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0월 20일> 2011년 10월 20일 -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살해되다>

!@#^& 2019. 10. 19. 20:19


-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 1942~2011)리비아독재자로,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왕정폐지하고 리비아의 국가원수·국가평의회 의장·총리·국방부 장관에 오르면서 리비아를 통치했다. 

그렇게 40년 넘는 기간 동안 리비아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카다피는 2011년 2월 15일에 발생한 카다피에 대한 (反)정부 운동리비아 내전으로 격화되면서 반년 후 8월 23일, 반카다피 세력리비아 과도국가평의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수도 트리폴리함락하면서 그의 몰락이 사실상 확정된다.

카다피의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Al-Jamāhīriyyah al-ʿArabiyyah al-Lībiyyah aš-Šaʿbiyyah al-)은 사실상 붕괴했지만, 카다피는 몸을 숨기면서 결사 항전하는 자세를 보여주었고 국가평의회가 정한 9월 9일까지의 투항 기한이 지나도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결국 카다피는 10월 20일 자신의 고향 시르테(Sirte)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번 시간은 카다피 최후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카다피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 정확한 좌표는 31°11'44.0"N 16°31'17.0"E>


10월 20일 오전 8시, 국민평의회가 카다피 세력 마지막 거점이 된 시르테에 공격을 개시한다. 전투는 약 1시간 반 만에 마무리되었고 카다피 세력은 제압되었다.

그때, 2개월 동안 시르테에 잠복 중이던 카다피는 남아프리카인 등으로 구성된 호위대 수십 대차량 대열을 통해서 도피시도했으나 당연히 들킬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공군 전투기미라주 2000(Dassault Mirage 2000)미 공군의 무인 공격기 RQ-1프레데터(RQ-1 / MQ-1 Predator)공습을 받는다.

이 때문에 차량 행렬을 급히 떠났지만, 반카다피 세력에 의해 체포된 카다피는 당시 황금제 권총 2정자동 소총을 갖고 있었고 카키색 제복을 착용,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살아 있었으나 그 후 부상당해 사망한다(사망 경위는 후술)당시 69세였으며, 피투성이가 된 카다피로 추정되는 인물의 영상알자지라(Al Jazeera)를 통해서 방송됐고, 휴대 전화로도 해당 영상이 촬영된다. 

이날, 마무드 지브릴(Mahmoud Jibril, 1952~) 과도수상의 검시 결과, 카다피는 머리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된다. 또, 카다피의 혈액을 채취하고 DNA 감정을 실시한 결과 시신이 카다피 본인으로 확인된다.


<카다피 사망 직전, 주민 및 반정부 세력에게 붙들려가는 모습이다>


체포될 당시 카다피의 발언으로는 [쏘지 마라],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던 것이 알려졌다. 그러다가 반카다피 세력 병사에게 둘러싸이자 [아들들이여, 죽이지 말아주게]라고 목숨구걸했다고 알려진다. 

또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너희는 죄를 짓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들, 이런 일이 용서될 줄 아느냐! 알라(신)가 용서하지 않는다!]라고도 발언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죽음 직후 카다피를 즉시 매장할지, 당분간 냉동 보존할지, 매장할 때는 장소를 어디로 할지 논란이 일었다. 이슬람교계율로는 사후 24시간 이내안장해야 하는데, 반카다피 세력 내에서 갈등이 있었고 일반인이 카다피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며칠 동안 냉동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매장 시에는 카다피 지지파성지가 되지 않도록 매장 장소극비로 정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며칠의 시간이 걸려 매장의 날이 늦어졌다.

10월 21일부터 24일까지 카다피의 시신은 미수라타(Misurata)에 있는 쇼핑센터냉장실에 안치됐으며, 일반 시민공개된다(참고로 구글 등지검색하면 해당 사진도 찾아볼 수 있다)

일반 공개를 마친 뒤 카다피의 시신은 사망한 다섯째 아들과 함께 사막 지대비밀리에 안장되었는데, 카다피의 유족과 그의 출신 부족은 고향인 시르테에서 매장하길 원했다.


<2011년경 시르테의 어느 건물, 찢긴 카다피의 사진>


카다피의 사망에 대해서는 상기한 대로 검시DNA 감정, 시신공개되었으므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관계자 사이에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며 특히, 의도적으로 살해했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카다피의 행실을 떠나서 포로에 대해 고문이나 처형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Conventions de Genève)위반한 행위이다.

