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성사건(宮城事件)은 1945년 8월 14일 밤부터 15일까지 궁성 1 2에서 일부 육군성 3 근무 장교와 근위 사단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 시도다. 일본의 항복을 저지하겠다는 이유로 이 쿠데타를 기획한 장교들은 근위 제1사단장 모리 타케시(森赳, 1894~1945) 중장을 살해하고, 사단장 명령을 위조해서 근위보병 제2연대를 이용해서 황궁을 점거했다. 그러나 육군 수뇌부와 동부 군관구의 4설득에 실패한 이들은 결국, 항복 저지를 포기하고 일부는 자살 또는 체포됐다. 일본의 항복 표명은 예정대로 이뤄졌다.
[주요인물]
(*이름에 가운뎃줄이 그어진 인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인물이다)
- 쇼와 일왕(昭和天皇: 1901~1989)
- 스즈키 칸타로(鈴木 貫太郎: 1868~1948) 내각총리대신
-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1887~1945) 육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1880~1948) 해군대신
- 도고 시게노리(1882~1950) 외무대신
- 이시와타 소타로(石渡荘太郎: 1891~1950) 궁내대신
<육군부>
-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郎: 1882~1949) 참모총장
-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 육군대장, 전 내각총리대신
- 아라오 오키카쓰(荒尾興功: 1902~1974) 대좌, 군무과장
- 시라이시 미치노리(白石通教: 1910~1945) 중좌
- 이다 마사타카(井田正孝: 1912~2004) 중좌
-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 1908~1973) 중좌
- 다케시타 마사히코(竹下正彦: 1908~1989) 중좌
- 시자키 지로(椎崎二郎: 1911~1945) 중좌
- 하타나카 켄지(畑中健二: 1912~1945) 소좌
<근위 사단>
- 모리 타케시(森赳, 1894~1945)중장, 근위 제1사단장
- 고가 히데마사(古賀 秀正, 1919~1945) 소좌, 근위 제1사단 참모
- 하가토 요지로(芳賀豊次郎) 제2연대장
<동부 군관구>
-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1887~1945) 사령관
- 다카시마 타쓰히코(高嶋辰彦, 1897~1978) 참모장
<도쿄 방위군 경비 제3여단>
- 사사키 타케오(佐々木武雄, 1905~1986) 요코하마 경비대장
<그 외 인물>
- 우에하라 쥬타로(上原 重太郎, 1921~1945) 대위
- 구보타 켄조(窪田兼三) 소좌
-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9일 새벽의 소련 참전, 이어서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까지 당하자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1945년 7월 26일의 영국과 미국, 중화민국 3국 연합군 정상들의 주도로 나오게 된 포츠담 선언의 수락으로 항복하자는 의견이 강해지고 있었다.
9일에 궁(宮)에서 열린 최고 전쟁 지도자 회의에서는 스즈키 칸타로 총리를 비롯한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과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 일왕의 지위 보장을 조건으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 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 총장은 몇 가지 조건을 달고 항복을 주장했다. 오전 10시부터 개최된 회의가 끝난 뒤, 스즈키 총리는 일왕이 배석한 어전 회의에서 다시 최고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10일 오전 0시부터 궁성의 서고 지하 방공호에서 열린 어전 회의 석상에서 총리로부터 결단을 요청받은 쇼와 일왕은 도고 외무장관의 의견에 찬성하고,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연합군에 대한 연락은 오전 6시 45분부터 중립국인 스위스 및 스웨덴의 일본 공사를 통해서 행해진다.
어전회의에서의 결정을 통보받은 육군성에서는 치열한 항전을 주장하던 다수의 장교로부터 거센 반발이 나왔다. 포츠담 선언에는 모든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항목이 있었고, 육·해군은 조직 존망의 위기에 서 있었다. 그래서 논의를 위해서 오전 9시에 육군성에서 열린 회의에서 종전 저지를 위해서 아나미 육군대신과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나미 육군대신은 [불복하는 자는 우선 이 아나미를 베어라]라고 말하면서 가라앉혔다.
