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은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의 트라팔가르곶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펼쳐진 이 1최대의 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나폴레옹 1세(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영국 본토 상륙의 야망을 분쇄했다.
특히, 당시 영국 해군 제독인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전투에 앞서 휘하의 함대에 보낸 [영국은 각자가 그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는 문구는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그러나 육상에서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2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군을 무찌르는 등 여전히 우세했고, 자국 본토는 지켜냈으나 대륙에서의 전쟁 자체에는 대세로 미치질 못했다.
<당시 영국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
1805년, 유럽 대륙은 나폴레옹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으나 해상 지배권만큼은 영국의 아래에 있었다. 영국은 해상 봉쇄를 시행해 프랑스의 해군력을 억제하고, 영국 본토 침공을 막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영국 원정군에 의한 대영 상륙작전 원호를 위한 봉쇄를 돌파할 것을 명령, 프랑스와 당시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에 있던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편성하고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의 항구에 집결시킨 35만이라고 일컬어지던 침공군(실제로는 15만 명 정도)과 총 2,500척의 주정에 의한 영국 본토 상륙을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3
나폴레옹이 입안한 계획에서는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막혀있는 각지의 근거지인 툴롱(Toulon), 로슈포르(Rochefort), 페롤(Ferrol)등의 각 항구에서 함대를 출격시켜 봉쇄를 돌파, 일부 함대가 아일랜드 방면에서 영국 해군을 유인해서 분산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함대를 합류시켜서 수송 주정군의 호위에 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주력과 양동의 타이밍을 맞추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고, 날씨 변화(특히 높은 파도)에 약한 프랑스의 수송선으로는 그 타이밍의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해전 상황, 가운데 보라색 함선들이 영국 측이고 나머지 함선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다>
한편, 영국은 해군경 세인트 빈센트 백작인 4존 저비스(John Jervis, 1735~1823)의 지휘를 받아 프랑스 주요 항만에 봉쇄선을 배치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프랑스 측의 작전계획을 모르는 상태였고, 지중해 함대 사령관인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는 툴롱 앞바다에서 봉쇄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함대의 작전계획은 변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툴롱 함대 사령관 라투쉬 트레빌(Louis-René-Madeleine de Latouche-Tréville)이 병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원래는 양동이었던 프랑스 서부에 있는 브레스트(Brest) 함대에 의한 아일랜드 방면 침공을 주작전 중 하나로 하고, 잉글랜드 침공과 동시에 실행하기로 했다. 이 새로운 양동작전으로 툴롱과 로슈포르의 함대를 서인도 제도(British West Indies)로 보냄으로써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게한다.
트레빌의 후임자가 된 피에르 빌뇌브(Pierre-Charles-Jean-Baptiste-Silvestre de Villeneuve, 1763~1806) 제독은 1805년 1월, 넬슨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악천후를 무릅쓰고 툴롱에서 출격했으나 이 악천후에서 전열함 3척이 5항행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다시 계획을 변경하였는데, 그것은 아일랜드 침공을 취소하고 브레스트·툴롱·로슈포르의 함대에 더해서 다시 카디스(Cádiz)에서 스페인 함대를 출격시키고 그 모든 함대를 한번 서인도 제도로 합류시킨 후에 영국 해협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피니스테레곶 해전에서 철수한 빌뇌브는 스페인령 카디스로 돌아가 함대를 6정비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나폴레옹은 잉글랜드 침공 중지를 결단, 9월 3일에 불로뉴쉬르메르를 떠나서 파리로 귀환한다.
나폴레옹은 이어서 오스트리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지원 작전으로 카디스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에 나폴리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빌뇌브는 9월 19~20일까지 카디스에서 출격하는데, 그 빌뇌브 함대를 카디스 앞바다에서 감시하고 있던 것이 넬슨이 이끄는 영국 지중해 함대였다.