이 때문에 UN은 카다피의 사인에 대해서 조사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사무소 대변인도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발표했으며,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도 리비아 평의회에 대하여 정보 공개 등을 요구했다.

이회에도 NATO군사 개입을 비판했던 러시아측은 우발적인 사망이 아니라며 국제적인 조사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요청은 각국에서 전해지고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폴란드의 아티스트 빌헬름 사스날(Wilhelm Sasnal, 1972~)의 'Gaddafi 3 (2011)'


카다피의 죽음은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진다.

[총격전 끝에 사망]

- 마무드 과도수상발표에 의한것으로, 20일 오전 NATO가 공습을 시작하면서 급히 잠복했던 카다피는 차량 대열이탈, 근처 배수관에 숨었다. 그러나 발견되어 신병구속되었는데 그 시점에서는 멀쩡했으나 끌려다니면서 오른팔총격을 받고 부상, 트럭으로 호송하려다 카다피 세력, 반카다피 세력 간에 총격전이 시작되었고 이에 연루된 카다피는 머리에 총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어느 쪽의 총알을 맞았는지는 불명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또 검시의사치명상이 된 것은 복부의 상처로 보인다고 밝혔다. 

카다피는 미수라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착 몇 분 전 사망했다.


[호위에 의한 저격]

- 반카다피 세력 병사증언으로, 카다피의 호위가 가슴을 저격했다는 정보도 나왔다.


[병사에 의한 처형]

- 민병대에 의한 총살설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부터 재기된 설이다. 현지 사령관의 증언에 의하면, 타고 있던 지프에 총격을 당한 카다피는 배수관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총격이 계속되자 AK-47등 소총을 들고 으로 나오다가 병사에게 어깨다리를 총격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총격전에 휘말렸다는 지브릴 과도수상의 설명과는 다르지만, 카다피가 배수관으로 도망갔다는 점은 일치한다.

또한, 반카다피 세력의 1989년생의 병사가 유튜브에 기고한 영상으로 주장한 내용에 의하면 여자아이와 함께 보행 중인 카다피를 찾았고 그를 어디로 연행할지 병사들끼리 논쟁을 벌이다가, 어느 병사가 그 자리에서 카다피에게 2발을 쏘면서 카다피는 30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미성년19세의 병사가 카다피를 저격했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현재까지 정확한 사망원인은 불명이다.


<카다피를 조롱하는 벽화 (2011년 8월)>


[세계의 반응]

- UN: 반기문(1944~) 당시 사무총장은 [복수가 아니라 회복과 재건의 때]라고 강조.

- NATO: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Anders Fogh Rasmussen, 1953~) 당시 사무국장은 [국민이 서로 간의 차이를 넘어서, 밝은 미래를 구축하길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

- 미국: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II, 1961~) 당시 대통령은 [리비아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날이 되었다]며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

-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David William Donald Cameron, 1966~) 당시 총리는 [카다피에 의한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라고 표현.

- 독일: 앙겔라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 1954~) 총리는 [리비아 민주화를 위한 지원을 시행한다]는 성명을 발표.

- 대한민국: 류우익(1950~) 당시 통일부 장관은 [카다피는 대량 살상 무기 포기가 원인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견해를 표명.

- 일본: 겐바 고이치로(玄葉 光一郎, 1964~) 당시 외무대신은 [치안 안정과 부흥을 향한 환경이 갖추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담화를 발표.

- 중국: 장위(姜瑜, 1964~) 당시 외교부 보도국장은 [사회 안정과 경제 재건, 인민의 행복을 원한다]고 성명을 발표.

-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Медве́дев 1965~) 당시 대통령은 [리비아의 평화 도래를 기원한다]고 성명을 발표. 또한, 카다피의 운명은 리비아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 당시 총리는 [리비아의 전쟁은 끝났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 사우디아라비아: 영어 신문인 아랍 뉴스 인터넷판은 카다피 사망을 환영하는 사설을 게재.

- 이란: 알리 아크바르 살레히(Alī Akbar Ṣāleḥī, 1949~) 당시 외상은 리비아 과도국가평의회 의장에게 보낸 축전에서 [리비아 국민의 승리와 국가의 석방을 환영한다]고 표명.

- 북한: 카다피와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인지(아니면 저렇게 될까 봐 쫄았는지), 대조적으로 침묵.

- 베네수엘라: 카다피의 절친이기도 한,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ávez Frías 1954~2013) 당시 대통령은 [암살]이라고 비난하면서 [카다피는 위대한 혁명가·순교자로 기억될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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