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9월 19일> 당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2019. 9. 18. 23:16


- 이번 시간에는 옛날 신문기사를 통해서, 9월 19에는 어떤 소식들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았던 평온한 날이었던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을 9월 4일...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어떠한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났을지 당시 기사를 통해서 확인해보시죠.



<북괴어선 평신정을 몰고 일본하관에 도착한뒤,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 4명의 선원들. 이들은 현재(당시) 일본하관해상보안본부에서 밀입국 및 무기반입 위반혐의로 문초를 받고있다>


<북괴(북한)선원 4명, 일본에 극적망명>


[1966년 9월 19일, 경향신문]


- 북괴 선원 4명이 선장 등, 7명을 살해하고 다른 9명의 선원을 선창에 감금한 채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고 일본당국이 17일 발표했다. 공동통신에 의하면 신의주의 북괴 수산사무소 소속 평신정(146톤)의 부기관장 민경태(당시 31세), 부선장 장대형(당시 26세), 갑판원 안병록(당시 21세), 동(同) 이찬호(당시 29세)는 선장과 북괴노동당세포 등 7명이 망명에 반대했기 때문에 사살하여 시체를 바다에 내던졌으며, 다른 9명은 망명에 적극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금하고 하관항에 입항, 자수했다.


<밀입국과 무기반입 위반 혐의, 현장검증>


선장 이하 7명을 사살하고 9명을 감금한 채 일본에 극적으로 망명해온 북괴 어선원 4명에 대해서 일본 해상보안청 당국은 18일부터 본격적인 문초를 시작했다.


문사 7관구 해상보안본부는 신의주 수산사업소 소속 평신정을 18일 아침 일찍, 하관항에서 문사항으로 옮기고 밀입국과 무기반입위반혐의로 선원들을 선내에 가두었다. 부기관장 민경태 등 4명은 일본 당국에 대해 [공산치하의 북괴에 염증을 느껴 지난 7월부터 일본망명을 기도해왔다]고 말하고, 망명을 반대한 선장과 북괴노동당세포등 7명을 선내에서 사살하고 바다에 시체를 던져 버렸으며 망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9명을 감금해서 하관항에 입항해왔다고 자백했다.


현장검증한 일본 당국에 의하면 평신정 선내에는 총탄 구멍과 핏자국이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망명한 4명은 민경태 외에 부선장 장대형, 갑판원 안병록, 이찬호 등이다. 한편 하관 주재 한국 영사관의 박광해 영사는 18일 문사 해상보안본부를 방문하고, 이들 4명과 평신정의 즉각 인도를 요구했다. 일본 당국은 [문초 중이다]라는 이유로 아직 이들에 대한 면회를 허락지 않고 있다. 


한국 대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대해 망명을 허가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한국 측에 인도를 주장했다. 한국대사관은 17일 밤 2명의 외교관을 하관에 파견하고 방일 중인 최광수 외무부 동북아과장을 18일 아침 일찍, 하관으로 급파했다.


일본 당국은 18일 정오 현재, 한국 측이 요구한 망명허가와 인도 문제에 대해 명백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일본 법무성 관리는 비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1. 13명의 북괴 어선원은 선원수첩을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출입국자는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문초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살인, 시체유기는 일본영해 밖에서 일어난 것이 판명되면 일본에는 재판권이 없다.


3. 그러나 총포 불법소지는 일본에 재판권이 있으며 문초를 계속한다.


4. 일본과 북괴 간에는 범죄자인도조약이 없으므로 북괴에 송환할 의무는 없으나, 국제상식으로는 북괴 관리들을 사살했기 때문에 강제송환할 가능성이 크다.


