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한 아르헨티나군의 모습(home.bt.com)>
- 5월 21일 영국군이 샌 칼로스에 상륙한 이후, 아르헨티나군의 저항은 항공 공격으로 한정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상륙 이후의 작전에 대해서는 사전 계획이 미비했으나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서 임무부대 사령부에서는 낙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제3코만도여단장 톰프슨 준장은 25일에 켄트 산에서 챌린저 산에 걸친 지역에 대규모 헬기 수송 작전을 시행하고, 스탠리 공략의 굳히기를 계획했지만 하필 이날,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컨테이너선 애틀랜틱 컨베이어의 상실로 다수의 헬기가 사라지는 바람에 이 작전은 실행 불가능하게 되었다.
스탠리에 진출하기 전에 우선 구스 그린과 다윈에 주둔하는 아르헨티나군을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톰프슨 준장은 원래 구스 그린에 대한(점령을 전제로 하지 않는) 습격습격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22일에는 제2공수대대장 '허버트 존스(Herbert Jones, 1940~1982)' 중령에게 작전 입안을 하달했으나 애틀랜틱 컨베이어의 손실로 인해서, 이 작전은 제5보병 여단과 헬기의 증원을 기다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거꾸로 런던 임무부대 사령부와 정치인들은 이 상실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26일에 톰프슨 준장이 임무 부대 사령부와 위성 통신으로 직접 대화해서 구스 그린의 공격과 스탠리 진격을 위한 기동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한편, 아르헨티나군에서 구스 그린 방위의 주력 부대인 제12연대는 연대의 병사 절반 이상은 2월에 징병 된 직후로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장비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던, 인원과 장비가 동시에 불충분한 상태였다. 당시 구스 그린에 배치된 아르헨티나 부대는 총병력 1,007명, 보병 3개 중대를 중심으로서 105mm 유탄포 3문, 120mm 박격포(상태 불량) 1문, 81mm 박격포 3문, 35mm 대공 기관포 2문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군 제2공수대대장 '허버트 존스(Herbert Jones, 1940~1982)' 중령(paradata)>
영국 측에서 SAS에 의한 최초의 정찰 결과는 사기가 저하된 1개 중대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으나, 22일 오후에 제3공수대대가 아르헨티나군 부사관을 생포하는 등 정보를 수집한 결과, 26일에는 아르헨티나 부대의 편성상황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제 2공수대대는 상륙 이후에 교두보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서 서식스 산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과 습한 땅, 그리고 방수성이 떨어지는 군화 때문에, 참호족(Trench Foot: 발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축축하고, 비위생적이며 차가운 상태에 노출함으로써 일어나는 질병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발까지 절단해야 한다)을 비롯한 병이나 부상으로 병력의 약 4%에 해당하는 27명의 병사가 후송되었다.
27일 10(Q)시 BBC는 전 세계에 '공수 대대는 구스 그린과 다윈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방송했다. 이것을 들을 대대장 존스 중령은 격노했으며 기습 효과는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위와 같이 아르헨티나군이 애초 예상보다 강력했던 것도 있었고, 제2공수대대 고유의 부대와 함께 L118 105mm 유탄포 3문의 배속을 받은 동시에 함포 사격 지원을 받게 됐다. 한편 아르헨티나군 제12연대장은 BBC의 방송을 듣고 자국군의 정확한 정보를 방송하지 않는 것으로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만 정보라고 생각했지만, 그 외의 전조로 영국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은 감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2공수대대는 '카밀라 크릭 하우스(Camilla Creek House)'로 이동해 15시경 존스 중령은 명령을 하달했다. 당초 작전 계획은 야간 중에 공격을 완료하는 것으로서, 6단계로 나누어진 복잡한 계획이었다. 중령의 급한 성격 때문에 서둘러 하달되기도 했고 워낙에 복잡한 작전으로 중대장 이하 누구도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상기대로, 톰프슨 준장은 어디까지나 습격 작전으로서 하달했지만 존스 중령은 이것을 확대 해석해서 점령 작전으로 변경하고 있었다.
<영국군 제2공수대대가 착륙한 '카밀라 크릭 하우스(Camilla Creek House)' 이곳은 아르헨티나군 과 11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britishempire)>
18시, 제2공수대대의 각 부대는 차례대로 전진하고 공격 위치로 진입했다. 공격 개시 예정은 28일 02시였지만, 함포 사격을 맡은 호위함 애로우는 주간에 다른 임무를 배정받아서 04:30분까지는 함포 사격을 끝내야 했다. 이 때문에 대대 공격 개시 이전인 22시부터 3시간 동안 사격함으로써 충분한 사전 작업을 하게 되었다.
