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2일> 1982년 4월 2일 - 포클랜드 전쟁 발발 (3부)

!@#^& 2019. 4. 5. 03:10

<포클랜드 전쟁에 참가한 아르헨티나의 구축함 트리니다드 호(MercoPress)>

3월 28일, 아르헨티나군 침공 부대출항했다. 애초 계획에서는 3월 31일에서 4월 1일 사이의 야간에 맞춰서 기습적으로 상륙예정이었는데 악천후 때문에 24시간 연기되었다. 

4월 1일, 포클랜드 제도총독'렉스 헌트(Sir Rex Hunt: 1926~2012)'아르헨티나침공임박했음을 본국통보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측은 이미 전술적으로 기습성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4월 1일 21:30(UTC-4시간, 이하[Q]로 표기)분, 미사일 구축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ARA Santísima Trinidad)'와 특수 작전 상륙 중대 92명고무 보트 21척에 탑승, 출발했다. 이들 부대는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길예르모 산체스 사바로츠(Guillermo Sánchez Sabarots: 현재생존)'소령이 이끄는 76명영국 해병대 병사를, '페드로 히아치노(Pedro Edgardo Giachino: 1947~1982.4.2)'소령이 이끄는 16명의 두번째 부대총독 공관을 향했다. 

한편, 영국 측정박 중민간 선박항해용 레이더항구감시했고 2일 0230Q, 이들은 아르헨티나 함정움직임파악하고 있었다. 또 감시 초소에서도 보고가 잇따르면서 0430Q에 헌트 총독긴급 사태선언한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총독으로 아르헨티나군에게 맞섰던 렉스 헌트 경>

애초, 아르헨티나 측계획에 의하면 영국 해병대막사에서 취침 중인 것을 노려서 사상자내지 않고 제압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바로츠 소령이것염두에 두고 최루탄투척했지만, 실제로 영국 해병대는 이미 아르헨티나군움직임파악해서 전원전투 배치를 한 상태라 효과는 전혀 없었다

한편, 히아치노 소령부대급하게 하달받은 작전이라서 총독 공관에 관한 정보없던 상태였다. 소령4명의 부하를 데리고 항복 권고를 하기 위해 총독관저를 찾아갔지만, 그들은 총독이 아닌 집사처소에 들어갔다. 한편 공관에서는 해병대원 31명수병 11명, 예비역 해병대원 1명자동 소총을 가지고 있었고, 총독 전용 운전기사엽총을, 총독 본인권총소지하고 있었다. 

실수를 깨닫고 나온 히아치노 소령 일행에게 총탄이 날아들었고, 히아치노 소령은 이 공격후, 섬에 있던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 외에도 아르헨 군인 1명부상하고 부대 전원 영국군포로가 되었다.

<렉스 총독에게 항복을 권고하러 관저로 찾아갔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바로츠 소령>

한편 아르헨티나군 본대에서는 우선 0430Q에 잠수함 산타페에서 수중 잠수 요원들이 출격하고 정찰을 하는 동시에, 수륙양용차를 위한 유도등설치했다. 이어서 0600Q, 전차 상륙함 '카보 산 안토니오(ARA cabo san antonio)'함에서 LVTP-7 병력 수송 장갑차LARC-5 화물차에 나눠탄 해병대 제2보병 대대출격하고, 유도에 따라서 암초우회한 뒤 무사히 상륙했다. 이들은 상륙하면서 우선 스탠리 공항확보했고, 영국 측이 활주로설치장애물철거한 후 스탠리 시가지로 향하여 전진했다.

