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당시, 병원에 몰려든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
- 모리나가 비소 우유 중독 사건(森永ヒ素ミルク中毒事件)은 1955년 6월부터 서(西)일본을 중심으로 일어난, 비소가 혼입된 모리나가 유업산 분유를 음용한 영유아 중에서 다수의 사망자·중독자가 발생한 독극물 투입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모리나가 비소 우유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일본에서 최초로 식품 안전성이 거론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모리나가 유업(森永乳業)은 1953년부터 전국의 공장에서 산화된 유제품의 응고를 막기 위해서 용해도를 높이기 위한 안정제로, 디소듐포스페이트(Disodium phosphate, Na2HPO4)를 분유에 첨가했다. 시험 단계에서는 순도 높은 제품을 사용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본격적으로 제품에 도입할 때는 저렴하다는 이유로 순도가 낮은 공업용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5년에 도쿠시마 공장에서 제조한 분유였던 [모리나가 드라이 밀크]의 제조 과정에서 첨가된 디소듐포스페이트에서 다량의 1비소가 들어 있었고 이를 마신 13,000명의 유아가 비소에 중독되면서 이 중, 13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때 사용된 디소듐포스페이트라고 칭하는 물질은 애초에 일본경금속(日本軽金属)에서 산화 알루미늄을 제조하는 과정 중, 수송관에 부착한 부산물(폐기물)로 저순도의 트리소듐포스페이트(Trisodium phosphate, Na3PO4)이었고, 이에 다량의 비소가 혼입되어 있었다. 이 부산물이 복수의 기업을 거친 후에 마츠노제약에게 넘어가서 2탈색 정제되었고, 이것이 디소듐포스페이트으로 모리나가 유업에 납품되었다.
<비소가 혼입된, 문제의 MF 각인이 새겨진 분유통>
처음에는 괴질로 취급되었지만, 오카야마 대학 의학부 제1병리학의 세노(妹尾佐知丸) 교수가 모리나가 유업산 분유가 원인임을 밝혀냈다. 1955년 8월 24일, 오카야마현을 통해서 당시 후생성(厚生省, 보건복지부)에 보고되면서 사건이 드러났다. 이듬해 후생성 발표에 의하면, 비소 섭취에 의한 중독 증상(신경계통이나 장기에 문제가 생긴)이 발생한 피해자의 수는 12,344명으로 중 사망자는 130명이었다. 그러나 모리나가 유업의 분유가 원인으로 인정된 환자라도 소비자의 권리가 확립되지 않은 당시에 처우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질적으로 앞섰다는 천하의 일본도 산업 육성 정책이나 고도 경제성장이 최우선이었던 1950년대에는 일본 정부가 오히려 모리나가 유업의 수습을 도와주었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억눌렀다. 이렇게 우유 사건은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이 지나서 오사카 대학 의학부 교수인 마루야마 히로시(丸山博, 1932~2019)가 피해자에게 후유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적발한다. 그 보고가 일본 공중위생 학회에서 발표되면서 잊혔던 사건은 다시 발굴 되었고, 피해자 측의 부모들은 [구세주가 나타났다]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것에 힘을 얻은 피해자의 부모들은 다시 한 번 결집해서, [모리나가 우유 중독의 아이를 지키는 모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 투쟁 속에서 재판 투쟁과 불매운동은 큰 힘을 발휘해 갔다.
1심에서는 모리나가 유업 측이 모두 무죄로 알려졌으나, 검찰 측이 항소했다. 형사 재판은 1973년까지 이어지면서 판결은 과실 가능성 판단에 대해 도쿠시마 공장 전(前) 제조 과장 한 명이 실형 판결을 받았다. 애초 1심 판결이 무죄로 나온 결과에 충격을 받은 피해자 측은 민사 소송을 포기했지만, 그 후의 환송 판결로 피해자 측은 다시 민사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갔다. 그 뒤에 후유증 문제도 밝혀졌지만, 그때까지 모리나가 유업 측은 오랫동안 인과관계와 책임을 계속 부정했다.