영국 측은 아르헨티나의 전력은 거의 정확하게 파악했으나 군대의 배치 상황은 파악되지 않아서, 존스 중령을 포함한 작전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첫 공격을 시작한 A중대는 목표를 저항 없이 신속하게 점령한 뒤, 다른 부대의 전투를 잠시 정지시켰다. 그 후에 공격한 다음 목표도 저항이 없어서 중대장은 그대로 다음 목표로 전진하려 했으나, 존스 중령은 A중대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며 이를 기각했다. 그래서 중령의 도착을 1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이동한 다음 목표인 다윈 구릉에서 A중대는 아르헨티나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된다. 또 이와 비슷한 시간에 B중대도 서쪽에서 50구경 기관총 등의 강력한 화력을 갖춘 진지와 만나며 두 중대는 전진을 저지당했다.
A, B중대의 공격이 무산된 것을 확인한 07:30분, D중대는 방어선을 우회하며 공격을 하고 C중대는 기관총에 의한 화력 지원을 실시할 것을 보고했지만, 존스 중령은 모두 기각하며 무선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질타했다. 또, 이 밖에도 지원 중대장과 포병 지휘관으로부터 여러 방안을 제의받았지만 중령은 이들을 모두 거절하고 08:30분부터 A중대와 합류, 이 중대로만 공격을 계속시켰다. 그러나 공격은 정체되었고 다급해진 중령은 가까운 인원을 모아서 스스로 진두에 서서 돌격했다. 이 무모한 돌격에 참가한 인원은 20명 정도에 불과했고 또 장교와 통신병이 많아서 순식간에 저지당했으며, 결국 존스 중령은 09:30에 전사했다. 그러자, 돌격대원이 중령을 저격한 참호를 66mm 로켓포로 격파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 파괴력을 두려워한 주위의 참호들이 항복하면서 승리를 쟁취했다.
<켄트산의 모습, 스탠리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영국, 아르헨티나 군 둘 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펼쳤고, 결국 영국군의 우세로 끝이 난다>
한편, 켄트산은 스탠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이곳에 주요 부대를 배치하지 못했다. 5월 24일, SAS의 정찰로 영국군도 이 사실을 알고 당장 여기에 대병력을 투입하려 했으나 25일에 있던 항공 공격으로 헬기를 많이 잃었기 때문에 많은 병력의 투입은 중단되었고, SAS의 D 중대만으로 작전을 해야만 했다.
29일에는 해병대 제42 코만도가 여기에 증강될 예정이었으나, 악천후 때문에 연기되었고, 그 직후에 아르헨티나군의 커맨드 부대 공격이 개시되었다. 아르헨티나 제602특수 작전 중대 제3돌격 분대는 켄트 산의 왼쪽 사면에 착륙한 뒤, 곧바로 격렬한 근접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눈보라를 틈타서 SAS의 방어선에 침투했고 SAS는 이때 후퇴도 검토했으나, 이곳은 너무나도 중요한 곳이었기에 톰프슨 준장은 꼭 이곳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다.