8월 12일 오전 0시경,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연합국의 응답이 담긴 내용을 방송했다. 그중에서 일본 정부의 국체 수호 요청에 대해 [일왕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따른다]라고 답했다. 외무성은 이 글을 [제한 아래 놓인다]고 번역해서 어디까지나 종전을 추진하려 했지만 육군에서는 [예속하는 것으로 한다]라고 해석, 일왕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면서 전쟁 속행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불만을 품은 장교들의 지도자이자 아나미 육군대신의 처남이었던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좌는 아나미 대신에게 종전 저지를 요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할복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의 모습>
15시부터 개최된 황족 회의 참석자들은 대체로 항복에 찬성했지만, 이 시각의 국무 회의와 13일 오전 9시부터 열린 최고 전쟁 회의에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국무 회의에서 끝까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했던 것은 육군 대표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 히로마사 마쓰자카(松阪広政, 1884~1960) 법무대신, 아베 겐키(安倍源基, 1894~1989) 내무장관 3명이었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시 국무 회의에서 마침내 응답 수락이 결정되었다.
그러자 관저로 돌아간 아나미 육군대신은 6명의 장교(아라오 오키카쓰 대좌, 이나바 마사오 중좌, 이다 마사타카 중좌,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좌, 시자키 지로 중사, 하타나카 켄지 소좌)에게 면회를 요구받고 쿠데타 계획에 찬동하였다. [무력 사용 계획]이라고 명명된 이 방안에서는 동부군 및 근위 제1사단을 동원해서 궁성을 격리하고 스즈키 총리, 기도 고이치(木戸幸一, 1889~1977) 내(內)대신부, 도고 외무장관, 요나이 해군대신등의 정부 요인을 억류하고 계엄령을 발포, 국체 수호를 연합국 측이 승인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나미 육군대신은 [참모총장과 만난 다음에 결심을 전하겠다]라고 대답해, 일단 일동을 해산시켰다.
<8월 12일>
오전 9시, 근위보병 2연대 제1대대가 완전 무장으로 궁성에 입성한다. 이후 궁성에서 나가지 않고, 쿠데타에 참가한다.
<8월 14일>
오전 7시, 육군성에서 아나미 육군대신과 우메즈 참모총장의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메즈는 쿠데타 계획에 반대했고 아나미도 동조했다. 한편 스즈키 수상은 육군의 방해를 배제하기 위해서 일왕이 출석하고 어전회의 개최를 생각, 모든 각료와 군인·민간인의 요인 여러 명을 더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스즈키 총리로부터 재차 결단을 요청받은 쇼와 일왕은 연합국의 회답 수락을 다시 한 번 동의하고, 필요하면 자신이 국민에게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다케시 중좌과 하타나카 소좌는 육군대신과 참모총장에 의해서 부정된 쿠데타 계획 방안에 대한 대안인 [병력 사용 제2방안]을 갖고 있었다.
국무 회의가 시작된 13시경,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 오하시 하치로(大橋八郎, 1885~1968) 회장은 내각정보국에 소환, [ 5종전 선언이 일왕에 의해 직접 방송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급 준비를 갖추도록]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15시경, 하타나카 소좌는 동부 군관구 사령부 사령관 다나카 시즈이치 대장에게 면회를 요구했다. 그는 동부군의 쿠데타 참가를 요구할 예정이었지만, 입실하자마자 다나카 대장의 호통을 받고 위축되어서 본전도 못 찾은 채 허둥지둥 퇴실했다.
한편, 쇼와 일왕에 의한 옥음방송의 6녹음은 23시 30분부터 궁내성 정무실에서 시행되었고, 녹음판은 도쿠가와 요시히로(徳川義寛, 1906~1996) 시종에게 넘겨서 왕후 궁궐 사무실 내의 금고에 보관했다.
