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의 센타우르급 항공모함 HMS 허미즈(R12)의 모습 (위키)>
-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Conflict/Crisis)은 대서양의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 말비나스 군도)의 영유를 둘러싸고, 1982년 3월부터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있었던 3개월에 걸친 분쟁이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대체로 '말비나스 전쟁(Guerra de las Malvinas)'로 표기하고 있다.
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 해군 함정이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령 사우스 조지아 섬에 2차례 기항, 무단으로 민간인을 입도 시켰다(일명 사우스 조지아 침공). 영국은 사우스 조지아 섬의 아르헨티나 민간인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리면서 동시에 3월 28일, 미국 연방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군은 미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파견을 결정했다.
4월 2일에는 아르헨티나 정규군이 이 섬에 침공하였고, 4월 25일에는 사우스 조지아 섬에 영국군이 육지에 상륙, 당일 탈환하였다. 애초에 아르헨티나군은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영국 함선을 격침하는 등 우세한 모습을 보였으나, 영국군은 경험이 풍부한 육군 특수부대와 장거리 폭격기 등을 동원한 공습, 더하여 최우방 동맹국인 미국 및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정보전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아르헨티나의 전력을 점차 감소시켰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참여한 영국군의 모습(gunji.blog.jp- 사이트 우측에 위치한 욱일기 주의)
6월 7일에는 포클랜드 제도에 영국군 지상군이 상륙,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이 정식으로 항복하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원래, 최초로 포클랜드 제도를 발견한 사람은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원주민 '야간족'이라고 한다. 이후 유럽인의 발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520년 포르투갈 국적 마젤란 선단의 '에스테반 고메스 호'에 의해서, 혹은 1592년 영국의 탐험가 '존 데이비스'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당연하게도) 아르헨티나는 전자를, 영국은 후자를 주장하고 있다.
이곳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는, 마젤란 해협·비글 해협과 가까우며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 전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18세기, 영유권 분쟁의 주요 무대였다.
<포클랜드 제도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알려진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혼 곶에 거주했던 야간족. 그러나 현재, 순수 혈통의 야간족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핀터레스트)>
1764년 프랑스는 서(西) 포클랜드 섬에 민간인들을 이주시키고 '생 루이항'으로 불렀다(현재의 버클리만). 한편, 영국은 이듬해인 1765년에 존 바이론 함장이 서 포클랜드에 있는 사운더스 섬의 부두에 '에그몬트 항'라고 명명했다.
이후,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1767년에 프랑스로부터 포클랜드 제도를 매각했고 1770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군대를 이끌고 당시 영국이 점유하던 에그몬트 항으로 침공했다. 당시 미국 식민지 상황에 매우 급하게 대처해야 했던 영국은, 전면전을 피하기위해서 1774년에 스페인의 영유권을 일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833년에 영국이 파견한 슬루프(범선의 일종)'클레어 호'에 의해서 무혈입성에 성공, 이후 실효적 지배를 추진함으로써 오랫동안 영국의 해외 영토(속령)로 여겨져 왔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하면서, 스페인 영토를 계승한다는 구실로 포클랜드 제도의 반환을 요구했다(위키)>
1810년, 5월 혁명을 발단으로 한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을 거치면서 1816년 아르헨티나가 독립, 스페인 영토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포클랜드 제도의 반환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아르헨티나는 182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유권 및 과세 선언과 미국 선박의 나포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1825년~1828년에 벌어진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으로 이 제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영국의 비공식 영토로서 남게 되었다.
그 후 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1960년대 아르헨티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의 前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을 지지하던 도시 게릴라와 군부, 정당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했고, 또 페론 정권 시절부터 극도의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그전부터 슬슬 하향세였던 나라의 경제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정치 투쟁이나 일삼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날로 높아져 가는 상황이었다.
<포클랜드 제도는 펭귄을 비롯한 신천옹(알바트로스), 바다사자, 코끼리 물범등 갖가지 야생동물이 터전을 이루고 있다(theplanetsworld)>
이런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관심을 돌리기 위해) 포클랜드 제도 등의 문제를 아르헨티나 정부 차원에서 다루게 되었고, '말비나스 기념일'의 제정을 비롯한 다양한 선전과 공작이 추진되었다. 더하여 1965년 12월 16일에는 국제 연합 총회에서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로 아르헨티나·영국 양측이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도록 권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양국 정부의 협상이 시작된다.
