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10일> 1857년 5월 10일 - 세포이 항쟁 발발

!@#^& 2019. 5. 10. 23:46

<출처: cdn-ak.f.st-hatena.com>

- 세포이 항쟁은 1857년부터 1858년 사이에 인도에서 발생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적 저항 운동, 반란이다. 이전에는 '세포이 반란', '세포이의 난'등으로 불렸지만, 반란 참가자의 출신·신분이 다방면에 걸쳐서 인도 사회 전체에 퍼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서 최근에는 '세포이 항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영국 측의 호칭이고, 인도 측에서는 '제1차 인도 독립 전쟁(India's First War of Independence) 불린다.

영국은 1623년 '암보이나 사건(네덜란드령 동인도 말루쿠 제도의 암보이나 섬에 있는 잉글랜드의 길드 사무소를 네덜란드가 습격해 길드 사무소 직원을 모두 살해한 사건) 이후, 인도네시아를 포기하고 인도 진출을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 뭄바이, 마드라스(현 첸나이)를 거점으로 본격적으로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면서 무굴제국을 서서히 해체한다. 이때, 영국은 인도를 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원료 공급지와 자국의 목화 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했고 인도의 자원은 영국에 흡수되었으며, 산업혁명의 결과로 대량의 영국산 양질의 면제품이 인도에 유입되었다. 이것은 극단적인 인플레를 초래했고, 인도 국내는 혼란과 함께 토착 면공업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재산을 잃은 과거 지배계층부터, 목면공업 쇠퇴에 따른 하층민 실업자까지 계층을 막론한 많은 인도인이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고 항쟁 참여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인도는 다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원래 민족 관련으로 많은 불화가 있었고 무굴제국의 쇠퇴로 인해서 마라타 동맹을 비롯한 국내 세력이 반 독립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직적으로 영국에 대한 저항은 잠잠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 반란은 인도에서 최초의 민족적 항쟁으로 손꼽힌다.


<출처: istockphoto.com>

항쟁 발생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1. 영국 동인도 회사가 '자민다르 제도(인도에서 공식적으로는 토지소유자 일반, 보통으로는 대지주를 뜻한다)'와 '라이얏워리 제도(영국통치 하의 인도에서 시행된 토지 · 부과금 제도)'등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도입한 데 따른 농촌의 변화와 기존 지주층의 몰락.


2. 인도의 물가와 환율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세포이(19세기의 인도 용병)의 월급이 동결된 것이나, 승진이 늦어지는 문제 등으로 세포이들의 불만이 점점 쌓여만 갔다. 또, 세포이측이 종교적 이유로 해외 출정을 거부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세포이측과 영국 동인도회사 측의 갈등이 발생했다.


3. 인도 총독· 달후지의 실권 원리(양자를 인정하지 않는 원칙)에 의한 인도 번왕국의 무리한 병합이다. 그가 총독으로 재직했던 기간 동안 사타라 왕국, 나그푸루 왕국, 잔시 왕국 등 수많은 왕국이 병합됐다. 또 옛 마라타왕국의 재상 바지라오 2세의 양자나 나나 자히브도 실권 원리에 근거해서 아버지가 수급하고 있던 연금의 상속을 거부당했다.


4. 북인도 최대의 왕국인 뮤니어 아와드 왕국의 내정 문란을 이유로 '종속 동맹(제후국이나 지역 군벌의 휘하에 있던 각 지역의 군사를 동인도 회사가 직접 통솔하도록 하는 것으로 사실상 합병)'에 억지로 편입한 점을 볼 수 있다. 벵골 지역에서 아와드 출신의 세포이는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지역 출신자인 세포이들에게 다수의 반감을 샀다. 

또, 이 왕국을 보필하던 귀족, 관리, 군인과 같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한 상인·수공업자들도 생활터전을 잃게 된다. 아와드의 종속동맹으로 인해서 지주들은 땅을 몰수당했고, 그 수는 21,000명에 이르렀다.




<출처: 歴ログ -世界史専門ブログ - はてなブログ> 

항쟁은 1857년 5월 10일, 인도 북부의 도시 메루트에서 세포이들이 봉기를 시작했다. 세포이는 인도의 관습적 계급인 상위 카스트에 있는 힌두교도와 상류층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본국에서 새로 채용된 소총(당시까지의 활강 총과는 차원이 다른 정확한 명중도와 강력한 위력을 가진)인 '엔필드 총(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의 약포(전 장총에 장전하는 한발 분의 화약과 탄환의 세트를 종이 꾸러미에 싼 것)에 힌두 교도들이 신성시하는 소기름과 무슬림이 부정하게 간주하고 있던 돼지의 기름이 사용되었고, 이 총이 세포이에게도 배치된다는 소문이 돌던 것이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총기 기술 혁신의 첫 성과였던 엔필드 소총은 종이 약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약에는 방습 기름으로 발랐다. 약포를 이용해 엔필드를 장전할 때는 먼저 입으로 약포 끝을 물어서 화약을 총구에서 흘려보내고, 탄환과 탄압(약포를 입속으로 씹어 부드럽게 만든 것)을 눌러야 했다. 만약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전투 시에 종교적 금기를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기독교 개종을 위한 동인도회사의 속셈으로 보고 탄약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그런 행위는 징벌 대상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소, 돼지기름 관련 루머를 부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사 측에서는 의심이 가면 입으로 물어뜯지 말고 손으로 개봉해도 좋다고 했지만 세포이들의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다. 힌두교도로서는 신성한 소가 그런 목적으로 죽은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무슬림은 돼지기름을 손으로 만지는 일이 부정한 행위였다.

