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HISTORY - The Ohio State University>
- 요제프 디트리히(Josef Dietrich, 1892년 5월 28일~1966년 4월 22일)는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무장 조직, 무장 친위대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친위대 상급 대장 및 무장 친위대 상급 대장이었다.
요제프 디트리히는 1892년 5월 28일 독일 제국 영방(領邦,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을 가리키는 말), 바이에른 왕국 슈바벤 현 하방엔에서 아버지 펠라기우스 디트리히(Pelagius Dietrich)와 어머니 사이에서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참고로 동생 두 명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다.)
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개막하자 8월 6일에 바이에른 제7야전 포병 연대 루이트폴트에 입대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0월에는 바이에른 제6야전 포병 연대 페르디난트로 전속되었고, 서부 전선인 벨기에 플란데런과 이에페르에서 싸우다가 11월에 포탄 파편으로 오른발을 다쳤다.
1915년 1월 중순, 존트호펜의 포병 학교에서 하사관 훈련을 받았고 2월에 제7야전 포병 연대에 복귀한 요제프는 다시 서부 전선으로 나섰으나, 프랑스 솜에서 파편이 머리에 맞는 큰 상처를 입는다. 이후, 부상에서 회복한 요제프는 제3군 제2돌격대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는 참호전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 특히 우수한 병사들이 선발되었고 계급과 관계없이 모두가 숙식을 함께하며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이 부대에서의 경험은 훗날 자신의 제1SS기갑사단의 운영에 영향을 주었고, 이때의 활약으로 그는 1917년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다.
<출처: 트위터 @obgf_ditters>
1918년 2월 19일, 영국군에게 노획한 전차 11량으로 구성된 바이에른 돌격 전차 분견대로 배치되었고 마크 IV전차 모리츠호의 기총수의 임무를 맡았다.
3월 21일 프랑스 셍껑땅으로 전차전 첫 출전을 장식한 요제프는 5월 31일, 프랑스군에게 전차가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리츠호를 폭파했고, 그 와중에도 탈출할 때 증류주를 챙겨서 대원들로부터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6월에는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하였고, 7월 18일에는 프랑스 빌레르 코트레 근처에서 처음으로 영국 전차 파괴에 성공한다. 그리고 11월 1일에는 발랑시엔에서 1차 대전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펼쳤다.
독일 혁명의 한창때인 1918년 11월 9일에는 제13돌격 전차 분견대의 의장에 취임했고, 11월 20일 바이에른 제7야전 포병 연대로 복귀했지만 다음 해인 1919년 3월 26일에 퇴역한다. 당시 최종 계급은 부조장(Vizewachtmeister)이었다.
<출처: eestileegion.com>
1919년 4월,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간 요제프는 10월 1일에 바이에른 지방 경찰(Bayerische Landespolizei)에 입대한다.
1920년에는 재향 우익 의용군인 오버랜드 의용군에도 입대하면서, 경찰업무를 결근하면서 의용군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21년 5월부터 10월까지 폴란드군의 실레시아 침공에 맞설 전쟁에 동참하였다. 그 후, 경찰 업무로 돌아간 요제프는 1924년에 경찰 대위(Hauptmann)로 승진했지만 1927년에는 경찰을 퇴임하였고, 그 후로 나치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담배 회사나 주유소 등에서 일을 했다.
1923년 11월 뮌헨 폭동 당시, 오버랜드 의용군의 멤버로 참여한 요제프는 1928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한다(당원 번호 89,015). 입당 나흘 후의 5월 5일에는 친위대(SS)에도 입대(대원 번호 1,177)하는데, 1928년 당시 친위대는 하인리히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1945)가 아직 친위대 전국 지도자가 아니었고 대원수는 28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당 간부의 호위와 당 집회 시 경비 등이 당시 친위대의 주요 임무였으며, 경찰관 경력이 있던 요제프는 입대와 함께 쾌속 승진한다.
<출처: 유튜브>
뮌헨에 본거지를 둔 친위대 제1중대(SS-Sturm I)에 배속되었으나, 곧 해당 중대의 지도자(Führer)로 임명되었다. 1928년 8월에는 상급부대인 제1친위대 연대인 뮌헨(SS-Standarte "München") 이 편성되어서 해당 연대의 지도자가 된다.
