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11일> 1955년 5월 11일 -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 2019. 5. 11. 23:35

<출처: ぽこあぽこ>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는 일본 국유 철도의 우다카(오카야마현 타마노시의 우노항과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의 다카마쓰항의 사이에 운항하고 있는 항로) 연락선(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해협이나 수로(水路)를 횡단하여 왕복하는 배) 시운마루호가 1947년 6월 9일 취항부터 9년에 걸쳐서 5차례 일으킨 사고총칭이다. 또한, 그중 2건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최대의 사상자가 생긴 1955년 5월 11일 5번째 사고를 가리키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5번째 사고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특히, 연락선의 안전 기준이 대폭 수정되거나 해상 보안부에 의한 정선 권고 기준이 엄격해졌고, 세토 대교 건설의 필요성을 단번에 높인 계기가 되었다(대교는 78년 착공, 88년 완공). 

<4번째까지의 사고>


<첫 번째 사고>

- 1950년 3월 25일, 오카야마현 다마노시에 위치한 우노를 정각보다 20분 늦은 0시 35분에 출항한 하행 화물 1021편 와슈마루(鷲羽丸)와, 다카마쓰를 정각보다 10분 늦은 0시 10분에 출항한 상행 화물 1020편 시운마루 0시 58분에 나오시마와 코진 섬에 낀 협소한 해역에서 충돌했다. 

와슈마루가 시운마루 측면에 충돌한 방식으로 시운마루는 전복됐으며, 1시 4분에 완전히 침몰했다. 탑승객 72명 중 7명사망했으며 그 후 시운마루는 인양되었고, 연락선으로 다시 복귀했다.


<2번째 사고>

- 1951년 8월, 다카마쓰 항 내에서 제2유즈마루(第二ゆず丸)와 충돌함. 사고 후 레이더 설치.


<3번째 사고>

- 1952년 4월, 다카마쓰 항구 바깥에서 사석(捨石)에 접촉. 사고 후 자이로 컴퍼스(자이로 축을 남북방향으로 계속 향하게 하는 장치) 설치.


<4번째 사고>

- 1952년 9월, 다카마쓰 항 내에서 후쿠라마루(嘉久丸)와 접촉.


<5번째 사고>

<출처: 昭和毎日 - 毎日新聞>

충돌 지점: 34° 22′ 36.01″ N, 134° 0′ 57.83″ E 

침몰 지점: 34° 22′ 36.0978″ N, 134° 1′ 2.0969″ E


1955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상행 제8편으로 운항 중이었던 같은 우다카 연락선 하향 153편 대형 화차 운항선인 제3우코마루(第三宇高丸)호와 충돌, 침몰한다. 국철 전후(태평양전쟁 이후) 5대 사고(国鉄戦後五大事故)중 하나로, 수학 여행 중이었던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기노에 미나미 정립(町立, 町은 일본의 지방공공단체 중 하나로 시,촌과 동급이다) 학교(現 도요타군 오사키카미지마정 정립 키노에 소학교)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사망자 168명이 발생했다.


<출항에서 충돌까지>

<출처: 위키피디아>


5월 11일: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 해상에서 짙은 안개 경보가 발표되고 때에 따라서는 시야 50m 이하였다고 한다.


오전 6시 10분: 우노항에서 대형 화차 운항선 제3우코마루(총톤수 1,282t)가 하향 153편으로 출항했다. 출항할 때 날씨는 흐렸지만, 이때 안개도 바람도 없었으며 파도는 잔잔했다.


6시 20분 지나서: 다카마쓰 지방 기상대가 발표한 짙은 안개 경보가 무선 전화로 알려지면서, 우코마루호는 레이더를 준비한다.


6시 35분 지나서: 시계(視界)는 400m에서 500m가 되었고, 제3우코마루는 안갯속 신호 발신을 개시한다.


6시 40분: 시운마루호 선장은 브릿지(엔진 및 선체 전체를 컨트롤 하는 곳) 앞에서 시계를 확인한 시점에서 400m에서 500m 앞의 어선이 눈으로 보이기에 출항을 결정한다. 승객 781명, 승무원 60명을 태우고 상행 8편으로 다카마쓰 항을 출항했다.


6시 51분경: 불과 10분여 만에 안개가 짙어지면서 시계는 100m 정도로 된다. 제3우코마루 항해사가 레이더상으로 2,500m 함수 방향 지시 선에 시운마루호를 확인한다. 이때 제3우코마루는 해상 충돌 예방법에 준거, 침로(선박·항공기 등의 항행 방향과 자오선[子午線]이 이루는 각도)를 140도로 맞춘다.