30일 새벽에는 SAS가 우세했고, 또한 아르헨티나군 제2돌격 분대가 올 징후도 없어서 제3돌격 분대는 공격을 단념하고 후퇴했다. 제2돌격 분대가 탄 헬기는 악천후 때문에 이곳으로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착륙, 도보 행군으로 이곳을 향했기 때문에 결국 제3돌격 분대 전투에 맞추지 못하고, 30일 밤에서야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 중, 영국 해병대 제42코만도가 이곳에 도착하면서 영국 측의 확실한 우위가 결정되었고 결국 제2돌격 분대도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동 포클랜드에 위치한 '피츠로이(Fitz Roy)(falklandislands.com)>
포클랜드 제도 지상군 LFFI의 무어 사령관은 5월 29일, 사령부를 창설하고 30일부터 전면적인 지휘를 시작했다. 켄트산 점령이 성공하자 영국군 지상부대는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하려 했으나, 헬기 부족과 혹한의 기후는 기본이고 너무나도 습했기 때문에 행군은 어려워졌다. 마침, 본국에서 증원된 제5보병여단이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했으며 헬기는 그 상륙에 이용되고 있었다. 제3코만도 여단 각 대는 종종 지역 주민들이 트랙터로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도보 행군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제2공수대대는 구스 그린을 점령한 뒤, 우선 6월 2일에 그곳에서 동북동으로 25㎞ 떨어진 정착촌을 공격했는데 이곳이 무인이어서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여기서 피츠로이(Fitz Roy)의 정착촌 주민과의 전화 연락이 성공했고, 이곳에도 아르헨티나군이 주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날 오후까지 영국군의 유일한 티누크를 이용해서 성공적으로 진출한다. 이 대담한 전진으로, 스탠리 포위 공격 작전 때의 오른쪽 날개(우익)의 엄호가 확보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은 악천후 때문에 영국군의 이런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대대는 공격을 받지 않고 끝났지만 반대로, 영국군 입장에서는 적중으로 깊숙이 돌출해서 보급선과 떨어진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영국군 강습상륙함, 피어리스 클래스(Fearless-class) 인트레피드(HMS Intrepid [L11])의 모습(BBC)>
제2공수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신속한 전진이 필요했다. 그래서 6월 3일 무어 소장은 제5보병여단을 해상 수송으로 피츠로이에 전진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피츠로이에는 상륙 가능한 모래사장이 부족했고, 또 본국의 필드하우스 제1해군경이 영국군의 손해로 신경질적이었고 그 때문에 계획은 종종 변경되어서 부대를 격분시켰다. 우선 5일부터 6일 야간에 '인트레피드(HMS Intrepid [L11])'를 이용하여 1차 해상 수송이 시작되었다.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 근위대대는 무사히 피츠로이의 '블러프 코브(Bluff Cove)'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교체한 제2공수대대가 타고 온 상륙용 주정 장비를 마음대로 빌리는 바람에 해상 수송에 큰 장애가 생겼다.
어쨌든 6일부터 7일 야간에 인트레피드와 '트리스트람(RFA Sir Tristram [L3505])'을 이용하여 2차 해상 수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수송 때 현지에서 하역에 쓰려던 주정 장비가 제2공수 대대에 차용되고, 소재 불명이 되는 바람에 인트레피드를 타고 온 웨일스 근위대대 등의 부대를 모두 상륙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7일 밤에 '갤러해드(RFA Sir Galahad [L3005])'를 이용하여 제3차 수송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때 피츠로이에서는 아직 트리스트람에 의한 상륙 중이었으며, 갤러해드가 상륙할 자리가 없었다. 또, 웨일스 근위대는 본대가 있는 블러프 코브까지 승선할 계획이었고 항공 공격을 경계하며 하선을 권고한 해병대 테일여 소령의 조언을 무시했다.
<아르헨티나군의 A-4Q 스카이호크(nottinghammalvinas)>
영국군은 항공 모함을 후방에 배치한 데 따른 초계 시간 단축을 보완하면서 샌 칼로스에 알루미늄 판자를 전면에 깐, 길이 850피트(약 260m)의 활주로를 완성하고 6월 2일부터 운용을 개시했다. 이로써 해리어의 전투 공중초계 시간이 대폭 연장되었다. 그리고 6월 4일에는 켄트산에 아르헨의 대거 6대와 푸카라 4대의 항공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영국군에게는 전혀 손해를 끼치지 못했지만 부대 방공 체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6월 6일, 아르헨티나 측은 영국 측이 해상 운송을 하는 것도 알고 있게 되었고 8일 11:15분에는 아르헨티나군 관측소로부터 영국 수송선의 피츠로이 입항이 보고되었다. 그러자 12:50분 아르헨티나 공군의 A-4Q 5대가 공격을 가해서 갤러헤드는 대파되었고 여기서 48명이 전사한다. 트리스트람도 반쯤 부서져서 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대거 공격기 부대가 투하한 500kg 폭탄 4발이 포클랜드 해협에 있던 호위함 플리머스를 강타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모두 불발로서 플리머스는 화재가 발생했지만, 침몰은 면했다.
이것은 이 전쟁에서 아르헨티나 공군의 마지막 대(大)전과였지만, 결과적으로 영국군의 스탠리 진공을 고작 이틀만 늦췄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때, 아르헨티나군 공군기 3대도 시 해리어에 격추되었다. 한편, 6월 8일 11시에는 엔진이 고장 난 해리어가 위에 적은 알루미늄 활주로에 크래시 랜딩으로 알루미늄 판자의 대부분을 날려 보낸 탓에 이날 임시 활주로를 거의 못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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