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NewsBTC>
- 1886년 미국에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이 콜라 음료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발상했다. 현재도 본사는 애틀랜타에 있고 같은 지역에 있는 [월드오브 코카콜라 박물관]에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박물관에서는 세계 각국의 코카콜라의 맛을 비교할 수 있다(참고로 우리나라 코카콜라는 좀 밍밍한 편이라고 한다).
코카콜라 명칭의 유래는 코카 잎(성분으로 코카인을 포함)과 콜라 열매(당시는 거의 아프리카산)를 원재료에 쓰던 것으로 1903년 이후, 코카인의 성분은 포함되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의 코카콜라 주식회사는 저 유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 설명을 완전하게 부정하고 있다. 명칭의 유래는 '어감이 좋으니까'라는 단순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코카콜라라는 이름은 존 펨버턴(John Pemberton, 1831~1888) 박사의 친구이자 경리 담당인 프랭크 로빈슨(Frank Mason Robinson, 1845~1923)이 명명했는데, 다만 어느 쪽이나 현재의 코카콜라의 주성분이 아니고, 콜라 열매도 다른 콜라 음료와 마찬가지로 풍미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미량이다.
<출처: Coca-cola India>
19세기 말, 당시 미국은 의사 부족으로 대체 의료가 성행했는데 특히 자연 요법이나 만병통치약이 널리 서민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으며, 관련 의사나 약사는 자신의 치료법이나 약재의 매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편, 1867년에 인공적인 탄산수의 제조법이 발명되자 당시에는 어떠한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던 탄산수를 조합해서 먹이는 소다 파운틴(Soda fountain)이 약국에 설치되기에 이른다(물론 효능 따위는 없다). 이렇게 팔려나간 탄산수에는 당연히 약효가 많다고 여겨지던 만병통치약과 마찬가지로 판매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 수많은 약사 중 한 명으로,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약사 존 펨버턴이 있었다. 그는 모르핀 중독을 치유하는 것으로 당시에 주목받기 시작한 코카인을 이용한 약용주(藥用酒) 개발을 떠올렸다. 이런 종류의 약용주에는 이미 유사품이 많이 나돌고 있었기에 펨버턴은 와인에 코카인과 콜라의 진액을 조제한 프렌치 와인 코카를 정력 증강과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는 약용으로 선전하면서 1885년부터 발매한다.
<당시 프렌치 와인 코카 홍보물(출처: http://popup10.tok2.com)>
코카콜라는 비즈니스로서 성공했지만, 그 사이 팸버턴은 건강이 크게 나빠져서(1888년 위암으로 사망) 일찌감치 그 권리를 단 1달러에 매각한다. 더욱이 권리관계의 복잡함 때문에 몇 년 동안은 이리저리 권리가 옮겨지면서 재판으로 다툼을 벌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최종적으로, 코카콜라의 권리는 1888년에 아사 그릭스 캔들러(Asa Griggs Candler, 1851~1929)의 손에 넘어갔고 캔들러는 팸버턴의 자식들과 함께 코카콜라 컴퍼니(이하, 코카콜라사)를 설립한다. 코카콜라의 로고, Delicious and Refreshing(맛있고 청량감 있는)의 캐치 카피와 한잔에 5센트로 대량 판매, 원액의 레시피에 대한 철저한 기밀 보호로 코카콜라는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한다.
1899년, 변호사인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Benjamin Franklin Thomas, 1860~1914)와 조셉 브라운 화이트 헤드(Joseph Brown Whitehead, 1864~1906)는 코카콜라의 병조림 권리를 취득한다. 두 사람은 각각 보틀링 회사를 창립하고, 전국 각지의 보틀링 회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으면서 코카콜라는 넓은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다만, 처음엔 기술 미숙과 기타문제로 병이 터지기도 하면서 품질 관리와 소송에 대응해서 1913년에 병 음료 제작 협회의 아래 조직화한다. 그리고 1916년에는 콜라병의 표준화를 실시한다.
<출처: trademe.co.nz>
1903년, 미국 내의 코카인 판매가 금지된다. 이 때문에 캔들러는 코카콜라 원액에서 코카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사태에 대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입청과의 재판이나 유사품 및 상표 침해에 대한 소송으로 머리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캔들러를 괴롭힌 것은 하비 워싱턴 와일리(Harvey Washington Wiley, 1844~1930)가 이끄는 미국 식품의약청(FDA)과의 오랜 분쟁이었다. FDA는 콜라에 함유된 카페인의 독성과 보틀링 공장 위생의 불결함을 문제 삼아서 1909년, 원액을 압수하고 이러한 것들을 재판에 호소한다. 이러한 악재에도 코카콜라는 결국 재판을 이겼으나 원액에 함유된 카페인의 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1919년 투자가 어니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 1863~1944)가 캔들러로부터 코카콜라 상표와 사업을 이어받았다. 이후, 1923년에 어니스트의 아들 로버트 W. 우드러프(Robert W. Woodruff, 1889~1985)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60년 넘게, 코카콜라사의 제왕으로 군림하면서 경영에 나선다. 마침 1920년대 미국 금주법으로 인해서 알코올이 판매 금지되었고 대신에 무 알코올 음료의 판매가 늘었다. 로버트는 광고에 주력함과 동시에, 병에 든 코카콜라 확대 판매에도 주력하면서 품질 관리를 철저하게 시행한다.