6시 53분: 거리 1,700m로 접근, 제3우코마루에서 시운마루의 모습은 여전히 눈으로 보이지 않아서 넘어갔지만 시운마루의 안갯속 기적음좌현 방향에서 들렸기 때문에, 우다카마루호는 동서 방향으로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하고, 전속력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6시 56분: 제3우코마루 좌현 30도 100m 전방에 갑자기 시운마루호왼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진로를 바꾸는 것을 확인한다(둘 다 같은 방향으로 접근한 것). 이것은 사고 후 해난심판에서 최대의 초점 중 하나가 된다. 제3우코마루 선장은 즉시 기관 정지, 긴급회피를 시도했으나 제3우코마루호의 뱃머리가 시운마루호 우현 선미 부근에 격돌했다.


<사고 상황과 구조 활동>

<출처: ikumen-smile.com>


- 제3우코마루의 선수는 시운마루 우현 기관실을 70도 각도강타했다. 이 기관실에서는 엔진룸의 복수기(터빈이나 실린더 내에서 일이 끝난 수증기를 등압 냉각 응축시켜 저압 포화액으로 복원하는 장치)와 주배 전원장치폭발했다. 즉시 선내정전되었고, 모든 전등이 꺼졌다. 동시에 높이 4.5m, 최대 폭 3.2m, 선내 3.5m의 우현대 발생한 구멍에서 기관실에 큰 침수가 시작되었다. 

선장은 별다른 지시도 없이 손상된 곳을 확인하기 위해 일단 브릿지를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가면서 엇갈린 선원에게 "앗싸!(뭔...)" 라고 말하고는, 브릿지로 돌아와서는 끝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선원들은 수밀문(배의 수밀 격벽의 출입구에 장치하여, 닫으면 물이 새지 못하게 된 문)을 폐쇄하려 했지만 모든 전원이 떨어진 상태여서 작동하지 않았고, 기관실 수밀문을 수동으로 폐쇄하려 했으나 이미 함미가 침몰당한 상태여서 포기했다. 정전으로 인한 어둠의 상황과 좌현으로 급속히 기울어 가는 선내에서 객실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승객우현으로 몰리면서 힘이 없는 아이들 다수가 선내에 남겨졌다.



<출처: Youtube>


- 제3우코마루 측은 충돌 후, 시운마루호 침몰예견했다. 그래서 피난하는 시운마루호 승객들을 위해서 침수 완화시도했다. 승객들은 차례로 제3우코마루로 달아났지만, 선내에는 다수의 학생이 남아 있었다. 이들을 인솔한 교사 중에는 우코마루에 일단 피신했다가, 아직 대피하지 못한 아이를 돕겠다고 시운마루호로 돌아가서 결국 희생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늦게 도망친 이유로서 수학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던 중이라, 가족들에게 줄 소중한 선물 등을 잃지 않겠다고 한 것과 주위 어른들에게 밀리는 등 신속한 탈출어려웠음을 들 수 있다. 또, 개인구명동수납고는 아이들 손에 닿기 어려운 위치에 있어서 입수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도 있었다. 선원들은 가까이 있는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배포했지만, 사용법을 모르거나 배울 틈도 없이 바닷속에 내던진 아이가 많았던 점도 피해를 키웠다.

이 와중에 아사히신문 소속 사진기자도움을 요청하는 승객들을 촬영했고 사진은 신문과 주간지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사고의 비참한 상황이 알려지자, 왜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고 촬영만 했느냐비판이 집중돼 인명구조와 보도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되었다.

시운마루호는 충돌로부터 몇 분 후인 7시 2분경, 승무원 등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침몰했다. 이때 선장은 퇴선거부하고 남은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사고 당일 지역 어부였던 구니타로(島谷国太郎)는 짙은 안갯속에서 다카마쓰 항 앞바다로 나가 오징어를 잡던 중이었다. 그때 시운마루호가 이 작은 배의 옆을 지나서 안갯속에 안 보이게 된 직후에 큰 충돌 소리가 들렸고, 급히 그 방향으로 1.5톤의 작은 어선을 몰아서 사고 발생 5분 만에 현장으로 도착했고, 곧바로 구호 활동을 개시했다.

조난자로 배가 꽉 차면, 제3우코마루로 옮기면서 이런 식으로 바닷속 조난자를 도왔다. 다카마쓰 항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그사이에 50명 가까운 조난자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오카야마현 고지마군 고토우라정(현 구라시키시 고지마 지역)의 부녀회 85명구조 활동에 힘썼고 그 활동이 평가되어서 문부성(현 문부과학성)의 표창과 금일봉을 받았다.


