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9월 20일> 1792년 9월 20일 - 프랑스 혁명 전쟁 <발미 전투>

!@#^& 2019. 9. 20. 01:27


- 발미 전투(Bataille de Valmy)1792년 9월 20일에 일어난 프랑스군프로이센군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로, 프랑스군승리했으며 전투의 다음 날9월 22일 입법 의회왕정 폐지를 선언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1791년 [필니츠 선언[각주:1]]에 근거하여 혁명이 프랑스 밖으로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 개입을 시행한다. 그러자, 이듬해 프랑스의 입법 의회도 필니츠 선언 취소거부되면서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한다(1792년 4월 20일).

1792년 7월에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를 침공한다. 프랑스 정부는 [조국위기]선언하였고 이어서 프로이센군도 프랑스에 침입하면서 [국왕 부부(루이 16세)에게 위해를 가하면 파리괴멸시키겠다]라고 통보, 프랑스 시민분노시킨다. 한편 양국 군파죽진격을 계속하면서 8월 23일에는 프랑스의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롱위함락되었고, 9월 2일에는 베흐덩항복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파리는 동요한다.

9월 19일 메츠스당의 군대가 합류, 당시 프랑스군은 약 5만 병력이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3만 4000명의 병력으로 수적으로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지만, 프랑스군 병사 대부분은 모집된 직후인 [1792년의 봉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마추어프로의 싸움으로 질적으로는 프랑스가 불리했다.



1792년 9월 20일, 아르곤느언덕발미에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브라운슈바이크(Karl Wilhelm Ferdinand, Herzog zu Braunschweig-Lüneburg, 1735~1806) 공 지휘의 프로이센군과 교전(발미의 포격)했다. 프랑스군은 [국민 만세!]를 외치며 분전, 다수의 희생자를 냈지만 프랑스의 포병장교였던 그리보발(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1715~1789)정비했던 포병대 대포의 위력이 주효하면서 프로이센군은 퇴각,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프랑스군의 사망자300명이었고 프로이센 군은 200명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최초의 군사적 승리인 이 전투는 혁명 정신의 승리라고 칭송받았으며, 당시 이 전투를 목격했던 독일의 유명한 작가인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리고 이날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Von hier und heute geht eine neue Epoche der Weltgeschichte aus, und ihr konnt sagen, ihr seid dabei gewesen)]

괴테의 이 어록으로, 새로운 국민군이 종래의 용병군을 꺾었고 근대 국민국가절대 군주제 국가를 이긴 증거로써 평가받았다. 또한, 이 싸움으로 사상 최강의 군대·국민군이 탄생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 싸움의 실체는 대규모 전투다운 전투 한번 제대로 없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고(주로 몸싸움), 가 와서 전투를 그만두었을 뿐, 프로이센후퇴시켰다고 말은 해도 젖은 습지대에서 식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20㎞ 후방으로 이동했을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로이센 측의 손해는 거의 없었으며, 이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군대군주의 군대승리했다는 것이지 그 외 전술적 의미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음 날 9월 22일입법 의회왕정 폐지선언한다.




  1. Declaration of Pillnitz: 1791년 8월 27일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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