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두대(guillotine)는 2개의 기둥 사이에 매단 칼을 떨어뜨려서, 기둥 사이에 엎드린 죄인의 목을 잘라내는 참수형을 위한 집행 장치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수형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적 목적으로 채용되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1792년부터 1981년까지 사용됐다. [ 1단두대], [기요틴]이라고도 불리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수형의 집행 시 사용되는 장치 전반을 가리키며 단두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이미 단두대와 같이 목을 치는 장치의 원형은 13세기 유럽에서 이미 존재했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마지막 사형 집행관이었던 페르난도 메이소니나(Fernand Meyssonnier, 1931~2008) 소유의 단두대. 실제로 당시 사형 집행 때 사용된 단두대다>
프랑스는 단두대가 채용되기 전의 처형방식은 평민은 교수형, 참수형은 귀족층에 대해서만 집행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참수에는 도끼나 칼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사형 집행인이 미숙한 경우에는 일격에 참수할 수 없어서 죄수의 목을 몇 번이나 베는 등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면서 사형수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일도 많았으며, 숙련되고 기량이 높은 사형 집행인을 고용할 수 있는 죄수는 돈이 많은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1788년, 혁명 전 폭풍전야의 분위기 속에서 [캐서린 바퀴] 방식의 2공개 처형에서 민중이 무죄를 호소하는 사형수에게 동조하면서 사형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사형 집행인의 직무에 대한 기피의 금기가 깨졌다. 이를 계기로 해당 형벌은 폐지되면서 고통받지 않는 사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프랑스혁명 발발 후, 내과 의사로 헌법제정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 Ignace Guillotin, 1738~1814)은 수형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말고, 신분이나 빈부에 관계하지 않는 명예로운 참수형을 적용하기 위해서 기계를 이용한 [인도적] 처형을 하자고 의회에서 제안했다. 처음 기요탱의 제안은 비웃음을 받았지만, 그의 거듭된 제안과 설득에 결국 그 안이 채택되면서 단두대는 1792년 4월 25일, 의회에서 정식으로 사형도구로 인정받았다. 이는 기존의 사형기구보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혁명 전, 프랑스의 사형방식 중 하나였던 브레이킹 휠(일명, 캐서린 바퀴) 형벌. 참고로 해당 형벌은 주로 부모를 죽인 패륜을 저지른 죄수에게 시행되었으며, 상기한 무죄를 주장한 죄수는 후에 전격적으로 사면받는다>
설계 의뢰를 받은 사람은 외과 아카데미 비서였던, 외과 의사 안토인 루이스(Antoine Louis, 1723~1792)였다. 그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스코틀랜드의 메이든(Scottish Maiden)이나 영국 요크셔 서쪽 지방의 핼리팩스 마을에서 사용되었던 핼리팩스 단두대(Halifax Gibbet) 등, 각지의 참수 장치를 연구하면서 칼을 초승달 형으로 만들었고, 사형수의 목을 판자로 고정하는 등의 개량을 추가한 단두대를 설계했다.
시제품 제작은 독일의 하프시코드 제작자 3토비아스 슈미트(Tobias Schmidt, 1768~1821)가 했다. 이때 단두대의 설계도를 본 루이 16세가 칼을 초승달 모양이 아니라 4사선 모양으로 만들면, 어떤 굵기의 목도 절단할 수 있다고 제안해서 현재의 모양으로 개량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슈미트의 고안이라는 설도 있다.
단두대는 전체 높이가 약 5m 정도에 목을 끼우는 장소는 지면에서 37㎝ 정도의 높이에 있다. 그리고 단두대는 4m 높이에서 40㎏의 칼날이 자유 낙하함으로써 목을 절단하는 장치였다. 덧붙여서 목과 동시에 양 손목도 잘라내는 모양의 단두대도 존재한다.
<단두대를 새로운 사형방식의 도구로 쓸 것을 제안한 기요탱 당시 국민의회 의원>
장치의 정식 명칭은 [Bois de Justice(정의의 기둥)] 이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설계자 안토인 루이스의 이름을 따서 [루이존(Louison)] 혹은 여성형인 [루이젯(Louisette)]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장치의 인도성과 평등성을 크게 선전한 기요탱이 더 유명해지면서, 기요탱 박사의 장치라는 의미인 [기요틴(Guillotine)]이라는 호칭이 정착됐다. 기요탱 박사는 이 불명예스러운 명칭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이후에도 명칭이 고쳐지지 않자 가족은 결국 성을 바꿨다.
국왕 루이 16세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Josèphe-Jeanne de Habsbourg-Lorraine d'Autriche, 1755~1793)도 다른 평민과 마찬가지로 단두대에 의해서 처형된 것은 워낙에 유명하다. 또, 혁명의 거물이었던 조르주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 공포정치를 주도한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수형자를 단두대로 끝없이 보낸 검사 푸키에 탱빌(Antoine Quentin Fouquier de Tinville, 1746~1795)도 최후에는 단두대에 의해서 참수됐다. 이처럼 프랑스의 공포정치로 당파 구분없이 줄줄이 목이 달아나는 상황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서 [기요틴의 구토]라고 불릴 정도였다.
