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건을 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Korean axe murder incident,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에 한국과 북한의 군사 분계선 상에 있는 판문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던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하려던 한국군 병사와 한국인 작업자, 주한미군에 대해서 북한군 장병들이 곡괭이, 몽둥이와 도끼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2명의 미국 육군 장교를 살해하고, 몇 명의 한국 병사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하마터면 제2차 한국 전쟁의 도화선이 될뻔한 아찔한 사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동경비구역 내에서도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었고, 남북한 군인들의 접촉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문제의 미루나무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의 모습>
- 이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는 북측이 공동경비구역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 30m에 심은 것으로 사건 당시, 공동경비구역에 놓인 감시초소와 북한군의 감시초소에 둘러싸인 1유엔군 감시초소의 시야를 가로막을 정도로 자란 상태였다. 그래서 유엔군은 북한군에게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시행한다고 통보했으나, 북한군은 [이 미루나무는 김일성 주석께서 손수 심어 키우신 것으로, 현재도 그 지도하에서 생육하고 있다]면서 가지치기를 인정하지 않았다(물론 김일성 어쩌구는 뻥이고).
1976년 8월 18일, 한국군 장교 1명과 미 육군 장교 2명, 한국인 인부와 그들을 호위할 한국군과 미군, 8명의 병사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기 위해서 공동경비구역 내의 미루나무 쪽으로 접근했다. 이때 그들의 행동은 북한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었다. 공동경비구역 규정으로 두 군 모두 무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미군과 한국군은 가지치기에 사용할 톱과 곡괭이, 도끼를 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가지치기가 시작되자, 15명의 북한군 장병들이 접근해서 가지치기 작업의 중단을 요구했으나, 당시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이었던 아서 조지 보니파스(Arthur George Bonifas, 1943~) 대위는 평소에도 북측이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를 무시하고 계속 작업 할 것을 부하에게 명령했다.
북측은 잠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후 증원된 북한군 병사 약 20명이 합류하자,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다. 당시 북한 측 지휘관이던 박철 중위가 한 번 더 작업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까지 무시하자, 갑자기 공격명령을 내려 북한군은 한국군과 미군 장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발포는 없었지만, 북한군이 곡괭이와 몽둥이, 도끼를 빼앗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인 마크 토머스 배럿(Mark Thomas Barrett, 1951년 6월 9일생) 중위를 무참히 살해한다. 한국군 병사들은 트럭에서 북한군 병사를 맞아, 보니파스 대위를 보호했지만,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대위는 치료를 받기 전 숨졌다. 그들이 공격당하고, 살해되는 모습은 제5초소에서 35mm 카메라, 유엔군 제3초소부터는 영화용 카메라로 기록됐다.
<당시 실제 사건이 일어난 모습>
사건 발생 다음 날인 8월 19일부터 북한군과 한국군, 미군 사이에서 회의가 열렸다. 특히 자국 병사가 사망한 미군은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북한군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미루나무를 아예 벌채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유엔군은 미루나무를 벌채할 수 있도록 미국 민담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발령하고, 사건으로부터 3일 후인 8월 21일 오전 7시에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23대의 유엔군(한국 및 미 육군)의 차량이 북한에 대한 경고 없이 공동경비구역에 진입했다. 차량에는 미루나무를 베기 위해서 16명의 미 육군 공병 대원이 도끼와 전기톱을 지닌 채 탑승했고, 30명의 권총과 손도끼로 무장한 호위 부대, 동시에 대한민국 특수부대인 특전사 중에서 태권도 숙련자를 포함한 최정예 인원 64명이 동반했다.
그들의 상공에는 한미 양군의 20대 헬기 및 7대의 AH-1 코브라 공격 헬기가 전개했고, 더욱더 위의 상공에는 미 공군의 F-4 전투기와 한국 공군의 F-5 전투기로 호위한 미 공군의 B-52 폭격기가 비행했다. 오산공군기지에서는 지령이 떨어지는 즉시 출격할 수 있도록 무장과 연료를 보급한 미 공군의 F-111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 앞바다에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비롯한 기동부대까지 전개되었으며 또, 비무장지대 밖에는 대규모의 중장비를 갖춘 대한민국 육군 및 미 육군 보병·포병·장갑차량이 대기하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 및 북한군에게 경고 차원의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 북한군은 자동 소총을 휴대한 150명의 병사를 공동경비구역 내에 파견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이 나무를 베는 42분 동안 쥐 죽은 듯이 지켜만 보았고,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복수로 한국 측 특전사들이 북한군 초소 4개를 닥치는 대로 부수는 동안에도 그냥 조용히 있으면서, 최악의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북한군에 의해 숨진, 보니파스 대위(왼쪽)와 배럿 중위(오른쪽)>
미루나무 제거 작전 당시, 대규모 무력충돌 발생이 우려되었지만, 작전은 평온하게 끝났다. 이 사건으로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 놓였지만, 이후에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사실상 사과를 해서 전면전은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도 당시 베트남 전쟁을 끝낸 지 불과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이러한 일로 전쟁을 벌인다는 건 미국으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 9월 6일까지 두 진영 간에 열린 회의를 거쳐서 북측의 제안으로 공동경비구역 안에도 군사 분계선을 그어서 양측의 인원을 격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 공동경비구역을 경비하는 유엔군 기지는 피살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개명했다.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은 군 복무 당시 특전병으로 도끼 만행사건 당시 미루나무 작전에 참가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실제로는 후방에서 예비조로 대기하였다고 대통령 본인이 사실을 바로 잡기도 했다.
<잘려진 미루나무 잔해(1984년)>
-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계인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공동 경비 구역 서쪽에 흐르는 사천에 위치한다. 1953년 한국휴전협정 체결 후에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는데, 양측의 포로들이 한 번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