5. 망명 문제는 인도상의 문제이므로 일본 외무성과 의논해서 결정하겠다.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준 이번 사건은 일본 측에서의 재판권과 망명을 요청한 4명을 한국에 인도 하느냐의 여부로 한일 양국 간에 미묘한 외교 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1970년대 시장의 모습>


<지방 동향, 과일·옷가지·고무신 팔리는 정도>


[1972년 9월 19일, 동아일보]


- 예년 같으면 인파로 넘칠 국제시장과 광복동 상가 및 각 시장이 별다른 변화가 없다. 다만 국제시장의 아동복 가게와 아동복을 취급하는 백화점만이 그런대로 추석 경기가 보이는 것 같으나, 그나마 작년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상인들의 얘기다.


이 밖에 비교적 잘 팔리고 있는 것은 설탕·식용유·고무신·운동화 등이며 해마다 매 분기가 왕성했던 주류·생선류·청과류의 경기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 반면 물가는 팥·콩 등 잡곡류와 달걀·쇠고기 등이 오르고 있다. 상인들은 추석 경기가 이처럼 부진한 까닭을 전반적인 불황에다 사채 동결조치가 자금 유통을 어렵게 한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구]: 물건은 산더미처럼 많이 갖다놓았으나 대부분 상인이 구매의 기운이 없다고 울상이고, 다만 소아복이나 소아 신발이 평소보다 열 배 이상 팔리는 정도라고. 이 때문인지 5살짜리 여아복 한 벌이 작년보다 약 3%나 오른 4,200원(현재 기준 약 7만 원)을 부르고 있다. 이 밖에 설탕·조미료·술 등, 선물용 상점은 20일이 지나야 활발해질 전망. 백화점 역시 아동복 쪽에 조금 사람이 모일 뿐이고 상품권 발행은 양화점에서 다소 빛을 보고 있다.


[대전]: 어린이옷·신발류·과일·건어물 이외에 특별히 잘 팔리는 상품은 별로 없다. 이곳 상공회의소는 10개 시장과 십여 개 백화점의 대목 경기가 예년과 비교하면 약 3%가량 침체한 것으로 보고 사채동결에 따른 자금유통의 부진, 시민들의 내핍생활 자체가 이런 결과를 빚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동의 어느 백화점은 작년에는 와이셔츠 내의 등, 상품권 매상고만도 300여만원(현재 기준 약 5천만 원)에 달했으나 올해는 18일까지 십만 원(현재 기준 약 170만 원)어치도치도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주]: 남문시장, 중앙 동부시장 등이 아직 별다른 추석 대목 경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남문 시장에서 그릇 전을 경영하는 최영배(당시 49세) 씨는 예년에 없던 불경기라고 말하면서 8·3조치 이후, 자금이 돌지 않아 물건도 작년보다 3분의 1밖에 갖다놓지 못했다고 한다.


[순천]: 17일 남부시장은 정지 장날을 맞았는데도 추석 대목을 노리고 몰려든 상인들만 북적대고 일반적으로 구매의 기운은 없었다. 조금 나은 곳이 어시장·고무신·의류점이었으나 그나마 농촌 사람들이 저질품이나 어린이용 등 값싼 상품을 사 가는데 불과했다. 상인들이 보는 추석 대목의 불경기 원인은 올해 농사가 늦어지면서 농산품이 아직 시장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며, 거기다 8·3 사채동결조치의 영향도 크다고.


[정선]: 지난번 수해로 갱도에 물이 들어와 조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영월·정선·삼척 등 태백 탄광 지대의 2만5천여 광부들은 임금을 제대로 못 받아 추석 명절을 지내기보다 우선 생계에 위협을 받는 실정이다. 수해 뒤에 정부는 각 탄광 사업주 책임 아래 1개월분의 정부 양곡을 지급했으나 탄광 측은 수송 길이 막혀 탄이 팔리지를 않았다고 임금 지급은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


정선군 동면 고한 시장에서 피복상을 하는 김분이(당시 42세) 여인은 탄광에 일거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임금이 지급 안 돼 전에는 하루 평균 5만 원(현재 기준 약 84만 원)씩 팔리던 것이 지금은 팔기는커녕 외상값도 거두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항법장치 이상으로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다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서 격추당한 사건으로, 전원 사망했다. 사진은 해당 사고기의 잔해 일부>


