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항공기 납치사건인 요도호 사건>
- 요도호 납북 사건(요도호 납치 사건: よど号ハイジャック事件)은 1970년 3월 31일,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赤軍派)가 일으킨 일본 항공편 비행기 납치 사건으로 일본 최초의 납치 사건이다.
1970년 3월 31일, 現 후쿠오카 공항에 일본 항공 351편[보잉 727-89편으로 애칭 요도호]이 적군파 1를 자처하는 9명(이하, 납치범)에 의해서 납치됐다. 납치범들은 북한으로 망명할 뜻을 밝히고, 일본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요도호는 후쿠오카 공항과 김포 국제공항의 2번의 착륙을 거친 뒤, 4월 3일에 북한의 미림 비행장에 도착했으며 납치범들은 그대로 망명했다.
조종사를 제외한 승무원과 승객은 후쿠오카와 서울에서 차례로 풀려났지만, 야마무라 신지로(山村 新治郎: 1933~1992) 운수 정무차관(現 국토교통성)이 인질 대신 탑승했고 운항승무원들과 함께 북한까지 동행한 뒤, 일본으로 귀국했다.
[요도호(よど号)]란 납치된 비행기의 애칭으로 당시의 일본 항공은 보유한 비행기마다 각각 애칭을 붙이고 있었는데, 보잉 727기에는 일본의 하천으로 이름이 맞춰졌고 요도호는 요도가와 강 2에서 유래했다.
<사건후, 납치범들에 의해서 김포공항에 체류중인 요도호의 모습>
일찍이 적군파는 일본 내에서 비합법적인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후방 기지로서 해외의 베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 타국에 멤버를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 3월 15일에 적군파 의장인 시오미 다카야 3가 체포되는데, 체포 당시 시오미는 H J(Hi Jack)라고 적힌 납치 계획에 대한 메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공안경찰은 항공기 납치를 뜻한다는 건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들에게 수사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麿: 1943~1995)를 리더로 한 항공기 납치 실행 예정 그룹은 계획은 급하게 정하고, 3월 27일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그러나 비행기를 탑승하는 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던 4 범인 그룹의 일부가 지각하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 실행은 4일 후인 3월 31일로 연기되었다.
<적군파의 창시자이자 신좌익 활동가였던 시오미 다카야>
1970년 3월 31일 7시 33분, 현재의 후쿠오카 공항으로 향하던 일본 항공 351편이 후지 산 상공을 비행 중에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으로 무장한 납치범들에 의해서 공중납치 되었다. 납치범들은 남성 탑승객을 창가로 이동시킨 다음 반입한 로프에 의해 구속하였고, 일부는 조종실로 침입해서 항공 기관사를 구속, 기장과 부조종사에게 평양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이 요구에 부조종사는 `후쿠오카행 국내선을 목적으로 운항하는 것이라, 북한에 직접 가기에는 연료가 부족하다`라고 납치범에게 말했다. 그래서 급유를 명목으로 8시 59분에 원래 목적지인 후쿠오카 공항에 일단 착륙했는데, 실제로는 예비 연료가 탑재되어서 평양까지 비행할 수 있었다.
경찰은 국외 도피를 막기 위해서 기체를 공항에 두기 위해 주력했고, 자위대기가 고장을 가장해 활주로를 막는 등 몇 가지 공작을 했지만 오히려 범인들을 자극해버렸다. 한편, 납치범들은 다시 이륙하는 과정에서 기장의 설득으로 인질 중 일부를 석방하는 데 동의했고, 그날 13시 35분에 여자, 아이, 환자, 노인을 포함한 인질 23명이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납치범들의 리더격인 타미야 타카마로의 모습>
이날 13시 59분, 요도호는 북한으로 가기 위해 후쿠오카 공항에서 이륙했다. 그런데 기장이 후쿠오카에서 건네받은 지도는 중학생용 지도책의 복사본으로, 항로를 알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이 지도의 구석에는 [121.5MC를 방수(무전을 제3자가 수신함)한다](MC는 메가 사이클의 약어로 현재의 메가헤르츠와 같은, 민간 항공 긴급용 주파수다) 라고 적혀 있었으며 기장과 부조종사는 이에 따라서 비행을 했다.
