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지 내일로 꼭 31주년이 됩니다. 이 올림픽을 통해서 한국은 변방의 이름없는 나라에서,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6.25로 잿더미와 폐허 속에 신음하던 나라가 이렇게 말끔하게 중진국으로 변신한 모습에 세계인들이(특히 동구권 국가) 꽤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에 부정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은 일본 위키에서 서울 올림픽을 어떠한 내용으로 다루었는지 한번,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다름 아닌 1988년 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끝까지 경쟁을 펼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던 건 워낙 유명하니 잘 아실 겁니다(일명, 바덴바덴의 기적).
혹여 부정적인 내용이 나와도 너무 불쾌해 하지 마시고, 그냥 [이 녀석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쿨하게 넘기시는 게 좋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가볍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더불어서 제가 중간,중간 몇가지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서울 올림픽 개회식 행사 中>
- 1988년 서울 올림픽(프랑스어: Jeux de la XXIVe olympiade, 영어: Games of the XXIV Olympiad, 정식명칭: 제24회 하계 올림픽 경기 대회)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 대회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올림픽이라고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건국된 신흥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이며,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이어서 아시아에서 열린 두 번째 올림픽이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졌고, 북한과 분단국가가 된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흥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에서는 개최일을 따 88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개최지 선정]
- 서울 올림픽 개최는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결정됐다. 일본의 나고야시도 개최를 요구하면서 입후보하였고, 애초는 우세하다는 견해가 강했지만 27-52로 서울에 패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의 [알라빌드... 쎄울!] 외침과 함께 환호하는 한국 대표단 모습>
[왜 나고야는 유치에 실패하였는가]
- 1981년 2월 24일, 최대 라이벌로 꼽히던 호주의 멜버른이 각 주의 대립과 재정 문제로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 이 시점에서 입후보한 도시는 일본의 나고야시와 한국의 서울시뿐이었다. 유치 활동이 이루어진 1977년부터 1981년 당시는 냉전 체제였기에 일본 올림픽 위원회의 분석에서는 북한과 인연이 깊은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은 서울이 개최될 경우, 불참 가능성이 있어 나고야와 서울 간의 싸움이 되면 나고야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꼽혔으며 실제로 소련은 나고야 올림픽 개최를 지지했다.
낙관적인 분위기로부터의 방심은 물론, 올림픽 반대 운동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주니치 신문]의 사설은 주민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점, 나라의 재정난에 걸린 것을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애초에 올림픽 자체에 대해서 지역 주민들은 시큰둥했던 것. 덧붙여 반대의 주 된 이유는, 재정 부담이나 땅값의 급등에 대한 염려였다.
이 밖의 실패한 원인으로 나고야에서 올림픽 개최가 이루어진다면 일본에서 3번째, 여름 대회만도 2번째 개최이다(64년 하계올림픽 도쿄, 72년 동계올림픽 삿포로). 서울 측은 이 점을 간파하고 서울과 나고야가 같은 아시아의 입후보라면 3번째가 될 일본보다 최초로 열릴 한국 개최를 홍보하면서 거센 반격 운동을 전개, 역전에 성공한다.
또,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 교수에 따르면 민간의 나고야 인권 위원회가 IOC에 나고야시가 공립 학교 교원 채용에 국적 조항을 두고 시험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고야에 중대한 인권상의 문제가 있다]라고 고발한 것이 나고야 낙선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의 모습>
[북한과의 공동개최안]
- 1984년경부터는 서울 올림픽을 북한의 평양시와 공동 개최하자는 제안이 잇따랐다. 전 2회(80년 모스크바, 84년 LA) 하계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의 보이콧 전이 된 것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가 없었던 한국에서 개최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이콧할 가능성이 우려됐다. 그래서 남북한이 올림픽을 공동 개최하면 사회주의 국가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발상이 생겼으며, 실제로 1985~87년에는 한국과 북한, IOC에 의한 협의에서 공동 개최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 북한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미얀마(당시 버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저질렀으며 남북 간의 상호 불신이 컸다. 북한에 배분할 경기 수에 대한 논의도 오락가락했으며 북측은 개·폐회식은 서울과 평양에서 따로 실시하고, 조직위원회를 따로 조직하자는 말도 안되는 방안을 주장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한국과 IOC는 [올림픽 개최권은 올림픽 헌장의 규정에 따라서 서울에 주어진 것]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며 공동 협상은 결렬된다.
1987년 11월 28일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은 서울 올림픽 한국 단독 개최를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북한 공작원의 범행과 더불어 서울 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참가했다.
<한때, 북한과의 공동개최 방안도 논의되었지만 북한 측의 무리한 요구와 더불어서 한국에 저지른 다수의 테러 등으로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대회 마스코트]
- 호돌이(개호주가 모티브) & 호순이
덧붙여서, 곰인 미샤(1980년 모스크바)나 독수리인 샘(1984년 LA)과 마찬가지로 호돌이도 [달려라 호돌이]라는 TV 애니메이션이 존재하며, 한국에서 제작되어 MBC에서 방영되었다. 다만 전술한 2개 프로그램과 달리 평일 10분 범위였다.
