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도쿄올림픽 당시, 입장하는 일본선수단>
- 제18회 하계올림픽(영어: Games of the XVIII Olympiad, 일본어: 1964年東京オリンピック)는 1964년 10월 10일~10월 24일까지 15일 동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올림픽이다. 일반적으로 [도쿄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1960년, 도쿄 시내의 모습>
애초 1940년에 올림픽을 개최예정이었으나, 2차대전으로 인해 반납한 일본은 1964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아시아 첫 올림픽]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당시에는 [유색 인종] 국가의 사상 첫 올림픽이라는 의의가 있었다. 1
또, 아시아나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이 잇따르기도 했던 1960년대와 맞물려서 그 당시 기준으로 역대 가장 많은 국가인 94개국이 참가한 하계올림픽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으로 철저하게 패했지만, 그 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부활을 이룬 일본이 다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확실하게 복귀한 것을 천명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 확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유치 관계자 (1959년 5월)>
일본은 1954년, 1960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입후보한다. 그러나 이듬해 1955년에 있던 제50차 IOC 총회에서 로마에 패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러나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 1964년 올림픽 개최지로 다시 입후보하였고, 1959년 5월 26일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제55차 IOC 총회에서 입후보한 미국·유럽의 3도시를 제치며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득표수는 도쿄가 34표, 미국의 디트로이트가 10표, 오스트리아의 빈은 9표, 벨기에 브뤼셀이 5표로 일본이 전체 표의 절반 이상을 독식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특히, 당시 총회에서 후보지 연설에 나섰던 히라사와 가즈시게(平沢和重, 1909~1977) 외교관과 중남미 국가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일본계 미국인 사업가 프레드 이사무 와다(フレッド・イサム・ワダ, 1907~2001), 당시 도의원이자 대회 유치 실행 위원장이었던 기타지마 요시히코(北島義彦, 1911~1959), 그리고 [일본 레슬링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핫타 이치로(八田一朗, 1906~1983)등의 공적이 컸다.
여기서 기타지마는 핫타 이치로와 함께 직접 중남미 국가로 가서 표 확보에 최선을 다했으나, 올림픽 개최지 확정을 보지 못하고 위암으로 그해 1월, 눈을 감는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 우리에게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자 A급전범 혐의자로 유명하다>
1957년 당시, 일본 수영 연맹 회장을 맡고 있던 다바타 마사지(田畑政治, 1898~1984)는 올림픽 유치 비용이 2013년 기준으로 약 1200억엔(1조 3,440억 원)으로 그 액수에 부담을 느끼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당시 총리에게 관광 수입을 통해서 충분히 메울 수 있다며 직접 담판 지었다.
개최가 결정된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 조직 위원회]가 조직되면서 국가 예산으로 국립 경기장을 비롯한 시설 정비에 약 164억엔(1,836억 8,000만 원), 대회 운영비 94억엔(1,052억 8,000만 원), 선수 강화 비용 23억엔(257억 6,000만 원)을 계상한 국가 프로젝트가 된다 2. 3
개최에서 조직위원회는 거대한 도쿄 올림픽 공식 포스터를 각 도시에 설치, 디자인은 가메쿠라 유사쿠(亀倉雄策, 1915~1997)가 다루었고 1963년 2월 7일 건강악화로 대회 조직 위원회 회장직을 사퇴한 츠시마 주이치(津島寿一, 1888~1967)의 사퇴 이후 4개월간 공석이던 자리에 야스카와 다이고로(安川第五郎, 1886~1976)가 결정되면서 올림픽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고,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IOC에서 공식으로 업로드한, 1964년 도쿄올림픽 하이라이트>
[경기종목]
- 정식 종목 : 근대5종, 농구, 다이빙, 레슬링, 복싱, 배구, 사격, 사이클, 수구, 수영, 승마,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하키
- 시범 종목: 무도, 야구
[올림픽 메달]
도쿄 올림픽 메달은 대장성 조폐국의 공예관이 4원형을 제작했다. 디자인은 금·은·동 모두 앞면은 [승리자를 목말 태운 남성의 군상], 뒷면은 [승리의 여신]이 부각되었고, 대회명과 해당 경기종목이 새겨져 있다.
사이즈는 금메달·은메달·동메달 모두 지름 6cm, 두께는 3mm로 무게는 금메달 90g, 은메달 82g, 동메달 69g.
제조된 개수는 금메달 300개, 은메달 300개, 동메달 314개.
가격은 당시 기준으로 금메달 12,500엔(현재가치로 약 535만 원), 은메달 7,500엔(현재가치로 약 321만 원), 동메달 6,000엔(현재가치로 약 257만 원)으로 알려졌으나, 이 가격은 어디까지나 조폐국이 일본 올림픽 위원회에 청구한 금액이다.
해당 메달은 일본의 예술가인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郎, 1911~1996)와 그래픽 디자이너인 다나카 잇코(田中一光, 1930~2002)이 고안했다.