요도호는 한반도 동쪽으로 북상하면서 비행을 계속, 14시 40분에 진로를 서쪽으로 변경했다. 이 직후에 요도호의 우측에 국적을 숨긴 전투기가 나타나는데, 그 전투기 조종사는 기장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리고 강하(또는 착륙)를 지시하고는 다시 날아갔다 5.
이때 요도호는 북위 38선 부근을 날고 있었다. 실제로 요도호는 북위 38선을 넘었지만, 대한민국 기준 휴전선 안쪽으로 아직 우리 영토 안에 비행기는 날고 있었다 6. 북한 영공에 진입했다고 생각한 부조종사는 지시된 주파수에 대해서 영어로 `여기는 JAL351편`이라고 몇 번이나 무전을 보냈지만, 좀처럼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당 여객기와 동일한 기종인 일본항공 소속 보잉 727-46의 1967년 3월경 모습>
그 뒤,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무선이 들어왔다. 무선 관제는 주파수를 121.5 MC에서 134.1 MC로 전환하도록 지시했고 기체는 유도에 따르며 왼쪽으로 선회하며 다시 북위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정부 당국에 의한 것으로, 기체를 북한으로 보내지 않기 위한 발 빠른 행동이었다. 기장은 주파수를 전환하라는 지시에 7 무선은 평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납치범들은 망명하려는 북한의 공용어인 조선어는 물론, 영어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이러한 교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15시 16분, 비행기는 평양 국제공항으로 불리는 장소에 착륙한다. 물론 실제로는 김포공항이었고, 한국 병사는 조선인민군 병사의 복장을 하며 [평양 도착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위장 공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멤버 중 한 명이 김포공항 내에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기 등이 주기 하는 것을 발견하고, 무언가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알아차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항공 연료탱크의 상표], [로열 더치 쉘 8의 로고가 붙은 급유 트럭], [범인 그룹이 갖고 있던 라디오를 틀으니 재즈나 록이 흘러나왔다], [지프에 타 있던 흑인 병사를 발견], [포드 자동차], [북한 직원으로 위장한 한국 경찰이, '일본 대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는 등 갖가지 검증받지 못한 설이 있다.
<납치된 요도호의 모습>
납치범들은 기체에 접근한 남성에게 `여기는 평양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성은 `평양이다`라고 대답했지만, 납치범이 북한의 5개년계획(1957~1960년)에 대해서 질문하자 우물쭈물하고 만다. 9
김포 국제공항에 착륙 후, 한국 당국은 납치범들과 협상을 개시했다. 여기서 범인들은 즉각 이륙할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당국은 정지한 엔진을 다시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스타터(보조 시동기)의 공여를 거부, 사태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 관제탑에서 `일반인을 내리게 해주면 북한에 가도록 허락한다`라는 교신도 있었는데, 납치범들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식량 등의 간식을 제공받는 것은 응했다.
31일 오후에는 일본 항공 특별기가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 정무 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 항공 직원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이륙, 4월 1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정래혁(1926~) 국방부 장관, 백선엽(1920~) 교통부 장관, 박경원(1923~2008) 내무부 장관과 함께 범인들과 협상을 벌인다.