<근위 사단 사령부(現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 공예관)>
<8월 15일>
오전 0시경 옥음 방송의 녹음을 종료하고 궁성을 나가려던 시모무라 히로시(下村宏, 1875~1957) 정보국 총재와 방송 협회 직원 등 몇 명이 사카시타몬(坂下門) 부근에서 근위보병 제2연대, 제3대대장 사토 요시히로(佐藤好弘) 대위에게 신병을 구속당한다. 이들은 병사에게 총을 맞고 인근 수위대 사령부 건물 안에 감금됐다.
이다 중좌와 시자키 중좌는 근위 제1사단 사령부에서 시라이시 중좌와 회담 중인 사단장 모리 타케시 중장에게 면회를 강요하며 쿠데타에 대한 참여를 요구했다. 이다의 기록에 의하면 모리 사단장은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메이지 신궁을 참배한 다음에 재차 결단하겠다]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다 중좌는 이 말을 듣고 한때 방을 나갔다고 한다.
교대로 사단장실에 들어간 하타나카 소좌는 잠시 후에 방을 나와서 이날, 다른 일로 이곳 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던 항공사관학교(航空士官学校)의 우에하라 대위와 동기인 육군통신학교(陸軍通信学校)의 구보타 소좌를 거느리고 다시 입실했다. 하타나카 소좌는 말없이 모리 사단장을 권총으로 쏘았고, 우에하라 대위가 군도로 참살했다. 동석하던 시라이시 중좌도 우에하라 대위와 구보타 소좌에 의해 참살됐다. 이 모리 사단장과 시라이시 중좌의 살해 경위에 대해서, 구보타 소령이 동부 헌병대에서 청취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거의 확실하다.
이 살해극이 끝나고, 사단 참모인 고가 히데마사 소좌는 하타나카 소좌가 기안했다고 생각되는 갑 제584호를 각 예하 부대에 구두로 하달, 근위보병 제2연대에 전개를 명령했다. 다만, 고가 소좌가 쿠데타 계획에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옥음 방송의 실행을 막기 위해서 우치사이와이초(内幸町)의 방송 회관 쪽도 근위보병 제1연대 제1중대가 파견됐다.
<하타나카와 우에하라에 의해 살해당한 모리 타케시 사단장>
궁내성에서는 전화선이 절단되었고, 황궁 경찰은 무장해제당했다. 곧 일왕이 녹음한 음반이 궁내성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 고가 소좌는 2대대장 기타무라 신이치(北村信一) 대위와 사토 요시히로 대위에게 수색을 명령한다. 이때 궁내성내에 있던 이시와타 소타로 궁내대신 및 기도 고이치는 금고실 등에 숨어서 난을 피했다.
이다 중좌는 미즈타니 카즈오(水谷一生, 1899~1949) 참모장을 수행하고 동부 군관구 사령부로 향한다. 여기서 동부 군관구의 쿠데타 참여를 요구했지만, 다나카 사령관과 다카시마 참모장은 이미 진압을 결정했다. 다카시마 참모장은 오전 4시가 넘어서 하가토 요지로 근위 제2연대장과의 전화 연락에 성공한 후, 모리 사단장의 살해와 사단 명령이 위조임을 전했다.
하가토 연대장은 그 자리에 있던 시자키, 하타나카, 고가 장교에게 즉시 궁성에서 퇴거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궁내성 내에서는 반란 발생을 전달하고 귀환했던 도쿠가와 시종이 병사들과 말다툼을 하다가 제1대대의 와카바야시 히코이치로(若林彦一郎) 중사에게 두들겨 맞았다. 구타한 이유에 대해 와카바야시 중사는 후일, [주위의 사람들이 살의를 가지고 도쿠가와 시종을 포위하고 있어서 이대로는 시종이 살해되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갑작스럽게 도쿠가와 시종을 때려서, 기절시키는 것으로 주위를 이해시켰다]라고 친척에게 말해주었고, 직접적인 살의나 감정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궁성을 떠난 하타나카 소령은 제1중대가 점거한 방송 회관으로 향하여 궐기를 호소할 성명 방송을 요구했지만, 직원이 [방공 정보가 나와 있어서, 동부군의 허락 없이는 방송할 수 없다]라고 기지를 발휘하면서 이것은 실패하였다.