<희생자>

1. 시운마루 관계자: 2명 (선장 외 한 명)

2. 일반 승객: 58명

3. 수학여행 관계자: 108명 (학생 100명[남자 19, 여자 81], 인솔 교사 5명, 관계자[부모] 3명)

- 에히메현 미요시정 쇼나이 소학교: 30명(아동 77명 중 29명, 학부모 협회 회장 한 명)

- 고치현 고치 시립 난카이 중학교: 28명(3학년 117명 중 28명)

- 히로시마현 기노에 미나미 소학교: 25명(6학년 97명 중 22명, 인솔 교사 3명)

- 시마네현 마쓰에 시립 가와츠 소학교: 25명(6학년 58명 중 21명, 인솔 교사 5명 중 2명, 부모 3명 중 2명)

특히 학생의 희생자 100명 81명여자아이였다. 현장에서는 차례차례로 학생들의 시신이 옮겨졌는데, 처참한 모습에 당시 수색활동을 참여한 사람들 상당수가 오랫동안 그 상황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고 원인과 심판>

<출처: mlit.go.jp>


- 1955년부터 고베 해난 심판소에서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의 해난 심판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1956년 1월에 판결과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재결(행정심판 청구사건에 대하여 행정심판위원회가 심리. 의결한 내용에 따라 재결청이 판단하는 행위)에 불복, 1960년 6월부터 고등 해난 심판청에서 제2심이 개정되면서 8월에 판결 선고가 열렸다. 재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충돌사건은 시운마루호 일등 항해사 겸 선장인 나카무라 마사오 및 제3우코마루호 선장 미야케 마코토의 운항에 관한 각 직무상 과실에 기인하고 발생한 것이다'


주요 원인은 시운마루호의 항행에 있다고 보았으나, 선장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런 항해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결국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해서 추정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원인은 충돌 직전의 좌반전이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직전의 레이더로 지침의 살짝 오른쪽으로 제3우코마루호가 확인된 것이 이유가 아닐까 추정된다.


<주요 원인>

1. 시운마루호가 다카마쓰 항 출항 직후, 500m 직진 후 북서쪽으로 기준 항로를 정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100m 정도에서 북서쪽으로 침로를 바꾼 것.

2. 현장 해역이 짙은 안개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시운마루호, 제3우코마루호가 함께 해상 충돌 예방법 규정에 어긋나는 과속으로 진행한 것.

3. 시운마루호의 나카무라 선장은 짙은 안개로 항행 시, 눈으로도 만반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음에도 레이더 관측에만 전념한 것.

4. 6시 55분경, 갑자기 엔진 정지되었던 점. 이는 짙은 안개로 일단 속력을 낮추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5. 충돌 직전, 갑자기 침로를 변경한 것.


사고 발생부터 8년 후인 1963년 3월 19일, 다카마쓰 고등 법원에서 시운마루호 및 제3우코마루 선장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검찰과 피고 모두 대법원에 대한 상고가 이뤄지지 않아서 그대로 판결이 확정됐다.


<사건 이후>

1. 이 사고전년에 일어난 토야마루 침몰사고(일본의 배 토야마루가 태풍 마리에 의해 침몰한 사건으로 무려 1159명사망했다)와 맞물려 국철에 큰 교훈을 주며 연락선 선체구조전면 재검토가 실시됐다. 또한, 기존 연락선에 의한 차량 배송이 완전히 중지됨에 따라서 상하 항로완전 분리가 실시되었다. 또한 사고가 연달아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가사키 소노스케(長崎惣之助, 1896 ~ 1962) 국철 총재가 책임을 지고 사임해, 후임에는 소코 신지(十河信二, 1884 ~ 1981)가 취임했다. 또 항로를 관할하는 시코쿠 지사에는 새로 우다카 선박 관리부가 설치됐다.

2. 시운마루호 사고를 듣고 쇼와 일왕이 사고의 희생자 및 이재민을 위한 금일봉을 전달했다.

3. 사고 후, 해상보안부의 정선 권고 기준이 엄격해졌고 우다카 연락선은 일절 인명사고를 일으키지 않게된다. 그러나 초여름부터 장마철 짙은 안개에 걸맞게 자주 정선 권고가 내려진 것이 수송상의 장애가 되면서, 세토 대교 건설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 세토 대교는 완성되었고 시코쿠의 관광이나 경제에 혜택을 가져왔으나 혼슈에 대한 젊은층의 유출을 초래했다. 특히 가가와 현에서 오카야마 현을 중심으로 인구 유출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4. 시운마루호 사고와 더불어서 그해 7월미에현에서 발생한 교호쿠 중학교 수난 사건(橋北中学校水難事件, 해당 중학교 여학생 36명이 해안에서 수영훈련을 하다가 익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문부성의 지시로 전국 초중학교학교 수영장설치가 진행되었고 초중학교의 체육 과목에서 수영필수지정하기에 이른다.


<출처:위키피디아>

현재는 위령비가 가가와 현 다카마쓰 시 사이호초에 건립돼 사고 기억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교사 3명, 아동 22명의 희생자가 나온 미나미 소학교 교정에는 1956년 4월 28일에 조난자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희생된 교사, 아동의 영정 사진 등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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