<일본 경찰청에서 배포한 납치범들의 수배전단>
이후 요도호의 부조종사가 틈을 타 기내에 있는 범인의 수와 무기 등을 적은 종이컵을 조종석 창문 밖으로 떨어뜨려, 범인의 대략적인 배치가 드러났다. 한국 당국은 이 정보를 토대로 특수부대에 의한 돌입을 검토했으나, 승객의 신변에 불안을 느낀 일본 정부의 강한 반대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일본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과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요도호가 인질과 함께 북한으로 갈 때 신변을 보장해줄 것을 북한 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북한 당국은 `인도주의에 입각해 만약 기체가 북한으로 도래할 경우, 승무원 및 승객은 즉각 송환하겠다`라고 밝혔으며 조선적십자회도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년도에 발생한 대한항공 YS-11여객기 납치 사건 10 승무원들이 이 시점까지 해방되지 않아서 그대로 믿기에는 불안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佐藤 栄作: 1901~1975)의 모습>
일본 정부는 범인들이 승객들을 풀어준다면 북한행을 인정하도록 한국 측에 강력히 요구했고, 한국 측은 최종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한편, 요도호에는 일본인 이외 외국 국적 승객으로 미국인들이 탑승한 상태였는데 북한에 넘어갈 경우 `적국`인 미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심한 가혹 행위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미국 연방 정부가 선처를 요구하고 있었다.
1일 오후에는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登美三郎: 1901~1990) 운수대신 일행이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카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1909~1997) 주한 특명 전권 대사와 함께 한국 당국과 조율했다.
며칠 간의 협상을 거친 4월 3일, 야마무라 신지로 교통 정무 차관이 승객을 풀어주는 대가로 인질이 되는 것으로 납치범들과 합의, 최종적으로 조종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 및 승객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풀려난 인질들은 일본 항공 특별기인 더글러스 DC-8-62[JA8040, 하다 호(飛騨号)]를 통해 후쿠오카 공항으로 귀국했다.
<요도호를 경계중인 한국군의 모습>
한편, 범인 측에서 야마무라 정무 차관의 신원에 대해서 일본 사회당 아베 스케야(阿部助哉: 1914~1995) 중의원 의원에게 증명을 바란다는 내용의 의뢰가 있었고, 나리타 토모미(成田知巳 1912~1979) 일본 사회당 위원장과 사와다 마사지(沢田政治: 1922~1985)의원의 동의 아래, 4월 2일에 아베 의원이 직접 일본항공 전세기편으로 서울로 건너와서 야마무라 차관 본인임을 증언했다.
4월 3일 18시 5분, 요도호는 김포 국제공항을 이륙했다. 그 후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한 영공으로 진입하는데, 기장은 이때도 제대로 된 지도를 받지 못했고 북한 영공에 들어간 뒤에도 무선에 대한 응답이나 북한 공군기의 스크램블 발진도 없었다. 11
평양 국제공항을 목적지로 삼고 비행을 계속했지만, 점점 날은 어두워졌는데 이때 기장은 태평양 전쟁 중에 야간 특공대의 교관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육안으로 확인한 작은 활주로로 향했고, 19시 21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 활주로는 평양 국제공항에서 남남동으로 약 25km 떨어진, 사동 구역에 있는 미림 비행장으로 알려졌다.
<당시 운수대신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登美三郎: 1901~1990))>
그제야 등장한 북한 측은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납치범들은 무기를 두고 외부로 나갔다. 허무하게도 기내에 남은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모두 완구 및 모조품임이 후에 밝혀졌다. 어찌 되었든 납치범 9명, 승무원 3명,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을 포함한 총 13명의 신병이 북한 당국에 의해서 확보되었다. 이때 NHK가 19시 30분부터 방송한 보도 프로그램 [요도호의 승객 돌아오다]는 비디오 리서치, 관동 지구 조사에서 43.0%의 시청률을 기록했을 정도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
요도호가 도착한 뒤 북한 측은 역시나 태도를 바꾸며, `승무원이나 기체의 조기 반환은 보증할 수 없다`라고 표명하면서 일본 정부가 할 일 없이 자신들에게 문제를 밀어붙였다고 비난을 했다. 또한 납치범들과 승무원, 야마무라 정무차관에 대해서는 공개에 의한 심문이 이루어져, 장기간의 억류가 예측되는 상황이 되었다.
단, 승무원과 야마무라 차관에 대해 이루어진 심문은 형식적이었고, 북한 요리의 식사와 개인실을 제공받은 후 12, 영화감상이 준비되는 등의 배려를 해주었다.