<서울 올림픽 때 쓰인 마스코트 호돌이, 국내외로 평가는 매우 좋았으며, 2008년 미국의 팝 아트 비평가인 피터 하틀라웁이 꼽은 올림픽 마스코트 중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단, 호돌이 머리 위에 있는 상모를 화장실 뚫어뻥이라고 표현...>
[공식주제가]
- Hand in Hand(손에 손잡고) : 영어판과 한국어판으로 발매되었으며, 당시 유명한 남녀 혼성 코러스 그룹인 코리아나가 열창하였다. 이탈리아의 음악가인 조르조 모로더(Giovanni Giorgio Moroder, 1940~)가 작곡했으며, 톰 휘틀록(Tom Whitlock, 1954~)과 김문환(2018년 별세) 전 서울대 교수가 작사하였다.
이 외에도 The Victory도 응원가로 해당 앨범에 수록된 바 있다.
[하이라이트]
- 테니스와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특히 테니스는 1924년 파리 올림픽 이후 64년 만의 부활이었다. 그리고 여자 유도, 야구, 태권도가 시범 경기로 올림픽에서 개최되었으며, 여자 유도와 태권도는 첫 개최였다. 야구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이어서 2번째 개최였으며 후에 여자 유도, 야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태권도는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이 된다.
특이사항으로 소련 및 동독이 참여한 마지막 올림픽이었고, 도핑 문제에 본격적으로 눈길이 쏠린 첫 대회다.
<당시 육상계의 스타였던 캐나다의 벤 존슨의 도핑 혐의를 한국의 카이스트 도핑콘트롤센터가 적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참고로 해당 100m 결승전은 [역사상 가장 더러운 육상 경기]로 불리었을 정도로 선수들의 도핑 혐의로 얼룩진 경기였다>
[TV 방영권의 영향]
- 육상 남자 100m 결승은 9월 24일 오후 1시 30분으로 결정되었는데 1987~88년 한국에서는 서머타임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오후 0시 30분이었다. 이것은 시청률을 크게 좌우하는 미국의 황금시간대에 결승을 맞추려는 조치였는데, 미국 방송국 NBC가 거액의 중계권료를 지급한 대가였다. 그 후의 올림픽에서도 미국과의 시차를 고려한 경기 시간의 설정은 종종 일어나고 있다.
[올림픽의 자취]
- 지금은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이 남아있고, 서울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플랫폼에서 당시의 벽화를 볼 수 있다. 또, 송파구의 선수촌이 있던 지구는 대회 이듬해인 1989년에 [오륜동]이라는 지명이 제정되었다. 서울 지하철과 그 주변에서 매겨진 역 번호도 같은 시기부터 행해진 것이다.
[최종 성적(금메달 기준)]
1위 - 소련: 금(55) 은(31) 동(46)
2위 - 동독: 금(37) 은(35) 동(30)
3위 - 미국: 금(36) 은(31) 동(27)
4위 - 대한민국: 금(12) 은(10) 동(11)
5위 - 서독
6위 - 헝가리
7위 - 불가리아
8위 - 루마니아
9위 - 프랑스
10위 - 이탈리아
<서울 올림픽 성화 점화식 장면>
[크고작은 대회 논란]
- 성화대 비둘기 통구이 논란: 개회식에서 날린 비둘기 중 몇 마리가, 성화대 위에 머무른 채 점화 때까지 날지 않고 있어서, 타죽은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에 대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낸 박세직(1933~2009)은 [몇 명에게 확인해 봤다. 견해 대부분은 '점화 직전에 날아간 것'으로, 한 실무자는 '점화 직전에 성화용 고압가스가 강하게 분출되기 때문에 비둘기는 끝까지 머무를 수 없다']라고 해명했다.
- 도핑 문제: 육상 경기 남자 100m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전년의 세계 육상 로마 대회에서 자신이 낸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인 9초 83을 100분의 4초 앞당긴 9초 79의 신기록으로, 9초 92였던 2위의 미국 칼 루이스를 수 미터 앞선 채 우승했지만, 경주 후 도핑 검사에서 스테로이드 계통의 근육 증강제인 스타노졸롤의 양성 반응이 나오면서 존슨은 금메달을 박탈당하였고 루이스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존슨의 기록은 이 대회의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전년도에 기록한 9초 83도 1989년에 취소됐다.
- 복싱 오심 문제 : 복싱 경기인 라이트 미들급 결승에서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Roy Jones, Jr, 1969~)가 한국의 박시헌(1965~)에게 2번의 다운을 뺏는 등, 상대를 압도하였으나 2-3의 어이없는 판정으로 패한다. 기자회견에서 존스 주니어는 [도둑맞은 금메달을 돌려달라!]며 울먹였고, 해당 경기는 올림픽 역사에 오점으로 남는 사건이 되었다.
나중에 조사에 따르면, 심판 5명 중 박시헌의 손을 들어준 3명이 한국 측에 인수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국제 아마추어 복싱 협회가 발표, IOC의 회장으로부터 존스 주니어에게 (별 위안도 안 되는) 금메달의 복제품이 주어졌다. 이 사건은 아마추어 복싱의 채점 시스템이 변경되는 계기가 되었고, 존스 주니어에게 올림픽 아마추어 복싱에서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하는 발 바커 트로피가 주어졌다.
이후, 로이 존스 주니어는 프로복싱으로 전향하면서 4체급을 제패한 대기록을 남기면서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반대로 박시헌은 논란의 금메달로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은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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