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니그노 아키노 2세(Benigno Simeon, Jr., 1932~1983)는 필리핀의 정치가이자 상원 의원, 대통령 국방부 고문, 타를라크 부주지사와 주지사를 지냈으며, 콘셉시온 시장, 필리핀의 자유당 간사장을 지냈다. 애칭이 [니노이]였기 때문에, 니노이 아키노라고 하는 호칭으로 유명했다.
독재체제를 구축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 1917~1989) 대통령 시절, 국민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는 마르코스 정권의 위협으로 국외 추방, 추방 후 미국에 머무르다가 귀국길에 올랐으나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암살됐다. 니노이 사후, 피플 파워 혁명으로 마르코스 정권은 1붕괴하였고, 베니그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 1933~2009)가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한다.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좌측)과 베니그노 아키노(우측)의 모습>
베니그노 아키노는 타를라크주 콘셉시온에서 명문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측근으로 활약했고, 아버지 2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Benigno Aquino Sr., 1894~1947)도 호세 라우렐(José Paciano Laurel, 1891~1959) 정권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었으나 말년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협조한 부역자로 비판을 받았다. 부친 사후 니노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언론인이 되었다.
1954년, 라몬 막사이사이(Ramón Magsaysay y del Fierro: 1907~1957) 대통령 밑에서 일하던 니노이는 반(反)정부 그룹인 후크발라합(Hukbalahap)의 리더 루이스 타루크(Luis Taruc, 1913~2005)를 설득하고 투항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니노이는 4개월 동안 열심히 타루크를 설득한 끝에, 그는 무조건 투항한다. 이러한 활약으로 니노이의 명성은 단숨에 높아지면서, 불과 22세때 콘셉시온시의 시장에 취임하는데, 그해 코라손 코판코(아키노)와 결혼했다.
1961년 타를라크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966년에는 자유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35세의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하면서, 필리핀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 당선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남아있다.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펼치던 니노이 아키노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필리핀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반정부 측 위험인물로 니노이를 꼽으며 [정부 전복 음모와 무기 불법 소지, 살인] 혐의로 체포, 투옥됐다. 그 후 니노이는 1977년에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필리핀 국민에게 엄청난 인기와 신망을 얻고 있는 니노이를 함부로 처형할 수 없었던 마르코스는 1980년에 [미국에서 수술을 받게 한다]라는 명목으로, 니노이를 필리핀에서 추방했다.
당시 수감 중이었던 니노이는 가톨릭 관련, 간디, 마틴 루터 킹의 저서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이후, 니노이는 비폭력주의를 내세우며 마르코스 정권을 비판하게 된다. 마르코스 정권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국민에게는 결코 폭력적인 투쟁을 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니노이의 이런 강한 의지와 신념은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정치인으로서 자세와 태도에 강한 영향을 끼쳤으며, 니노이가 사후 순교자로 칭송받을 기반을 마련한다.
1983년, 니노이는 필리핀 귀국을 결심한다. 경유지인 타이완 타이베이의 호텔에서 일본의 TBS TV [JNN 보도 특집]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내일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사건은 공항에서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고 말하며, 마치 제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듯한 말을 했다.
8월 21일, 필리핀군의 병사들이 엄중히 경계한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니노이는 타이베이 공항에서 타고 온 중화항공의 여객기로 도착했다. 기내에는 니노이 아키노의 귀국을 취재하기 위해서 많은 취재진이 같이 탔으며, TV 카메라 촬영도 있었다. 거기에 3명의 병사가 여객기에 탑승하면서 니노이를 데리러 왔다. 니노이는 같이 나가려던 처남에게 [넌 그대로 앉아있어!]라고 말했다.
니노이는 병사들과 비행기의 트랩에서 내리기 시작한 지 불과 10초 만에 머리에 피격을 당해 즉사했다. 당시 니노이가 말한 최후의 말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동행했던 기자에게 [반드시 무슨 일이 터질 테니, 계속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라]였다.
동행했던 TBS의 요코이 요시오(横井義雄) 촬영기사 및 미국 ABC의 오구시 마사아키 촬영기사는 니노이를 보딩 브릿지 옆의 트랩에 내린 직후의 총성과 비행기 창밖으로 보인 광경, 바닥에 드러누운 아키노와 작업복을 입고 있던 사람의 시신을 카메라에 담아낸 그들은, 비행기의 출입구 부근에서 발이 묶였기 때문에 발포의 순간은 찍지 못했다.