<개성 시내의 영화관(2005년), 북한 당국은 일본인 인질들에게 나름대로 정중한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4월 4일, 북한은 다시 일본을 비난하면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기체와 승무원의 반환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비행기를 납치하고 온 학생들 13에 대한 필요한 조사와 적절한 조치를 취하며 납치범들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북한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1901~1975) 수상의 일기에서는 `모두 크게 기뻐했고, 북한의 호의에 감사한다` 라고 쓰여있었다.
다음날 4월 5일 새벽, 승무원들은 출발 준비를 위해서 미림 비행장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북한에는 보잉 727에 대응할 스타터(보조 시동기)가 없어서 한때 출발이 잠시 지체됐다. 일본항공은 모스크바 경유로 엔진 스타터를 보낼 수 있도록 수배를 개시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압축 공기 봄베를 현지에서 조달해 차량용 배터리로 기내의 배터리에 충전해서 엔진을 시동할 수 있었다.
공항을 이륙한 요도호는 북한 측에서 비행경로를 지시받은 지역을 통과 후, 일본 국내 상공에서 요도호를 부르는 일본 항공기를 거쳐 무선으로 탈출을 보고, 귀로에 올랐다. 그 후 무사히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에서는 정부 관계자가 영접하며, 사건은 일단 수습을 하게 된다. 그날 아침 NHK가 방영한 보도 프로그램은 40.2%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당시 해당 사건을 보도한 마이니치 신문의 지면>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항공기 납치로, 그해 6월에 항공기의 탈취 등 처벌에 관한 법률(공중 납치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다만 헌법 39조의 소급 처벌 금지 규정에 따라서 납치범들이 귀국할 경우, 이 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항공기 납치를 저지를 경우, `기체라는 재물`이나 `항공 요금과 재산상의 이익`에 대한 강도죄와 승무원 승객에 대한 약취 유인 혐의로 기소된다. 또한, 국외 도피한 시점에서 형사소송법 제255조의 규정에 따라서 공소시효는 정지한다. 이후 납치범들은 합의에 따른 무죄, 귀국을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모조 권총의 소지 및 모조 도검류는 휴대를 각각 금지하고 처벌을 규정하는 무기 단속법 개정안이 1971년에 통과됐다.
<납치범 중 한명인 오카모토 타케시(岡本武: 1947~1988), 북한의 주체사상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넘어간 납치범들은 도착 초기엔 `세계혁명을 추진하는 동지`로서 북한 정부로부터 극진한 환영을 받았으나, 당시 세계정세를 살펴봐도 황당무계한 `북한의 적군화(赤軍化)`라는 목적은 즉각 부인 당하며 주체사상에 의한 철저한 세뇌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증언으로부터 이후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한 관여가 확실시되는 인물들도 있지만, 현시점에서 정확한 내용은 불명확한 점이 많다. 현재 납치범들은 일본 경찰청에 의해 국제 수배 중이다.
그 뒤 요시다 킨타로(吉田金太郎: 1950~1985), 오카모토 타케시(岡本 武: 1945~1988),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麿: 1943~1995)의 3명은 북한 내에서 사망했다고 하지만, 미심쩍은 점들이 지적되고 있으며 시바타 야스히로(柴田泰弘: 1953~2011)와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 1948~2007) 두 사람은 일본에 귀국한 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최근 납치범들의 모습, 이들은 북한에서 호의호식 하면서 나름대로 잘 산다고 한다>
이후 시바타는 형기 만료로 출소 후 2011년 6월 23일 오사카 시내의 아파트에서, 다나카는 2007년 1월 중 교도소에서 각각 사망했다.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범인들은 고니시 다카히로(小西隆裕: 1944~), 우오모토 키미히로(魚本公博: 1947), 와카바야시 모리아키(若林盛亮: 1947~), 아카기 시로(赤木志郎: 1947) 총 4명이다.
현재는 웹사이트인 `요도호 일본인 마을[よど号日本人村]`을 개설하고, 일본인 납치의 무죄, 일본으로의 귀국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내 여론은 싸늘하다.