영국에 있어서 포클랜드 문제는 극히, 일부의 정치인과 관료만이 인식하는 문제였다. 당시 영국이 소위 '영국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유지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있었으며, 아르헨티나 측에 매각하려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보수당의 해럴드 정권은 1961년에 포클랜드 제도와 남미 각국과의 항공과 해운을 연결할, 통신 교통 협정 체결을 성사했으나 아르헨티나 측이 포클랜드 주권 문제를 거론하는 바람에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1967년 3월에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주민들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 이양을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아르헨티나 측은 커다란 진전이라며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작 아르헨티나에 귀속되기를 바라는 포클랜드 주민은 전혀 없었고, 영국 측에서도 의회와 언론에서 포클랜드 제도 반환에 반대한다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영국 정부는 한때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 이양을 검토했으나, 정작 제도에 살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로의 편입을 거부했다(metrocount.com)>
1975년, 캘러한 외무장관의 부탁을 받고 리오 틴토社의 중역인 '에드워드 섀클턴' 귀족원 의원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포틀랜드 제도로 파견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의 경제 상황 등을 담은 보고서는 1976년 6월에 제출됐고, 포클랜드 제도의 경제 상황이 절망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과도한 경제적 의존 없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지만,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식민지 시대부터 경제구조가 거의 변화와 발전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였다.
이곳에 5년간 1,400만 파운드(지금으로도 207억의 거금이고 당시 기준으로는 일천억대에 육박하는 비용이다. 참고로 포클랜드 제도 주민 수는 2016년 기준 약 3,400명)라는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고 예상했으나, 당시 경제사정이 어려운 영국으로서 이것은 단독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세간에 공개하고, 아르헨티나로부터 경제적 협조를 촉구하려 했으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오히려 이를 포클랜드 제도가 경제적 자립을 추진하는 것으로 오해해서 양국 간의 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제도의 주민들은 이 보고서에 따라서, 영국 본토의 추가 투자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에 가득 찬 상태였다.
<에드워드 섀클턴 귀족원 의원을 필두로 조사단이 포클랜드 제도로 파견했고, 제도의 경제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음을 파악하였다>
섀클턴 의원이 조사를 추진하던 1976년 2월 4일, 영국의 남극 관측선 '섀클턴(RRS Shackleton)'이 남위 60도선 근처의 아르헨티나 배타적 경제 수역에서 아르헨티나 해군의 경고 사격을 받고, 몇 발이 배로 날아든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2월 19일 영국 국방성은 제도의 방위에 대해서 검토했으나, 당시 이 제도에는 경무장의 쇄빙선 '엔듀어런스(HMS Endurance)'와 해병대원 36명에 불과해서, 아르헨티나 군대의 침공을 저지하기에는 절망적인 수준으로 추산, 만약 실제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으로 변경한다.
같은 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권의 '호르헤 라파엘 비데라' 대통령은 국민 탄압으로 인한 문제를 포클랜드 제도를 통해서 타개하려고 했다. 그래서 영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도발 행동으로, 그해 12월에 50명의 아르헨티나군 부대가 영국령 사우스 조지아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 남단의 무인도에 무단으로 상륙하면서, 아르헨티나 국기를 내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의 합동 정보 위원회(JIC)는 이를 아르헨티나 군사 평의회에서 강경파가 우세하다는 징후로 분석했다.
그 후 1977년 10월, 다시 상륙의 징후가 보이자 당시 캘러한 총리는 원자력 잠수함 '드레드노트'와 순양함 '알라크리티', '포이베' 및 지원 함정을 파견한다(일명, 저니맨 작전: Operation Journeyman). 이와 함께 미국을 거쳐서 비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에 해당 작전을 통보했다.
이 견제는 매우 주효했고, 아르헨티나 군부는 보다 신중한 대응으로 방침을 전환한 반면(소위, 쫄았다) 영국 측은 교전규정 책정 등 군사행동의 시뮬레이트를 진행하면서, '엔듀어런스'도 일시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레이더 탐지기와 감청장비 등을 갖추었다.
<아르헨티나 최악의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1925~2013)(뉴욕타임즈)>
1979년에 취임한 마거릿 대처 총리는 노련한 피터 캐링턴 남작을 외무장관으로 해서, 외무부와 국방부에서는 최근에 있었던 아르헨티나군의 무인도 상륙사건에 대한 대응을 근거로 군부대를 포클랜드 제도에 상주시킨다는 포클랜드 요새화 방안을 검토 중이었으나, 이는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캐링턴 외무장관 및 리들리 국무장관은 명목상의 주권은 아르헨티나 측에 넘겨주고, 그 외의 포클랜드 제도에 관한 건 영국이 빌리는 리스안을 복안으로 삼았다.
1980년 8월 25일에는 이 방안을 리들리 국무장관이 아르헨티나 외교부 차관과 회담하고, 꽤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 그러나 국제 연합 헌장 제1조 제2항의 '인민의 자결 원칙'에 입각, 포클랜드 제도 주민의 선택을 절대 조건으로서 제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국국민'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리들리 장관은 11월 22일에 포클랜드 제도의 스탠리를 방문해서 400명의 시민과 토론을 벌였지만, 주민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때 영국 측은 의회에 통보를 미루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언론이 이를 폭로하는 바람에 의회는 태도를 경직시키고, 이 방안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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