뒤이어 1929년 9월에는 제1친위대 연대의 상급부대인 친위대 여단 바이에른(SS-Brigade "Bayern")이 편성되었고, 여단의 지도자로 승격되었으며 1930년 7월에는 제1친위대지구(SS-Abschnitt I)로 개편되는 친위대 상급 지도자 지구인 '남방(SS-Oberführer Abschnitt "Süd")'의 '상급 지도자(SS-Oberfunhrer "Sund")'로 취임하면서 이 직함을 얻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거창한 직함과 다르게 당시 나치당은 활동 자금이 부족한 고달픈 상태였기에 1929년부터 1930년까지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막스 아만(Max Amann, 1891~1957)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수입을 얻어야 했다.
<출처: footage.framepool.com>
1930년 10월 12일에는 바이에른 주에서 선출의 나치당 국회 의원이 되었고, 1931년 7월 중순에는 브라운슈바이크에 본부를 둔 제4친위대 지구가 창설되었고 그 초대 지도자로 취임한다. 이어서 1932년 7월에는 뮌헨을 중심으로 바이에른 주 뷔르템베르크 주, 바덴 주등 독일 남부의 친위대를 담당하는 친위대집단 남방 (SS-gruppe "Sund")이 편성되었고 그 지도자로 승격한다. 그리고 1932년 2월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호위 부대 친위대인 SS특무부대의(SS-Begleit-Kommando"DerFührer") 지도자로 취임한다.
1932년 10월부터 1933년 4월은 함부르크를 본거지로 독일 북부 친위대를 관할하는 친위대 집단 '북방(SS-gruppe "Nord")' 지도자를 맡았고, 1933년 4월부터 수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독일 동부의 친위대를 감독하는 친위대 집단 '동방(SS-gruppe "Ost")'의 지도자가 된다. 이 친위대 집단 동방은 1933년 11월에 친위대 상급 지구 '동방(SS-Oberabschnitt"Ost")'으로 개편되었고 나아가서 1939년에는 친위대 상급 지구 '슈프레"(SS-Oberabschnitt"Spree")' 로 개편되면서 요제프는 친위대 지도자의 자리를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 5월까지 수행한다.
나치당 정권 장악 후인 1933년 3월 17일, 히틀러는 요제프에게 120명의 선발된 친위대원으로 구성된 호위부대, 친위대 사령부 위병대 '베를린(SS-Stabswache "Berlin")'의 창설을 명령한다. 이 부대는 두 개 중대로 증원되자, 리히터펠테에 있던 옛 사관학교를 병영으로 정하고 여기에서 3개 친위대 중대가 더해지면서 대대 편성으로 포츠담의 국방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으며, 대우와 급료도 군과 동등했다.
<출처: 유튜브>
또 초센과 윳타보크의 친위대 대대와 합류하면서 연대로 새롭게 편성된다. 그리고 9월 3일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 연대(Adolf Hitler-Standarte)'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1934년 4월 13일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제1SS기갑사단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약칭 LAH)'의 이름이 주어지면서 명실상부한 히틀러 친위부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초기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키 180㎝ 이상 등의 엄격한 입대 조건이 있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Ludwig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 1947~1934)'의 사후에 국방군이 히틀러에게 맹세한 충성 선서보다 더 강한 충성 선서를 히틀러에게 바쳤다. 그래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다른 부대를 능가하는 엘리트 부대라는 인상이 깊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실질적으로 친위대 전국 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독립한 존재였으며, 오직 히틀러만 위한 호위 부대였다. 그 때문에 발족 당시부터 그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요제프와 힘러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출처: 유튜브>
'장검의 밤(아돌프 히틀러가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Ernst Röhm, 1887~1934)'과 반(反) 히틀러 세력을 숙청한 사건) 사건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돌격대 간부 숙청의 실행 부대가 되기로 예정되면서 국방군으로부터 사전에 무기를 공급 받고 무장 강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숙청 시작 전날인 1934년 6월 29일에 요제프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뮌헨으로 급히 향했다.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카우퍼링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의 두개 중대와 합류하고 에른스트 룀 이하 돌격대 간부가 모아지고 있던 바트비제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진창으로 국방군 트럭이 움직일수 없게 되는 바람에 바트비제로 합류할수 없게 되었다.