<사건 당시, 보건소에 자신들이 구매한 분유통을 가져와서 상담을 요청한 어머니들의 모습>
모리나가 유업 측이 원인을 우유 중의 비소 화합물로 인정한 것은 발생 15년이 지난 1970년 민사 재판 중이었다. 그때, 모리나가 유업 측은 디소듐포스페이트 납품 업체를 믿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주의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3센다이 철도 관리국(現 JR 동일본 센다이 지사)이 디소듐포스페이트(일본경금속 제조)를 증기 기관차의 보일러 세척제로 썼는데 사용 전의 품질 검사에서 비소를 검출, 반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식품의 품질 검사는 필요 없다]라고 주장했던 모리나가의 태도는 소비자로부터 철퇴를 맞고, 1960년대에는 모리나가 제품 불매운동이 발생했다. 당시 모리나가는 유제품의 매상에서 다른 경쟁사들을 제쳤으나, 장기 재판과 소비자들의 비판으로 기업의 이미지 손상은 피할 수 없었고, 점유율을 크게 떨어뜨렸다. 특히 오카야마현에서는 사건 이후, 모리나가 제품에 대한 불신감이 소비자에게 뿌리 깊게 남아서 매상을 장담할 수 없는 모리나가 제품은 일절 취급하지 않는 상점도 많이 존재했다. 이런 움직임은 서일본 일대에서 사건이 일단 마무리를 맺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 같은 불매운동은 애초 모리나가 고발 등, 지원자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이뤄져 왔으나 모리나가 유업의 불성실한 대응에 맞서기 위해 모임의 전국본부 방침으로 결정, 일본 국민에게 크게 확산하면서 일본 불매운동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 후, 모리나가 유업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구제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것을 표명하고 나서야 지키는 모임은 불매운동을 철회하였다.
<자신의 아이를 안고, 걱정스럽게 진료를 기다리는 어머니들의 모습>
피해자 중에는 현재도 뇌성마비, 지적 장애, 간질, 뇌파 이상으로 인한 정신 질환 등의 중복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또 젊을 때 4취업 차별이나 결혼에서 어려움을 겪었거나,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시설에 입소한 피해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유를 먹인 자책감으로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고생한 피해자 부모도 많다. 최종적으로 피해자들은 후생 노동성과 모리나가 유업의 협의를 통해서 1973년 12월 23일 확인서가 맺어졌고, 1974년 4월 25일 피해자의 항구적인 구제를 위한 재단법인 [히카리 협회]가 설립되면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1973년 12월, [모리나가 우유 중독 아이를 지키는 모임], 5정부, 모리나가 유업의 3자로부터 [확인서]가 체결되었고, 피해자를 항구적으로 구제하기로 합의하면서 모리나가 유업은 구제 자금을 출연하기로 약속했다. 이 합의에 따라서 상기한 히카리 협회가 1974년 4월에 설립되었고 이후, 안정적으로 구제 사업은 진행되고 있다. 3자 및 히카리 협회는 그 후 정기적으로 [3자 회담]을 개최하고, 피해자 구제에서 필요한 협의를 시행하고 있다. 또, 이 구제 사업에 동참하는 400명에 가까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지역 구제 대책 위원회는 19개 지역에서 피해자 상담이나 필요한 원조의 대응에 대해서 히카리 협회 직원에게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로 많은 전문가의 협력을 받는 피해자 구제사업은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피해자 자신들이 피해자들의 건강을 위한 호소 등을 실시하고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현재 600명이 넘는 구제 사업 협력원이 활동하고 있다. 히카리 협회는 그 공익성을 인정받아 2011년에 공익 재단 법인으로 인정됐다.
모리나가 유업은 매년, 신입사원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서 식품 안전에 대한 철저한 사원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모리나가 유업 사원의 업무는 이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식품의 안전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교육 체제는 엄청나서 오죽하면 노이로제로 조기 퇴직자가 발생하는 일이 적지 않을 정도로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
- 모리나가 우유 중독 사건으로, 평생 중증 장애를 앓게 된 와타나베(64) 씨. 태어날 때부터 이미 뇌성 마비가 있었으나, 어머니가 영양섭취를 위해 먹인 분유에 들어있던 비소로 더욱 고통스러운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 장애 때문에 제대로 된 의무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야간 중학교를 다니며 늘그막에 생애 첫 자신의 개인전을 오사카 시내에서 열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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