한편 요도호에 탑승해서 육체적, 심적으로 고생한 승객들은 조의금과 함께 무사히 풀려났지만, 그 중 한 명은 1977년에 있던 일본 적군파에 의한 일본 항공기 납치 사건에 또다시 휘말리며, 2번이나 납치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요도호 기장이었던 이시다 신지(石田真二)의 말년 모습>
- 요도호의 기장이었던 이시다 신지(石田真二)는 귀국 후에 용감한 조종사로 칭송받았으나, 개인적인 트러블을 주간지에서 써버리는 바람에 일본항공을 퇴사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야간 주차장 경비원 일을 하다가 2006년 8월 13일 타계했다.
- 부조종사 에자키 데이이치(江崎悌一)와 기관사 아이하라(相原)도 귀국 후에는 기장과 마찬가지로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다. 그 후로도 일본 항공사의 조종사(이후 경력을 쌓고 기장으로 승진)와 기관사로 끝까지 종사했으며, 무사히 정년퇴직했다.
-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승객 구조의 공로로 내각 총리대신표창(内閣総理大臣顕彰)을 받게 된다. 이 건에 의해 일약 향토의 영웅이 되어, [사나이, 야마무라 신지로]의 캐치프레이즈로 당선을 거듭하며 승승장구, 농림수산 대신(농림축산+해양수산 장관)이나 운수 대신(국토부 장관)을 역임한다. 그러나 1992년 4월 12일, 자민당 방북단장으로서 북한 방문을 하루 앞둔 상황에 정신 질환을 앓던 차녀(당시 24세)에 의해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둘째 딸은 정신이상에 의해 불기소 처분을 받지만, 4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요도호의 사태 해결에 큰 공을 세운 야마무라 차관은 정작, 자신의 딸에 의해 숨지는 비극을 겪고말았다>
야마무라 신지로는 학창시절 권투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으며, 현(도) 고등학교 복싱 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했던 강인한 몸과 정신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요도호와 관련된 야마무라의 일화를 한가지 적어보자면, 요도호 사건 발생 후 기자 회견에서 `일각이라도 빨리 승객을 안심시키고 싶었다`라면서, '정무차관은 맹장'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도움이 된 맹장이라 좋네요.` 14라며 농담을 던졌다.
또한, 볼모로 요도호에 탑승했을 때, 납치범들이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야마무라는 `아냐, 아냐, 이걸로 다음 선거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15.
- 공산주의자동맹적군파(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 1969년 설립된 일본의 신좌파 조직. [본문으로]
- 淀川: 일본 혼슈 오사카부의 주요 강. [본문으로]
- 塩見孝也: 1941~2017, 적군파 창시자 및 신좌익 활동가. [본문으로]
- 지금과 다르게 1970년 당시에는 일본이나 우리나, 평범한 사람들이 비행기에 탑승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본문으로]
- 국적을 숨기지 않고 한국 공군장을 표시한 채 전투기가 나타났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 이때 북측에서 기체에 대한 대공포 사격이 이뤄졌다는 거짓 정보가 난무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 공산권 국가들이 쓰는 주파수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 다국적기업으로 세계2위의 석유회사. [본문으로]
- 또 다른 설로는 어느 군인에게 여기는 서울이냐고 물었더니,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그 군인은 서울이라고 답했다는 얘기도 있으며 김일성의 큰 사진을 가져오도록 요구했으나, 북한의 적국인 한국에서 이 사진은 당연히 준비할 수가 없었고 납치범들은 위장 공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 1969년 12월 11일,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출발하여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 여객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북한 간첩에 의해 납북, 이 중에서 11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건. [본문으로]
- 착륙할 때까지 북한 측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본문으로]
- `쉬고 싶다`는 본인들의 의사는 깨끗하게 무시되었지만... [본문으로]
- 당시 인질범들이 대학생이었다. [본문으로]
- 그만큼 쓸모가 없다, 라는 의미의 자폭성 개그. [본문으로]
- 실제로 다음 선거[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야마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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