0715Q, 영국 해병대 소부대공격이 이루어졌지만 양측 모두 전사자없었고 0800Q에는 시가지장악했다. 이미 해병대 포병 부대예비부대상륙했으며 스탠리 공항에는 육군 부대추가로 실은 항공기착륙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측보유하고 있는 시설총독 공관불과해서 헌트 총독시민군인 불필요한 손실주지 않기 위해 항전을 피하고 아르헨티나 측협상하기로 했다. 그리고 0925Q무장 해제가 내려지고, 포클랜드 제도에서의 전투아르헨티나압도적 우세로 일단 멈추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마가렛 대처(1925~2013)총리는 단호하게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중앙일보)>

3월 31일, 마가렛 대처 총리허미즈인빈시블 2척경항공모함중심으로 제3코만도여단동반기동 부대 편성명했으며, 4월 1일 에 가졌던 국무 회의에서 기동 부대포클랜드파견하기로 한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해서 대처가 이미 임무 부대 파견 준비를 갖춘 것에 대해서 여론은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나, 그것과는 별개아르헨티나의 침공사전막지 못한 에 대해서 야당은 강하게 추궁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외무부 장관, 국무장관차관사임불가피했고, 4월 6일대처영국전통근거하여 전시 내각설치했고 대처와 몇 명의 각료의사 결정을 할 제도를 갖춘다. 

이렇게 부대파견하긴 했지만, 영국의 무력사용에 의한 방법최후의 수단으로 여겼고, 포클랜드 제도로의 군부대 파견을 통한 아르헨티나에 가해질 압박경제제재 아르헨티나가 전면적으로 굴복하거나, 유엔미국조정기대했다. 게다가 대처 총리는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전쟁: 1956년 10월 ~ 1957년 3월에 있던 사건으로 여기서 영국수에즈 운하에 대한 권리잃고, 미국에게 서방세계패권내주었음세계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다)의 교훈 바탕으로, 미국이나 국제법무시무력행사있을 수 없다생각하며 우선 이들대응주시한다.

<제2차 중동전쟁 때 영국(+프랑스)은 이스라엘을 앞세워서 멋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소련) 및 UN에게 소위, 탈탈 털린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위키)>

그러나 유엔은 원래 평화주의반(反)식민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여 영국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국으로서는 자위권 발동주장하기도 어려웠는데, 포클랜드 총독부이미 항복하고 전투 일단 종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4월 3일에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결의 제502호가 나왔고,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제도 일대에서 철수요구했으나 이게 다였다.

영국에서는 아르헨티나경제 제재에 대해서도 검토를 시행, 4월 2일에는 영국 아르헨티나 자산동결하는데 그 액수는 15억 달러에 달했다. 다만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식량, 에너지 분야에서는 자급가까웠기 때문단기적인 영향미미했고 장기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연계필요했다. 대표적으로 유럽, 영연방 국가, 그리고 일본이었는데 그중 일본외교적으로 영국지지하고 아르헨티나 무기 금수, 아르헨티나 물건에 대한 수입 부분 중단, 아르헨티나 신규 대출 금지 등을 포함한 아르헨티나 경제제재동의는 했지만 영 미적지근했다(참고로 한국영국지지). 

<영국이 무력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국제연합의 동의(최소한 암묵)가 필요한 상황이었다(Pukmedia.com)>

이와 동시에, 미국의 '알렉산더 헤이그(1924~2010)' 국무장관영국의 '프란시스 핌(1922~2008)' 외상셔틀 외교에 의해 사태의 해결모색되었다. 미국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반공(反共)'과 같이하는 영국아르헨티나대립계속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 적극적으로 조정시도했다. 

헤이그 국무장관기본 구상은 우선 아르헨티나철군하고, 영국군부대파견하지 않는 양측의 양보였다. 4월 12일에는 런던방문해서 이 구상에 따른 제안을 했다. 영국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정작 아르헨티나주권 이양촉구하며 한 치물러서지 않으며 헤이그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 후에도 헤이그 장관몇 번조정시도했으나, 결국 4월 27일아르헨티나 군사 평의회헤이그조정안거절하고 이틀 만에 이 사실헤이그 측전달한다. 이에 대해서 헤이그는 '만약 전투가 발발하면 미국영국지지하겠다'며 영국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4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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