<19세기, 프랑스의 전열함 모습>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는 [빅토리(HMS Victory)]을 기함으로 27척, 피에르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수프렌(Suffren)]을 기함으로 33척이었다. 여기서 넬슨 제독은 적의 대열을 분산하기 위해서 2줄의 종대로 파고들 넬슨 터치(The Nelson Touch)라는 전법을 썼다.
프랑스 측의 빌뇌브도 이러한 분단작전을 예측했으며, 훈시를 받은 연합함대 함장 중에는 돛대에 다수의 저격병을 배치해서 접근전에 대비하는 자도 있었다. 연합 함대는 수에서 우세했으나 스페인 해군도 끼면서 지휘 계통이 복잡하고 사기도 낮은 편이었으며, 대포의 발사속도는 3분에 1발을 쏘는 데 불과했다.
한편 영국 해군은 사기도 높았고, 1분 30초에 1발을 쏠 정도로 능력은 프랑스에 비해 뛰어났다.
넬슨의 계획대로 오전 11시 45분, 전투는 시작되었고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휘어진 진형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넬슨의 계획대로 영국 함대는 2줄 평행으로 프랑스-스페인 함대에 접근했다. 축의 평행은 넬슨의 빅토리가, 종렬은 화포를 100문 장비한 콜링우드(Cuthbert Collingwood 1748~1810) 제독의 로열 소버린(HMS Royal Sovereign)이 각각 함대를 북쪽으로 이끌었다.
격전 끝에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격침 1척, 포획 및 파괴 18척, 전사 4,000명에 포로 7,000명의 피해를 받았으며 빌뇌브 제독도 포로가 됐다. 한편, 영국 함대는 침몰한 배 없이 전사 400명, 부상 1,200명의 피해로 끝나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넬슨 제독은 프랑스 저격병의 총탄에 쓰러졌다.
넬슨은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의무를 다했다]고 말하고는 7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이 패전의 소식에 대해 [폭풍에 의한 궤멸]이라고 묵살했지만, 제해권을 잃은 이상 영국 침공을 포기한다. 다만, 영국에서는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759~1806) 총리가 축하연을 열었으나 런던에서는 이 해전의 승리에 대해 별로 들뜨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상기한 대로 해전 패배에 따른 위기를 2개월 후인 아우스터리츠 승리로 한 방에 역전한다.
피트 총리는 아우스터리츠에서의 패배에 충격을 받아 다음 해, 실의 속에 병사한다. 이것으로 당시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는 영국의 해상제패라는 부분에 국한되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일대 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프랑스 해군의 영국 본토 공격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은 다른 나라의 함대가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승전 기념으로 만들어진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런던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으로, 광장에는 넬슨 제독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프랑스 국민에게 이 패배는 트라우마가 되어서 있을 수 없는 패배로 인한 충격을 [트라팔가]라고 표현하게 되었고, 모리스 르블랑(Maurice Marie Émile Leblanc, 1864~1941)의 추리소설 [루팡 VS 홈즈]에서 프랑스의 대괴도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이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에게 보낸 도전장에서 [트라팔가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도발했듯이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에서 종종 인용된다.
- Napoleonische Kriege: 1803~1815까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 및 그 동맹국과 영국이 재정 및 군사적으로 주도하는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이다. [본문으로]
- Bataille d'Austerlitz: 1805년 12월 2일, 프랑스 제국에 대항하여 결성된 3차 동맹을 효과적으로 분쇄한 나폴레옹의 빛나는 승리로 유명한 전투다. [본문으로]
- 舟艇: 바닥이 평평한 수송선. [본문으로]
- 第一海軍卿, First Sea Lord: 영국 해군의 전문적 수장. [본문으로]
- 戰列艦, ship of the line: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 국가에서 사용된 군함의 한 종류로, 한 줄로 늘어선 전열(line of battle)을 만들어 포격전을 할 것을 주된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본문으로]
- Battle of Cape Finisterre: 1805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 함대가 붙었으나 무승부로 끝난 해전. [본문으로]
- 유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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