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영국의 포클랜드 제도 점령 150주년이 되는 1983년까지 이 문제를 해결,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다>
- 아르헨티나 측은, 영국에 의한 포클랜드 점유 150년이 되는 해인 1983년까지 이 문제를 '모든 수단'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 1981년 12월 8일, 새 대통령에 선출된 '레오폴도 갈티에리(1926~2003)' 대장은 이듬해 육군 사령관을 물러나야 했기에, 퇴역 전까지 정치적 공적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81년 국방 정책 검토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트라이던트 탄도 미사일의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쇄빙선 '인듀어런스'와 항공 모함 '인빈시블'급의 퇴역이 검토되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이 포클랜드 제도의 안전 보장 문제보다 국내 재정 문제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감을 얻은 아르헨티나는 12월 15일에 해군 총사령관인 '호르헤 아나야'(1926~2008)대장이 해군 작전부장인 '후안 롬바르도'(1927~) 중장에게 포클랜드 제도 침공 작전 계획의 작성을 명령하고, 본격적인 무력행사의 계획에 착수한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 침공작전을 계획한 해군 총사령관 '호르헤 아나야'(laguia2000)>
1982년 1월 27일,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적인 협상 개시를 영국에 제안을 하고, 2월 27일에는 뉴욕에서 회담을 가졌다. 아르헨티나 외무부로서는 영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서 무력 분쟁의 발발만은 피하려 했으나, 영국 측은 아르헨티나가 그렇게까지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논의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낙담, 3월 1일에 '영국 측에 해결 의사가 없을 경우 협상을 포기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앞으로 모든 수단을 취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식 성명을 발표한다.
이는 아르헨티나 측의 분명한 경고였지만, 여전히 영국 측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3월 9일에 개최된 합동 정보 회의에서는 '외교 협상이 지속되는 한, 아르헨티나가 극단적 행동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아르헨티나 측이 무력을 사용해도 10월 이후에나 될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이날 대처 총리는 국방부에 비상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나 느긋한 국방부는 2주 동안 별다른 구체적인 검토를 하지 않았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윌리엄스 대사는 '만약 영국이 아르헨티나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3월 중에 무력도발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본국에 전달했지만 뜬소문으로만 여겨져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영국 국방성 청사모습) 국방부는 아르헨티나의 무력도발 징후를 몇 차례나 보고받았지만 그다지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Sputnik International)>
3월 19일,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거 업자인 '콘스탄티노 다비도프'(Constantino Davidoff)를 비롯한 고철상들이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ARA Bahaia Buen Suceso)에 의해서, 사우스 조지아 섬의 그리트비켄에 상륙했다. 이것은 옛 포경 시설 해체가 목적이었고, 해체 자체는 영국 정부와의 사전 계약에 근거했으나 상륙을 위한 사전 허가를 사우스 조지아 측으로부터 받지 않았고. 작업원 중에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가세하였으며 이들은 상륙 후 아르헨티나 국기를 단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외무부는 아르헨티나 외무부에 항의하며, 쇄빙선 인듀어런스에 해병 대원 22명과 군용 헬기 와스프 2기를 태우고 해당 해역으로 파견했지만, 이에 대항하며 아르헨티나 해군도 초계함인 코르벳 2척을 파견했다. 아르헨티나측의 강경한 자세에 놀란 영국측은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단 인듀어런스를 사우스 조지아섬 해상에 대기시켜놓고 상황을 주시했다.
영국 측은 전투 행위가 포클랜드 제도에 번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있고(아르헨티나가 무서운 게 아니다), 문제의 범위를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만 한정시키길 원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측을 억제만 할지, 아니면 격퇴까지 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방침을 정하지 않은 채 인듀어런스를 파견했기 때문에, 미온적 대응으로 인해서 오히려 위기가 확대된다.
