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8월 23일> 1989년 8월 23일 - 소비에트 연방, <발트의 길> 시위 열리다

!@#^& 2019. 8. 22. 20:28


- 발트의 길(Baltic Way)1989년 8월 23일소비에트 연방의 통치 아래 있던 발트 삼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운동의 목적으로 열린 시위로, 약 200만 명이 참여해서 을 잡고 약 600km 이상인간 사슬을 이루었다. 이 시위는 발트 삼국의 소련 합병을 인정한 독소 불가침 조약 비밀 의정서 체결 50주년을 맞아 열렸으며 3국이 공통의 역사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 행한 시위다.


구소련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1931~) 정권하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각주:1], 글라스노스트[각주:2]가 진행되면서 가두데모가 급증했고 시민의 지지도 모으고 있었다. 1986년 3공화국각 수도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여서 시위를 벌였으나, 곧바로 경찰에 의해서 해산됐다. 1987년에는 대규모 집회가 3공화국의 수도에서 이뤄졌지만, 당국자들의 비난과 함께 체포된 시위자가 나오면서 끝이 났다. 

1년 후1988년, 대규모 시위가 처음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1989년 5월에는 발트 의원 회의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서 열렸고, 그 뒤에 발트 평의회가 발족하였다. 발트의 길 시위 1주일 전에는 소련 정부도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발트 3국은 자주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했다며 소련 편입이 불법 병합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집회 며칠 전, 리투아니아의 독립운동 조직인 사유디스[각주:3] 위원회의 170명의 멤버가,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적, 문화적, 행정적 지배를 받지 않는다]독립된 리투아니아 국가를 목표로 하는 것을 의결했다.


<리투아니아 수도에 설치된 발트의 길 기념비>


발트의 길은 발트 의원 회의가 기획하였다. 현지 공산당 당국에 의해서 허가가 떨어진 이 시위에서는 인간사슬이 끊어지지 않게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각 도시나 마을에는 담당 장소가 할당되었고 별도의 교통수단을 갖지 못한 참가자에게는 무료 버스를 제공하도록 지시받았다. 참가자는 현지 시각으로 오후 7시부터 15분 동안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인간사슬을 만들었다. 매끄러운 집회상황전달을 위해서 특별 라디오 방송도 진행됐다.

그 후, 각지에서 많은 집회나 소련에 대한 항의가 이루어졌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니우스에선 대성당 앞에서 수천 명촛불을 들었고 국가를 비롯한 리투아니아 민족의 노래를 불렀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면서 교회 종을 울렸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국민전선은 두 나라 국경에서 집회를 열어 거대한 검은 십자가에 불을 붙이면서 상징적인 장례를 치렀다.

항의 시위은 평화롭게 이뤄졌지만, 참가자들은 보복이나 제재가 이뤄질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 독일 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이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1918~1989) 루마니아 대통령은 시위 진압을 위해 소비에트 연방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별다른 제재 없이 평화롭게 끝이 났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휴대한 라디오와 배지>



  1. перестро́йка perestroika: '재건', '재편'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гла́сность: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이 내세운 시정 방침의 하나. 정부가 가진 정보 일부를 공개하고, 언론 통제를 완화하는 정책.) [본문으로]
  3. Sąjūdis: 1980년대 말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단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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