군인과 대동하면서 니노이가 트랩을 내리기 시작했을 때, [쏴! 쏴!]라고 필리핀 병사가 트랩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암살범에게 명한 소리가 TBS의 영상에 남았고, 그 직후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니노이는 저격당하였다. 그 후, 몇몇 병사가 아키노의 왼팔을 끌어올리며 시신을 운반하는 모습도 파악되고 있었다.
사건 후, 필리핀 정부는 아키노 씨가 공항 경비원으로 가장한 남자에 의해 사살됐고 그 자리에서 범인도 사살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니노이를 동행 취재했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와카미야 키요시(若宮清, 1946~)는 연행하던 병사가 니노이를 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독재 체제의 필리핀 정부는 승객들의 목격 증언을 전부 묵살하고, 사건은 필리핀 공산당 산하 게릴라 조직인 신 인민군(New people Army)의 Rolando Galman이라는 인물의 단독 범행으로 발표했다.
<아키노의 장례행렬>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르코스 대통령은 부하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불과 10일 전에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병상에서 뉴스를 접한 마르코스는 사건 다음 날,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사위원회 설치를 지시했다. 조사위원회는 군 고위 인사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을 공모 혐의로 고발했지만, 이들은 곧바로 무죄나 혐의없음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오히려 활주로를 지키던 병사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병사들은 나중에 징역 22년으로 감형받지만, 이것도 정상적인 판결은 아니었다.
8월 31일 열린 니노이의 장례식은 오전 9시에 시작됐지만, 사진에서도 봤듯이 너무 많은 군중이 몰리는 바람에 아키노를 실은 관이 묘지에 안장된 것은 12시간이나 지난 밤 9시였다. 장례미사는 필리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제이미 신(Jaime Lachica Sin, 1928~2005) 추기경이 주관하였고,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열렸다.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니노이를 추모했다. 이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라디오를 통해서 장례 실황을 듣고 있었다. 대부분 언론들은 마르코스 정권에게 불이익을 받을까 봐 방송을 연기했지만, 유일하게 가톨릭교회가 후원하는 라디오 베리따스 아시아 한곳이 장례식 실황을 중계했다. 3
<아키노의 장례행렬 두번째 사진>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은 반(反)마르코스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이전까지 산발적인 행동으로밖에 없었던 반 마르코스 운동은 하루아침에 필리핀 전역을 뒤덮게 된다. 마닐라 수도권에서는 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많은 사람이 일어섰다. 빈궁에 허덕이는 민중뿐 아니라 기업인들까지 마르코스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또, 암살 현장에 있던 촬영기사 영상을 바탕으로 일본 TBS에서 제작했던 특집 방송이 해적판으로 필리핀 곳곳에서 상영된 것도 크게 한몫 거들었다.
니노이가 살해됨에 따라서 마르코스 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났고, 필리핀 전역에 미치기 시작한 정정 불안은 미국의 주목까지 끌게 된다. 이윽고 세계가 필리핀의 동향에 주목하기 시작하자, 마르코스 부인의 호화로운 생활까지 드러나면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체제에 더욱 비난이 집중된다.
한편, 니노이의 유지를 계승한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가 주목받게 되었고 1986년, 마르코스는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대통령 선거를 시행한다. 여기에 출마한 코라손은 철저하게 반 마르코스 캠페인을 벌이고,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1986년 2월 7일에 선거 관리 위원회는 [마르코스가 승리했다]라고 발표하지만, 코라손과 지지자들은 부정 선거가 이뤄졌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의했다.
이 항의를 지지한 민중들이 봉기하면서 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났고, 상황이 심상치 않자 군 고위관계자들까지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렸다. 당시 국방부 장관과 부참모총장이 [마르코스를 이제 필리핀 공화국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대놓고 마르코스를 압박했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 마르코스 대통령은 하야하는 조건으로 하와이로 쓸쓸하게 망명한다.
니노이 아키노는 오늘날까지 필리핀 국민에게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현재까지 필리핀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2010년 새로 발행한 필리핀 500페소 지폐에는 니노이와 코라손 부부의 초상이 인쇄되어 있으며, 니노이가 암살되었던 마닐라 국제공항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개칭되었다.
<아키노 부부의 초상화가 새겨진 필리핀 500페소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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