<HMS 인듀어런스 호의 모습, 1967년부터 1991년까지 영국 해군소속으로 남대서양 해역(남극 부근)에서 활약했다(위키)>
3월 23일, 영국은 위기 수습을 위해서는 양측이 양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아르헨티나 군대가 철수한다면, 외교 협상에서 타협할 용의가 있음을 긴급하게 아르헨티나 측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이미 늦은 상태였는데 이유인즉, 이날 아르헨티나 측 군사 평의회에서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부대를 계속 주둔할것을 결정했으며 만약 부대를 철수시킨다면 영국 측의 위협에 아르헨티나가 굴복한 것으로 여겨서, 강경파의 갈티에리 대통령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3월 26일 아르헨티나의 멘데스 외교부 장관은 사우스 조지아 섬에 상륙한 아르헨티나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쇄빙선인 '파라이소(ARA Bahia Paraiso)'호를 섬으로 파견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모든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해당함에서 해병대원이 사우스 조지아 섬 리스 항에 상륙하기에 이르고, 그제야 영국 측도 외교적 수단에 의한 상황 타개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데도, 여전히 영국의 대응은 무딘 칼과 같았다. 영국 정보기관은 3월 22일에도 '어디까지나 문제는 사우스 조지아 섬이며, 포클랜드까지 침공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월 28일에는 정부 통신 본부(GCHQ)로 아르헨티나 해군의 잠수함 '산타페'가 포클랜드 제도 연안에 파견된 것이 포착됐지만, 이날 아르헨티나 해군 총사령관 아나야 대장이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아르헨티나인의 신변이 보장되는 한, 포클랜드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라고 말한 일도 있었기에 이 정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소속 해군 쇄빙선인 파라이소가 해당 해역에 나타나자, 양국 간의 긴장상황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britishempire)>
3월 31일 시점에서조차 JIC는 '아르헨티나는 사우스 조지아 문제를 역으로 이용해서 협상의 소재로 삼고 있다'로 생각하였고,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도발해서 영국을 꾀어들이려는 아르헨티나의 목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날, GCHQ는 아르헨티나의 해병 부대 1개 대대가 4월 2일에는 포클랜드의 스탠리에 이른다는 것과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재영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대해서 모든 기밀 서류의 소각 명령이 있었다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정보를 감청하였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마침내 영국 정부도 아르헨티나의 목표가 포클랜드 제도이며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대처 총리는 미국에 사태 수습의 중개를 요청했으며, 4월 1일에 레이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대한 설득과 영국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전하려 했지만 갈티에리 대통령과 연락은 어려웠다. 한편, 주아르헨티나의 미국대사가 갈티에리 대통령과 면담을 했지만, 대통령은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워싱턴 시간으로 4월 1일 오후 8시 반경, 레이건은 겨우 갈티에리 대통령과 통화할 수 있었다. 침공을 단념하도록 설득하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갈티에리 대통령은 자신들의 대의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설득은 결국 실패했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모습(perfil)>
이 같은 외교적 수단과 동시에, 영국 측도 군사적 대응에 나선다. 3월 29일에는 물자와 해병 200명을 태운 급양함 '포트 오스틴'이 급파되었고, 4월 1일에는 스위프트셔 급 원자력 잠수함인 '스파르탄'과 '스플렌디드'도 파견되었으며, 지브롤터에 기항하던 호위함 '브로드 소드'와 '야머스'도 추가된다.
이때 해군은 앞으로도 증파를 계속한다면 이런 방식은 좋지 않다고 생각, 제1해군경(First Sea Lord: 영국 해군의 전문적 수장으로, 왕립해군참모총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리치 제독은 항공 모함 기동 부대 편성의 필요성을 대처 총리에게 상신(윗사람에게 보고)한다. 이를 받아들인 총리는, 3월 31일에 임무 부대 편성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선발대의 도착은 4월 13일 전후였고 항모 기동 부대의 출항도 4월 5일로 잡힌 상황이었다.
한편 아르헨티나에서는 3월 26일, 군사 평의회에서 포클랜드 제도 침공에 관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현지 시각 4월 1일 19시, 아르헨티나군은 로사리오 작전을 발동, 이날 23시에 선발부대가 스탠리 인근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포클랜드 침공을 개시했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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