코카콜라가 해외로 진출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코카콜라 본사가 원액을 제조하고 공급하면 보틀러가 병에 채워 넣는 스타일은 여기에서도 채용되었는데, 이때 독일에서는 1930년에 현지 법인의 지사장이 된 막스 카이트(Max Keith)가 매출액을 늘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코카콜라를 제공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원액의 수입이 제한되자, 그에 대한 대책으로 새롭게 음료를 제조한 '환타(FANTA)'를 탄생시키면서 나중에 코카콜라의 세계적인 상품이 되었다.
<코카콜라를 지금의 글로벌한 대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우드러프 회장(출처: Atlanta Magazine)>
그런데 1930년대부터 라이벌 펩시콜라가 저가 노선으로 판매 공세에 나서며 코카콜라의 지반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로버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전쟁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우리는 군복을 입은 모든 병사가 어디에서 싸우고 있어도, 또 우리 회사에 얼마만큼의 부담이 생겨도, 단돈 5센트에 코카콜라를 살 수 있도록 하겠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은 이 전보를 받고, 해외주둔 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충분한 양으로 입수시키라는 내용의 명령서를 보냈다. 연합국 중 하나인 소련의 지휘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1896~1974)도 이 코카콜라를 무척 좋아했다.
군 지휘관부터 전선에서 싸우는 일개 병사까지, 코카콜라는 누구에게나 대인기였는데, 이탈리아 전선에서 코카콜라 1병이 4,000달러의 값을 기록한 적도 있다. 또한, 코카콜라뿐만 아니라 콜라를 담는 병은 전기 절연체 대용이나 전투기의 타이어에 구멍을 내기 위한 일종의 '폭탄'으로, 비상식량인 바다거북을 잡기 위한 무기로, 떄로는 소변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편함이나 도구함으로서 귀중한 것이었고 치약 대용으로 사용하는 병사도 있었는가 하면, 연인에게 코카콜라로 질(여성의 생식기) 씻기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다.
어느 기술 고문이 프랑스 칸의 한 장교클럽에서 가톨릭교회 신부님들을 상대로 '코카콜라로 교황에게 축복을 받는 건?'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거나, 벌지 전투에서 신부가 성수 대신 코카콜라로 세례를 했던 것을 봤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코카콜라의 인기는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카콜라는 군인 모두에게 사랑받는 음료수였다. 심지어 적국인 추축국의 군인들도 없어서 못 구할 정도였다(출처:핀터레스트)>
제2차 세계 대전, 미군의 군수품으로 세계에 널리 퍼진 코카콜라는 냉전 중에는 자본주의와 미국의 상징으로 위상이 높아진다. 특히 해외 진출 시 현지에서 파트너로 삼은 상당수 기업이 유력자나 재벌, 때로는 미국 자본의 다국적 기업이기도 했던 것이 그 이미지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종종 코카콜라 공격과 연결되기도 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마셜 플랜에 반대하는 좌익계열이 코카콜라 배척에 앞장섰고, 민족자본의 음료업체나 주조업체가 이를 밀어주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좀 다른 예지만, 우리나라 IMF 구제금융 시절에 애국심 마케팅을 이용했던 콜라 독립 어쩌고 거렸던 815콜라 같은 경우도 코카콜라 견제에 해당한다. 참고로... 당시에 그 콜라, 진짜로 맛없었다.)
동구권 국가로의 진출에서도 영원한 라이벌, 펩시에 뒤처졌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의 진출은 1978년까지 기다렸어야 했고, 수출도 어려웠다. 또한 아랍국가들의 보이콧의 영향(이스라엘에 가장 먼저 공장을 세운 것이 아랍권의 국가들이 소위 '빡돈것')으로 중동에서도 진출이 부진했다. 반대로 중국은 1978년에 미국 기업으로서 처음으로 진출하면서 3년간 시장을 독점했다.
<1970년대 코카콜라 광고지(출처:vikilist.com)>
1970년대 중반 이후, 펩시가 코카콜라와의 비교 광고로 매출액을 늘리고 각종의 시장 조사, 미각 조사에서도 펩시가 이기는 등 코카·콜라의 앞날에는 불안감이 생긴다.
당시 CEO였던 로베르토 고이주에타(Roberto Goizueta, 1931~1997)와 COO였던 도널드 키오(Donald Keough, 1926~2015)는 캔자스 계획으로 불리는 비밀계획을 실행했다. 발매 100주년인 1986년 전에, 코카콜라의 맛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행동에 나섰다. 당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드러프를 설득하고 면밀한 시장 조사와 광고 전략을 구사했고, 1985년 4월 24일 뉴코크(New Coke)를 출시했다.
하지만 뉴코크는 소비자의 불평을 사고, 코카콜라에는 항의 편지와 전화가 폭주한다. 말 그대로 대실패였고 불과 2개월 만인 7월 10일에 원래의 코카콜라를 코카콜라 클래식으로 다시 판매한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코카콜라는 다시 매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한숨 돌리게된다.
<출처: 코카콜라 공식 홈페이지>
현재 코카콜라는 2019년 2월 기준으로 시가총액 231조, 펩시는 177조로 코카콜라가 한발 앞서고 있다. 브랜드 면에서도 2012년까지만 해도 인터브랜드 선정 브랜드 가치 순위 부동의 1위를 차지할 만큼 강력한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는 5~6위 사이) 라이벌 펩시도 브랜드 가치에서만큼은 코카롤라에게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200여 개국 이상에서 팔리고 있는 코카콜라의 왕국은 아직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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