6월 30일 오전 6시 반경, 결국 히틀러는 요제프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수하의 친위대원으로만 바트비제의 돌격대 간부 숙소에 돌입하고, 일시에 체포한다. 요제프는 오후가 되어서야 뮌헨의 나치당 본부에 있던 히틀러 앞에 모습을 보였다.
<출처: 유튜브>
히틀러는 도착 지연을 질책하면서, 체포한 돌격대 간부 중 6명의 총살을 요제프에게 맡겼다. 명령을 받은 요제프는 오후 6시에 돌격대 간부들이 수용되어있던 뮌헨의 슈타델하임 교도소 도착하면서 6명의 처형을 시작했다.
이때 처형된 돌격대 간부 중 한 사람이었던 아우구스트는 "무슨 짓이냐! 우리는 결백하다!"라고 외쳤지만 요제프는 "귀관들은 총통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일 히틀러!"라고만 대답했다. 다만 그는 총살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중에 자리를 벗어났고, 후에 그는 이때의 일에 대해서 "아우구스트의 처형 순번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자리를 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라고 말했다.
한편 베를린에 머물던 라이프슈탄다르테의 대원들은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정보부(SD)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1904~1942)등이 결정한 숙청 대상자를 리히터펠테 사관학교에서 총살한다. 요제프는 숙청과정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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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2월 14일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와 친위대 정치 예비대(SS-Politische Bereitschaft)로써 SS특무부대(SS-Verfügungstruppe, 약칭 SS-VT)가 편성된다. 요제프는 형식적으로 특무부대 라이프슈탄다르테 연대 의 연대장이 되었다. 그후, 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에 있어서 라이프슈탄다르테가 친위대에서 유일하게 종군했으며 라이프슈탄다르테는 가장 먼저 자르브뤼켄에 들어간 부대였다.
1936년 10월 1일, 전(前) 국방군 중장인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1880~1972)가 특무부대 총감에 취임했는데, 요제프는 하우서보다 계급이 높았고 계속 히틀러만의 독립적인 부대로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자 힘러가 특무부대 총감부의 지휘에 따르도록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며 충고한 적도 있었다.
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에도 라이프슈탄다르테가 친위대로는 유일하게 종군했다. 요제프가 이끄는 1개 자동차 대대가 오스트리아에서 진주하면서 활약했으며, 1938년 10월에 있던 주데텐란트 병합시 진주에도 참가하였다.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우선으로 기계화(자동차 화)를 실시하면서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친위대 전투 부대 중 유일하게 기계화된 부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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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1일부터 시작되는 폴란드 침공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남방군집단예하 제10군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국방군에게 가혹한 임무를 강요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전투를 진행했다. 특히, 폴란드 쿠트노에 있었던 브주라 전투는 남하하는 폴란드군을 막아서면서 큰 손해를 입게 되면서도 바르샤바로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요제프는 폴란드전에서 1939년 판 2급 철십자 훈장과 12급 철십자 훈장의 약장을 받았다.
그러나 국방군으로부터의 평가는 낮았다.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Johannes Blaskowitz, 1883~1948) 국방군 대장은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평범한 부대다. 경험 부족으로 뛰어난 부분이 없다"라고 평가했으며, 폴란드전 남방군 집단 참모장이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Fritz Erich von Lewinski genannt von Manstein, 1887~1973)는 요제프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무지한 군사적 능력에 황당해 하였다고 한다. 다른 육군 장성은 "디트리히의 부대는 진군 도중에 함부로 총을 쏘면서, 정해진 규칙처럼 폴란드 마을들을 불태웠다"라면서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1940년 5월부터 시작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서는 B군 집단[페도어 폰 보크(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1880~1945) 상급 대장] 제18군[게오르크 폰 퀴흘러(Georg Karl Friedrich Wilhelm von Küchler, 1881~1968) 대장)예하로 배속되어서 네덜란드 침공 부대에 합류했지만, 다시 국방군의 선도 부대가 되었다.
