자세한 메커니즘을 밝혀, 현재는 불가능한 돌풍 탐지의 실현을 목표로 하며 장래에는 돌풍 탐지 시스템으로서 실용화함으로써 철도의 안전 운행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해 12월에는 사카타 시내와 사카타시 앞바다의 일본 해상에서 돌풍의 원인이 되는 구름의 소용돌이가 발생, 소멸하기까지의 이동 경로와 크기, 풍속 변화에 대해서 연속으로 정밀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2016년 7월 하순부터 야마가타현 사카타시 내에 돌풍 탐지 기상 이상을 목적으로 한 도플러 레이더가 신규 착공, 2017년 3월 27일에 관측을 시작한다. 그리고 도플러 레이더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돌풍에 대한 운전 규제를 우에츠 본선 [이라가와역~메가역], 리쿠우사이선 [아마루메역~기요카와역] 사이에 2017년 12월 19일 10시부터 실시할 것을 JR동일본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사고로 JR동일본은 풍속 규제를 강화, 초속 30m 시 운행이 중단되는 규제 한도를 초속 25m로 강화했다. 이 규제 강화로 강풍·돌풍에 의한 큰 사고는 일어나기 어려워진 반면, 다른 사철 각 선보다 기준이 엄격해졌기 때문에 JR선은 일제히 운행을 정지하고 있을 때 다른 사철 각선은 통상 운행하고 있는 상황이 여러 번 발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운행중단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사철 각선으로 승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역 구내가 혼잡해져, 홈 상에 승객이 넘쳐 위험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전선에서 운행이 중지되는 일도 발생했다.
[사죄·추도 등]
- JR동일본에서는 사고 후 2010년 8월경까지 회사 공식사이트 톱 페이지에서 [사죄]나 [대책 실시 상황]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2014년 1월 중순까지 톱 페이지에 [우에쓰 본선 열차 사고에 대해서]라는 이름의 버튼을 만들었다.
2019년 현재, 2014년 1월 하순 홈페이지 개장으로 톱 페이지에서 사고 기사의 직접 페이지 링크는 사라졌고, 우에쓰 본선 열차 사고에 대해서 링크는 [중요한 공지:JR동일본]으로 대신하고 있다.
2006년 사고 현장에 상단 사진으로 보이듯이 위령비가 설치되었고, 그 뒤에도 사고가 발생한 날마다 현지에서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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