<일왕의 항복방송을 녹음한 일명 '옥음판'>
해가 뜨자마자인 오전 5시경, 동부군 다나카 사령관이 몇 명만 거느리고, 스스로 근위 제1사단 사령부로 이동한다. 여기서 위조 명령대로 부대를 전개하려던 근위보병 제1연대 와타나베 연대장을 멈추게 한다. 이때 연대장 옆에 있던 사단 참모 이시와라 소령은 동부 헌병대로 신병이 보호된다(체포된 것이 아니었고, 정말로 신병을 보호하려는 의미였기에 이시하라는 당일 저녁에 사단 사령부로 복귀한다). 오전 6시가 넘어서 쿠데타의 발생을 알게 된 쇼와 일왕은 [본인이 병사들에게 가서 타이르겠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육군대신 관저에서 아나미 육군대신이 자결하였는데 이때 시간은 5시 반, 사망한 시간은 7시 10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케시타 중좌는 육군대신의 인장을 이용해서 명령을 위조하려고 이다 중좌를 부추겼지만, 이다는 이미 쿠데타의 실패를 깨닫고 있었다. 다나카 동부 사령관은 건문(乾門) 부근에서 하가토 연대장을 만나서 병사들의 철수를 명령하였고, 그대로 궁내성의 반란 진압을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쿠데타 세력은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방송 회관에서는 동부군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은 하타나카 소좌가 방송을 단념하고, 수위대 사령부에서는 구속되었던 시모무라 정보국 총재 등이 풀려났다. 이윽고 오전 8시 전에는 근위보병 2연대의 병사들이 궁성에서 철수하면서, 궁내성 내 지하실에 숨어 있던 이시와타와 기도도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금고에 숨겨있던 2장의 녹음판도 방송을 할 예비 스튜디오로 무사히 운반될 수 있었다.
끝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못한 시자키 중좌와 하타나카 소좌는 궁성 주변에서 전단을 살포하면서 궐기를 호소했다(사토 대위와 후지와라 대위가 살포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호응이 전혀 없자, 좌절한 이들은 오전 11시 넘어서 니주바시(二重橋)와 사카시타몬 사이의 잔디밭 위에서 자결했다. 그즈음, 고가 참모는 옥음 방송 중에 근위 사단 사령부 2층 귀빈실에 안치된 모리 사단장의 유해 앞에서 권총과 군도로 자결했다. 오전 11시 30분 지나서, 방송 회관 스튜디오 앞에서 갑자기 한 명의 헌병 장교가 방송을 저지하려고 난입하다가 곧 붙잡혀서 헌병에 연행됐다. 이러한 소란들이 끝난, 정오가 지나자 라디오에서는 시모무라 총재에 의한 예고와 기미가요가 나간 뒤에 옥음방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렇게 일본은 무사히(?) 항복하였다.
후에 쿠데타에 연관된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은 하타나카 소좌가 모리 사단장 살해 이후, 쿠데타를 사실상 주도했다고 시사되고 있다.
<궁성 정문 앞에 놓인 니주바시의 모습, 근처의 잔디밭에서 쿠데타를 사실상 주도했던 하타나카 소좌와 시자키 중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황궁의 옛 호칭 [본문으로]
- 현재는 고쿄(皇居), 우리식으론 황거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 陸軍省: 1872년~1945년까지 존재,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설립된 일본의 행정 관청 각성 중의 하나로 육군대신이 수장을 맡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정 기관이었다. [본문으로]
- 東部軍管区: 태평양 전쟁 중 간토 지역과 혼슈 북부를 방어하는 당시 일본 야전군이다. [본문으로]
- 内閣情報局: 現 내각정보조사실(内閣情報調査室)로 일본의 정보기관이다. [본문으로]
- 玉音放送: 쇼와 일왕의 무조건항복을 알리는 [종전 조서]를 읽은 라디오 방송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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