결국 세포이는 항쟁을 일으키게 되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계기에 지나지 않았고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서는 앞서 상술한 요인들이 컸다. 이들 세포이들은 정작 소돼지를 바른 것으로 알려진 종이 약포밖에 수중에 없을 때는 주저 없이 물어뜯고 만졌다고 한다. 힌두교도로서는 그들이 종이 포장을 물어뜯는 것과 관계없이 이미 소는 도살되었고, 무슬림에게 있어서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들 맘대로구만;)


<출처: psueda.at.webry.info>

메루트의 항쟁 부대는 다음 날인 11일 델리에 도착했고, 델리 주둔 세포이 부대와 합세해서 델리를 점거한다. 그리고 무굴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를 최고 지도자이자 황제로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영국과의 전쟁 개시를 표명한다. 바하두르 샤 2세는 그들에게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고, 그날 밤에 '힌두스탄(인도)의 황제'로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언문을 내렸다.

이 반란을 계기로 옛 왕후, 옛 지주, 농민, 도시 주민들의 반(反)영 세력이 종교·계급을 뛰어넘어 일제히 봉기한다. 칸푸르에서는 나나 자히브와 그의 무장인 탄티어 토프가, 잔시에서는 락슈미 바이가, 비하르에서는 대영주 쿤워 싱 같은 지도자가 일어서서 병사를 이끌고 영국군에 저항했다. 

또, 아와드에서는 캘커타에서 추방된 왕비 베굼 헤즐랫 마할이 아들인 비르지스, 카도르를 거느리고 아와도의 왕을 선언하면서 세포이, 농민, 영주들의 지지를 얻었다.

항쟁은 영국 직할령, 북인도를 중심으로 대략 인도의 3분의 2 인근 지역으로 확대했고, 병합된 아와드는 특히 그 기세가 거셌다. 또한 델리에서는 7월에 바크 칸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면서 항쟁군들의 사기가 고무되었고, 델리 방어전을 우세하게 이끌면서 델리에서는 한때 무굴제국의 국가 체제가 갖춰진 듯했다.


<출처: wall.kabegami.com>

그러나 내홍으로 반군의 지배지역 확대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세포이들은 고위직에 대한 경험이 없는 자가 대부분으로, 유능한 지휘관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게다가 세포이가 이탈하면서 병력 부족을 겪었던 영국은 주변 민족과 구 지배 계급을 회유하는 등, 정치적 공작을 펼친 결과 왕국 대부분을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네팔 왕국의 구르카병을 비롯한 용병들을 투입했으며 반란세력 진압을 위해서 조직을 추스르고 반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해 8월부터는 델리의 반란군은 열세로 돌아서면서 9월부터는 영국군의 델리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왕성인 델리 성에서 탈출하고 영국에 투항하면서 델리에서의 항쟁은 고작 4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이후 항쟁의 무대는 지방으로 넘어가게 된다. 메루트의 반란 이후, 항쟁은 인도 북부(특히 갠지스 강 유역)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항쟁 지방정권이 영국의 상대가 됐다.

유명한 격전지는 잔시, 괄리오르였는데 기병을 이끌고 친히 전투를 이끌었던 일명 '인도의 잔 다르크'인 왕비 락슈미 바이의 저항에 영국은 고전했고, 1858년 6월까지 싸움은 계속되었다.


<출처: wall.kabegami.com>

영국은 반란의 원인이 된 엔필드 총을 대량으로 배치했고, 부정확한 명중력과 짧은 사거리에서밖에 사격할 수 없던 구식 활강 총을 가진 항쟁군을 사정 거리 밖의 거리에서 정확히 사격하면서 전력, 전술 모두에서 항쟁군을 압도했다.

또 포로가 된 반군 병사에 대한 잔학한 처형(대포 포구에 묶어서 목제 포탄을 쏘아 신체를 찢어버린다)을 과시하면서 공포로 반군과 인도 민중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참고로 저 처형은 무굴제국의 처형방식으로 영국군이 그대로 보여준 것)

무굴제국 황제였던 바하두르 샤 2세가 선도자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도 영향을 끼쳤고, 락슈미 바이 등의 활약은 있었지만 세력이 미미해서 구심점을 잃은 항쟁군은 최종적으로는 개별로 차례차례 격파되었고 소멸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인 저항은 게릴라로 1859년 중반까지 지속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반란의 실패로 무굴 제국은 완벽하게 멸망하였고, 황제였던 바하두르 샤 2세는 유죄 판결을 받고 폐위되면서 버마로 유배된다. 한편 영국 정부는 한 회사에 인도의 거대한 영토를 맡기는 것은 한계로 보고, 이 반란의 모든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해산하고 인도를 국가 차원에서 직접 통치하기로 한다.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추대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을 선포하고 형식적,실질적으로 본국 정부가 인도를 통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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