<출처: pub조선>
5월 10일 개전과 함께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네덜란드 영토를 매우 빠른 속도로(급피치) 진군하고 에이설 강을 건너서 호엔을 점령한다. 뒤이어 덴하그로 진군하면서 로테르담에서 네덜란드군에 포위됐던 공수 부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항복 후에는 제19기갑 군단[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 대장]에 소속되어서 북부 프랑스의 됭케르크 전투에 참여한다. 이때 독일군은 히틀러에 의해서 됭케르크 진군으로의 정지 명령을 받았지만, 요제프는 총통의 명령을 무시하며 전진, 운하를 건너서 텐 고지를 점령한다(상관인 구데리안도 진군 정지 명령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요제프의 독단적 행동을 묵인했다).
그 후 남부 프랑스로 진격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Paul Ludwig Ewald von Kleist, 1881~1954) 대장의 장갑 집단의 전위로 국방군 부대를 먼 후방에 남겨둔 채 세인트 에티엔느까지 진격하면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프랑스 가장 깊숙한 곳까지 진격한 부대가 되었다.
이러한 공적에 의해서 요제프 디트리히는 1940년 7월 5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수여된다. 또, 그해 8월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히틀러로부터 독일군의 선봉으로서 떠받들어지고, 여단 편성을 인정받아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 등에서 병력 증강을 받으며 새롭게 여단을 편성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1941년 4월, 발칸 반도의 전투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제12군[빌헬름 리스트(Wilhelm List, 1880~1971 대장] 예하로 참가한다. 프랑스 메스에서 불가리아의 소피아로 이동한 여단은 1941년 4월 6일에 유고슬라비아 남부 침공을 개시하고, 스코페와 비톨라를 함락시킨 후에 4월 10일 그리스로 진격했다.
클레이디온 고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과 뉴질랜드군, 그리스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지만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 1910~1961)등, 우수한 부하들의 활약으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굉장한 속도로 그리스를 점령한다. 4월 23일에는 그리스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영국군은 크레타 섬을 벗어났다.
그리스 전(全)군의 항복 3일 전인 4월 20일, 요제프는 16개 사단으로 구성된 그리스 이피로스(요제프의 부대에 의해서 퇴로가 끊긴 상태였다)의 항복 제의를 독단적으로 수리했고, 그리스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지 말고 즉시 귀환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 일로 그리스전에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용맹하면서 공정한 부대'라는 높은 평가를 얻게 된다.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아테네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한 후, 프라하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사단 편성을 받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1941년 6월 말에 발동된 소비에트 침공인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남방 군집단[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 원수]에 소속되었는데, 스탈린 라인을 돌파하고 키예프 방면으로 진군하였고 우크라이나 우만 포위 전에서 10만 명의 소련 병사를 포로로 삼는 것에 이바지한다.
8월에는 항구 도시인 미콜라이프를 점령하고, 9월에는 단기간으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11군 예하로 크림 반도 전투에 참가하였다. 10월에는 항구 도시 로스토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11월에는 일시적으로 로스토프를 점령했지만, 곧 소비에트 군의 반격으로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휘청거렸다.
1941년 12월 31일, 요제프는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상했고 그 후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도네츠 지방에서 방어선을 유지했지만, 소모가 심해지자 1942년 봄에 스타리노 지구로 병력을 옮겼고, 이어서 같은 해 6월에는 점령지 프랑스로 되돌아가서 병사들의 휴양과 병력 보충을 받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동부전선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전투는 육군에서도 높이 평가받았지만, 동부전선에서는 이들의 잔학성이 두드러졌다. 1942년 4월에는 6명의 동료를 죽인 보복으로 4,000명의 소련군 포로를 학살하는 참극을 일으킨다.
1943년 1월,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지만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독일 제6군의 패배와 소련군이 대반격으로 치고 나올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친위대 기갑 군단이 편성되어서 라이프슈탄다르테도 그 예하로 소속된다.
친위대 기갑 군단은 1943년 2월, 하리코프 공방전에 투입됐다. 이 전투에서 뛰어난 부하들의 용전과 상관의 지휘에 힘입어서 소련군 52개 사단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고,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히틀러는 지휘관인 파울 하우서와 요제프를 찬양했고 이 전공으로 그는 1943년 3월 14일에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수여된다.
1943년 7월에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지만, 소련군의 거센 저항으로 막혔다. 그 직후 라이프슈탄다르테 사단장직을 떠나서 두 번째 SS기갑 군단으로 편성된 제1SS기갑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된다. 요제프는 8월부터 9월까지 독일군이 점령한 북부 이탈리아에 파견되면서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를 감독했다.