루이 16세의 목을 벤 단두대의 칼날은 파리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의 4대 당주였던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 1739~1806)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는데, 나중에 상송 가의 마지막 사형 집행인이었던 클레망 상송(Henry-Clément Sanson, 1799~1889)이 과소비로 의한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자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칼날이 저당잡히고 말았다. 그 뒤, 사형 집행 명령을 받은 상송은 단두대를 팔아버린것을 법무장관에게 이실직고해서 3800 프랑의 현금이 지급되었고, 다시 단두대를 사서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이 직후에 해당 일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 집행인에서 파면당했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단두대는 희한하게도, 사형집행인의 사유재산으로 공공재산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자기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상송은 당연하게도 횡령죄로 추궁당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송이 팔아먹은 단두대는 평소 교류가 있던 영국인의 손에 넘어갔고, 현재는 밀랍 인형 박물관인 영국의 [마담 투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상송의 밀랍인형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마담 투소에서 전시 중인 단두대의 칼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실제로 처형할 때 쓰였다>
단두대가 나올 때까지 프랑스에는 160명의 사형 집행인과 3,400명의 조수가 존재했다. 그러던 게 단두대 도입 후 확 줄어들면서, 1870년 11월에는 단 한 명의 집행인과 5명의 조수만으로 프랑스 전역의 사형을 담당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처형은 일부러 공개하면서, 민중에 대해 경고로 해야 한다는 형법 사상이 있어서 이전에는 공개 처형이 널리 행해졌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9년까지 프랑스에서 단두대의 공개 처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세기부터 서서히 대두하는 현대적 인권의식으로, 눈에 띄는 공개된 장소를 피해서 교도소 문앞에서 이른 아침에 실시하게 되었고 광장 등에서 대낮에 당당히 행하는 일은 사라진다.
1939년 6월 17일, 집행인 Jules-Henri Desfourneaux(1877~1951)에 의해서 집행된 독일 출신의 살인범 오이겐 비드만(Eugen Weidmann, 1908~1939)의 사형 집행이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공개하는 단두대 사형이었다. 이 사형집행은 도촬되어서 극장에서 공개되었는데, 이것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 법무부는 이후의 사형 집행을 비공개로 전환하게 되었고 이것이 사형을 비공개로 바꾼 결정적인 이유다. 그래서 이것이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영상으로 기록된 단두대에 의한 처형 영상으로 지금도 인터넷에서 이미지나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단두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의 목을 그대로 쳐내는 잔혹한 이미지이지만, 도입의 경위 및 도입 당시 다른 사형방식과 비교해서 오히려 인도적인 사형 장치로 유럽에는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은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사형 제도 자체가 폐지되는 1981년 9월까지 단두대는 대기 중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단두대로 처형된 것은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하미다 드잔도비(Hamida Djandoubi, 1949~1977)라는 이름의 튀니지인 근로자로, 1977년 9월 10일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단두대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다.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공개된 단두대 처형으로 집행인이 칼날을 내리기 직전의 모습이다>
[이모저모]
- 도입을 제안한 기요탱 자신이 이 장치로 처형됐다는 속설이 유명했지만, 전혀 5사실이 아니다. 기요탱은 그 뒤 멀쩡하게 프랑스 보건 정책에 주력하다가 1814년, 어깨의 종양이 원인인 병으로 사망했다.
- 1996년에 미국 조지아주의 하원의원이 전기의자나 약물로 죽는 사형수의 장기 기증이 되지 않으므로 장기에 손상을 주지 않는 단두대를 채용해야 한다는 법안을 냈지만, 당연히 폐기되었다.
- 단두대는 공개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많은 시민이 단두대에 의한 공개처형을 유희 거리로 즐기고 있었다.
- 단두대의 공개처형이 유명해지자, 단두대의 미니어처가 장난감으로 판매되면서 아이들이 잡아온 새나 쥐의 목을 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당연히 날카로운 칼날 그 자체였고, 갖고놀던 아이들도 다치는 일이 빈번했다. 독일의 작가, 철학가, 과학자로 유명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도 아이에게 단두대의 장난감을 사주도록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덧붙여 괴테의 모친은 이 부탁을 거절했다.
- 단두대의 제조권리는 슈미트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난감도 슈미트가 독점적으로 제작하였다. 덕분에 슈미트는 재산을 크게 축적했으며, 그 때문에 단두대의 권리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치열했다고 한다.
- 프랑스 혁명 200주년(1989년) 기념식 행사에서 짚 인형에 의한 단두대 행사가 열리는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실제 집행 자체는 1977년이 마지막이었다. [본문으로]
- Breaking wheel: 캐서린 바퀴 또는 단순히 바퀴라고 불리는 브레이킹 휠은 유럽에서 주로 중세에서 근대의 공개 처형으로서 범죄자의 뼈를 부수는 형태로 죄수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서 죽이는 고문 방식이었다. [본문으로]
- harpsichord: 피아노의 전신인 건반 악기. [본문으로]
- Louis XVI (1754~1793):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으로, 프랑스 혁명 때 퇴위당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본문으로]
- 이원복 씨의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프랑스 편에도 나왔을 정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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