<KAL기 항적(航跡) 재조준>


[1983년 9월 19일, 동아일보]


- KAL 007편의 피격 전후 미·일·소의 녹음테이프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많은 의문점에 대해 몇 가지 해답을 암시해준다.미 연방항공국이 제시한 KAL기와 [앵커리지] 지상관제소 간의 2시간에 걸친 교신기록, 일본 정부가 밝힌 KAL기와 동경 관제소 간의 3시간 반에 걸친 교신기록, 미 국무성이 공개한 KAL기 추적,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의 41분간에 걸친 교신기록을 검토,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시도해본다.


[KAL기 조종사는 항로이탈을 알고 있었는가] = 녹음테이프 증거를 보면 KAL기 조종사는 자기가 실제의 위치보다 480km 이상이나 훨씬 동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최후의 위치 보고에서 [캄챠카] 반도의 동쪽을 막 지났으며 다음 보고는 [홋카이도] 동쪽 지점에서 하겠다고 말했다. KAL기 조종사는 그다음 지점을 3시 26분(이하 한국 시각)에 통과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3시 26분 20초에 [사할린] 섬 서남쪽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은 퍽 아이러니하다.

KAL기 조종사는 미사일에 맞기 3분 전에 코스 방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도를 높였는데 아마도 보다 좋은 바람을 맞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도를 높이기 전 바람 방향이 서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KAL기 조종사는 소련의 주장처럼 도주하려고 했던가] = 소련 전투기 조종사는 소련군 기관지 [적성]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사할린 섬 상공에서 KAL 007편을 발견했을 때 KAL기 조종사는 곧 보조날개를 내리고 에어 브레이크를 걸어 감속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시속 885~965km의 순항속도에서 보조날개를 내린다면 보조날개가 찢겨 나가 비행기에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또,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밤중에 KAL기의 보조날개를 내린 것을 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면 그것이 여객기라는 것도 알아보았을 것이다. 소련 조종사는 기관포를 발사한 후, 소련 전투기가 KAL기를 앞지르기 시작하자 KAL기가 속도를 줄였기 때문에 소련 전투기도 감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측 녹음테이프에 의하면 기관포가 발사되기 직전 KAL기 조종사는 고도를 1만m에서 1만7백m로 높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도 상승으로 인해 [수호이 15]는 KAL기의 아래 오른쪽에 위치하게 되므로 KAL기로서는 수호이 15를 보기 힘들게 된다. 수호이 15가 KAL기를 목표물로 파악하고 있는 소련 측 녹음테이프는 KAL기의 고도변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KAL기 조종사는 자신이 추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KAL기가 요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신호를 보내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는가] = KAL기의 최후 26분 동안을 수록한 소련 조종사들의 대화 테이프 중 어떤 요격 시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아무것도 없다. 이 녹음테이프들은 미사일을 발사한 소련 전투기가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격위치, 즉 KAL기의 왼쪽으로 비행하지 않았으며 항상 KAL기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전형적으로 요격기는 영공침범기의 왼쪽 앞으로 비행해서 침범기의 조종사가 요격기를 놀라지 않고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서서히 접근, 날개를 흔들거나 불빛을 반짝여서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요격하면 침범기는 이 요격기를 따라야 한다.


격추되기 수 분 전, 동경 관제탑에 보내온 KAL기의 전신은 KAL기 승무원이 추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아무런 힌트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KAL기는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 고도를 변경한다고 보고했다. 미사일에 맞은 후, KAL기로부터 동경에 들어온 전신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단지 동경을 부르는 소리고 다른 하나는 [모든 엔진], [기압 급강하]라고 공포에 휩싸여 외치는 소리였다고 일본의 분석가들은 말한다. 12분 후 KAL기는 얼마간 추락하는 동안 표면적으로는 약간의 정상제어를 한듯했으나 레이더스크린에서 사라졌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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