<출처: www.newsweek.pl>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열세로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자, 히틀러는 요제프와 제6SS기갑군을 헝가리로 전출시키고, 다가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지시한다. 하지만 이미 전력은 완전히 소모된 상태였으며, 진군 20km 만에 소련군의 반격으로 작전은 좌절됐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면서 소련군은 독일령 오스트리아 빈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히틀러는 요제프의 제6SS기갑군에 대해서 격노하면서 1945년 3월 27일에 사단 이름이 들어간 소매기장의 박탈을 명령했다. 요제프는 이에 격노하면서, 측근의 장교들에게 "훈장을 모두 오줌통에 쳐넣고 사단의 소매 기장을 두른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총통 명령을 무시하고 제6SS기갑군을 오스트리아 쪽으로 전진한다.
제6SS기갑군은 추격하는 소련군을 뿌리치면서 미군의 전선에 도달, 1945년 5월 9일에 미군 제36보병사단에 항복을 제의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부하를 구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전후에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전후 소련에서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요제프였지만 미국은 소련에 그의 신병을 넘기지 않았다. 1946년 초, 요제프는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1915~1976) 등 72명의 무장 친위대원과 함께 벨기에 말메디에서 미군 포로를 학살한 혐의로 독일 다하우의 미군 군사 법정에 기소된다. 그러자 룬트슈테트과 구데리안 등이 요제프의 변호를 위해서 증언대에 선 결과, 요제프는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1년에 2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5년 10월 22일에 집행 유예로 란츠베르크 암 레히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56년 8월, 장검의 밤 사건 당시 돌격대 간부 6명의 살인 방조(정범은 히틀러)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뮌헨 법원에 기소되어서 18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1959년 2월에 건강 상태를 이유로 석방된다.
그 후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파울 하우서 전 친위대 상급 대장과 함께 옛 무장 친위대원 상호 부조 협회의 활동에 종사하다가 1966년 4월, 74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루트비히스부르크 시 당국에서는 공공시설에 대한 대여를 거부했지만, 7,000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이 되었다. 그중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핀란드 등에서 온 전 무장 친위대원들이 4,000명이나 포함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모저모>
1. 디트리히의 키는 158㎝로 그 당시 기준으로도 작은 키였다. 한편 자신인 호위해야 할 인물인 히틀러는 173㎝였다. 일부에서는 170cm는 되었다고 증언한다.
2. 부사관 출신이기 때문에 전문교육을 받지 못한 점도 있어서 군인으로는 능력이 별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그를 심문한 미국군 장교 로버트 E. 메리엄(Robert E. Merriam, 1918~1988)에 따르면 아르덴 공세에서 자신의 예하 부대가 수행한 내용에 대해서 거의 몰랐고, 작전 전체에 관한 매우 일반적인 지식조차 없었다고 한다.
3. 히틀러의 개인적이고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으며, 종종 그 지시를 무시해도 처벌받기는커녕 계속 승진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히틀러는 디트리히를 독일의 명장인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Georg von Frundsberg, 1473~1528) 한스 요아힘 폰 지텐(Hans Joachim von Zieten, 1699~1786), 빌헬름 폰 자이들리츠(Friedrich Wilhelm von Seydlitz, 1721~1773) 에 필적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4. 대전 말기에 이를 무렵, 디트리히는 원수 지휘봉을 원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승진을 청원했다. 이를 받아들인 히틀러는 '민족원수(Volksmarschall)' 신설을 지시했고, 아르덴 대공세를 승리할 경우, 민족원수로 승진과 함께 기록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대공세는 실패로 끝났고 계획도 폐기되었다.
5. 부하 장병들로부터는 두터운 신뢰와 인기를 누리며 '파파 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후에도 부하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우회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다.
6. 군복을 규정대로 착용하지 않는 버릇이 있어 마음대로 개조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국방군의 장성을 본떠서 규정에는 은자수인 친위대의 국가휘장을 국방군 장성 규정인 금자수로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7. 히틀러 암살 계획의 혐의로 체포된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1897~1984) 중장을 석방하기 위해서 국가 보안 본부에까지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8. 신앙은 가톨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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