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에 참가한 아르헨티나의 구축함 트리니다드 호(MercoPress)>
3월 28일, 아르헨티나군 침공 부대가 출항했다. 애초 계획에서는 3월 31일에서 4월 1일 사이의 야간에 맞춰서 기습적으로 상륙할 예정이었는데 악천후 때문에 24시간 연기되었다.
4월 1일, 포클랜드 제도의 총독인 '렉스 헌트(Sir Rex Hunt: 1926~2012)'경은 아르헨티나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본국에 통보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측은 이미 전술적으로 기습이 성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4월 1일 21:30(UTC-4시간, 이하[Q]로 표기)분, 미사일 구축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ARA Santísima Trinidad)'와 특수 작전 상륙 중대 92명이 고무 보트 21척에 탑승, 출발했다. 이들 부대는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길예르모 산체스 사바로츠(Guillermo Sánchez Sabarots: 현재생존)'소령이 이끄는 76명은 영국 해병대 병사를, '페드로 히아치노(Pedro Edgardo Giachino: 1947~1982.4.2)'소령이 이끄는 16명의 두번째 부대는 총독 공관을 향했다.
한편, 영국 측은 정박 중인 민간 선박의 항해용 레이더로 항구를 감시했고 2일 0230Q, 이들은 아르헨티나 함정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 감시 초소에서도 보고가 잇따르면서 0430Q에 헌트 총독은 긴급 사태를 선언한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총독으로 아르헨티나군에게 맞섰던 렉스 헌트 경>
애초, 아르헨티나 측의 계획에 의하면 영국 해병대가 막사에서 취침 중인 것을 노려서 사상자를 내지 않고 제압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바로츠 소령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최루탄을 투척했지만, 실제로 영국 해병대는 이미 아르헨티나군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전원이 전투 배치를 한 상태라 효과는 전혀 없었다.
한편, 히아치노 소령의 부대는 급하게 하달받은 작전이라서 총독 공관에 관한 정보가 없던 상태였다. 소령은 4명의 부하를 데리고 항복 권고를 하기 위해 총독의 관저를 찾아갔지만, 그들은 총독이 아닌 집사의 처소에 들어갔다. 한편 공관에서는 해병대원 31명과 수병 11명, 예비역 해병대원 1명이 자동 소총을 가지고 있었고, 총독 전용 운전기사가 엽총을, 총독 본인도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실수를 깨닫고 나온 히아치노 소령 일행에게 총탄이 날아들었고, 히아치노 소령은 이 공격후, 섬에 있던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 외에도 아르헨 군인 1명이 부상하고 부대 전원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렉스 총독에게 항복을 권고하러 관저로 찾아갔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바로츠 소령>
한편 아르헨티나군 본대에서는 우선 0430Q에 잠수함 산타페에서 수중 잠수 요원들이 출격하고 정찰을 하는 동시에, 수륙양용차를 위한 유도등을 설치했다. 이어서 0600Q, 전차 상륙함 '카보 산 안토니오(ARA cabo san antonio)'함에서 LVTP-7 병력 수송 장갑차 및 LARC-5 화물차에 나눠탄 해병대 제2보병 대대가 출격하고, 유도에 따라서 암초를 우회한 뒤 무사히 상륙했다. 이들은 상륙하면서 우선 스탠리 공항을 확보했고, 영국 측이 활주로에 설치한 장애물을 철거한 후 스탠리 시가지로 향하여 전진했다.
0715Q, 영국 해병대 소부대의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양측 모두 전사자는 없었고 0800Q에는 시가지를 장악했다. 이미 해병대 포병 부대와 예비부대도 상륙했으며 스탠리 공항에는 육군 부대를 추가로 실은 항공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측이 보유하고 있는 시설은 총독 공관에 불과해서 헌트 총독은 시민과 군인의 불필요한 손실을 주지 않기 위해 항전을 피하고 아르헨티나 측과 협상하기로 했다. 그리고 0925Q에 무장 해제가 내려지고, 포클랜드 제도에서의 전투는 아르헨티나의 압도적 우세로 일단 멈추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마가렛 대처(1925~2013)총리는 단호하게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중앙일보)>
3월 31일, 마가렛 대처 총리는 허미즈와 인빈시블 2척의 경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제3코만도여단을 동반한 기동 부대 편성을 명했으며, 4월 1일 밤에 가졌던 국무 회의에서 기동 부대를 포클랜드에 파견하기로 한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해서 대처가 이미 임무 부대 파견 준비를 갖춘 것에 대해서 여론은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야당은 강하게 추궁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외무부 장관, 국무장관과 차관은 사임이 불가피했고, 4월 6일에 대처는 영국의 전통에 근거하여 전시 내각을 설치했고 대처와 몇 명의 각료로 의사 결정을 할 제도를 갖춘다.
이렇게 부대를 파견하긴 했지만, 영국의 무력사용에 의한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고, 포클랜드 제도로의 군부대 파견을 통한 아르헨티나에 가해질 압박과 경제제재로 아르헨티나가 전면적으로 굴복하거나, 유엔과 미국의 조정을 기대했다. 게다가 대처 총리는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전쟁: 1956년 10월 ~ 1957년 3월에 있던 사건으로 여기서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권리도 잃고, 미국에게 서방세계의 패권을 내주었음을 세계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다)의 교훈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국제법을 무시한 무력행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선 이들의 대응을 주시한다.
<제2차 중동전쟁 때 영국(+프랑스)은 이스라엘을 앞세워서 멋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소련) 및 UN에게 소위, 탈탈 털린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위키)>
그러나 유엔은 원래 평화주의와 반(反)식민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여 영국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국으로서는 자위권 발동을 주장하기도 어려웠는데, 포클랜드 총독부는 이미 항복하고 전투는 일단 종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4월 3일에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결의 제502호가 나왔고,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일대에서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게 다였다.
영국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제재에 대해서도 검토를 시행, 4월 2일에는 영국 내의 아르헨티나 자산을 동결하는데 그 액수는 15억 달러에 달했다. 다만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식량, 에너지 분야에서는 자급에 가까웠기 때문에 단기적인 영향은 미미했고 장기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연계가 필요했다. 대표적으로 유럽, 영연방 국가, 그리고 일본이었는데 그중 일본은 외교적으로 영국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 무기 금수, 아르헨티나 물건에 대한 수입 부분 중단, 아르헨티나 신규 대출 금지 등을 포함한 아르헨티나 경제제재에 동의는 했지만 영 미적지근했다(참고로 한국은 영국을 지지).
<영국이 무력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국제연합의 동의(최소한 암묵)가 필요한 상황이었다(Pukmedia.com)>
이와 동시에, 미국의 '알렉산더 헤이그(1924~2010)' 국무장관과 영국의 '프란시스 핌(1922~2008)' 외상의 셔틀 외교에 의해 사태의 해결이 모색되었다. 미국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반공(反共)'과 뜻을 같이하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대립을 계속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 적극적으로 조정을 시도했다.
헤이그 국무장관의 기본 구상은 우선 아르헨티나가 철군하고, 영국도 군부대를 파견하지 않는 양측의 양보였다. 4월 12일에는 런던을 방문해서 이 구상에 따른 제안을 했다. 영국도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정작 아르헨티나는 주권 이양을 촉구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헤이그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 후에도 헤이그 장관은 몇 번의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국 4월 27일에 아르헨티나 군사 평의회는 헤이그의 조정안을 거절하고 이틀 만에 이 사실을 헤이그 측에 전달한다. 이에 대해서 헤이그는 '만약 전투가 발발하면 미국은 영국을 지지하겠다'며 영국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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