<도쿄올림픽 금메달 뒷면의 모습>
[올림픽 메달 집계 순위(금메달 개수 기준)]
1위(미국) - 금메달: 36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28개
2위(소련) - 금메달: 30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35개
3위(일본) - 금메달: 16개, 은메달: 5개, 동메달: 8개
4위(독일) - 금메달: 10개, 은메달: 22개, 동메달: 18개
5위(이탈리아) - 금메달: 10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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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위(대한민국) - 금메달: 0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당시 올림픽 선수촌(上)과 선수촌 식당에서 분주하게 요리 중인 요리사(下)들의 모습>
[선수촌]
반환된 주일 미군 시설이었던 워싱턴 하이츠 내 독신 장교용 숙소를 선수촌으로 정비하였다. 이 밖에도 하치오지 선수촌(사이클), 사가미호 선수촌(카누), 오이소 선수촌(항해술), 가루이자와 선수촌(종합 마술 경기) 등 4곳으로 나뉘어서 개촌되었다.
각국 선수단 중 가장 먼저 일본에 도착한 나라는 바로 이웃 나라인 한국의 승마 종목 선수단으로 5월 31일 부산항에서 아리랑호를 타고 출항, 6월 3일에 도쿄에 도착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선수단이 비행기와 배를 통해 들어왔다.
[식사]
선수촌에는 대회 기간 매일 7,000끼 이상의 식사가 만들어졌으며, 개촌에서 폐촌까지 기간에 제공된 식단은 총 60만 개에 이른다.
선수촌의 선수용 식당은 남녀별로 나뉘어 두 군데였는데, 여성 전용 식당은 후지(FUJI), 남성 전용은 사쿠라(SAKURA)였다. 이 중 후지 식당의 총괄 담당은 제국 호텔(帝国ホテル)의 무라카미 노부오(村上信夫, 1921~2005) 셰프였고, 사쿠라 식당의 총괄 담당은 닛카츠 국제 호텔(日活国際ホテル)에서 파견한 바바 히사시(馬場久 1903~1987) 셰프가 맡았다.
이 두 사람에게 인솔된 주방장은 총 306명으로 일식·양식은 물론, 이슬람교도인 선수들의 음식을 마련하고자 수소문 끝에 일본에 거주하던 이슬람식 도살 면허와 일본의 조리사 면허를 가진 사람을 일본에서 딱 한 사람을 찾아내 선수촌에서 이슬람교도를 위한 요리를 만들어 줬으며, 프랑스 선수단은 따로 자국 요리사를 데려왔다.
선수 식당에서 올림픽 기간에 소비된 음식재료는 소 340마리, 돼지 280마리, 양 600마리, 닭 6만 마리, 새우, 연어, 넙치 합계 46톤, 채소 356톤, 달걀 72만 개, 쌀 16톤, 식빵 8만6천 근, 우유 50만 개로, 대량의 식사를 조달하기 위해서 냉동식품의 기술이나 해동법, 조리법이 연구 및 향상되었다.
[기타]
선수촌 경비는 경찰청 외에 육상자위대도 담당하였는데, 아사카(朝霞駐)에 주둔하던 대원 약 360명이 7월 16일 대회 종료 후까지 교대로 임무에 임했다.
7월 9일 오후 9시쯤 선수촌 246호관에서 화재가 발생, 30㎡를 태웠다.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원인은 가스 공사 때문으로 추측됐다.
<도쿄올림픽 성화 점화의 순간>
[성화 봉송]
성화 봉송의 최종 주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었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현 미요시에서 태어난 당시 19살의 육상 선수인 사카이 요시노리 5였다.
불씨 일부는 대회 종료 후에도 가고시마 현립 청소년 수련장에서 희망의 불씨로 2013년까지 보관되었다.
[도쿄올림픽이 일본에 끼친 영향]
- 도쿄올림픽 유치 성공으로 개최에 앞서 1964년 4월 28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인정되는 큰 배경이 됐다. OECD 가입은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세계 5대 경제 대국으로 확실히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 도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경기 시설이나 일본 국내의 교통망 정비에 엄청난 건설 투자가 행해졌으며 경기나 시설을 보기 위한 여행 수요의 증가와 컬러 방송을 보기 위한 TV 구매의 비약적 증가로 국내 소비도 증가했기 때문에, 일본 경제에 [올림픽 경기]라고 불리는 호경기를 가져왔다. TV 구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TV 프로그램의 시청자도 자연히 많아졌고 그 덕분에 오락성이 높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증가했다고 한다.
- 특히 개최지인 도쿄에서 개최를 위한 경기 시설뿐만 아니라 공항·고속도로·호텔 등 다양한 인프라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도시 간 교통 기관의 핵심으로서 수도권인 도쿄에서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하는 주쿄권(中京圏)을 거쳐 오사카(게이한신, 京阪神)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권을 잇는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막식 9일 전인 10월 1일 개업한다.
- [쓰레기 도시]로 불리던 도쿄에 정부의 주도로 쓰레기 수거 차량이 250대 도입되었고 폴리 에틸렌 양동이가 보급되었다.
- 올림픽 조직 위원회가 선수촌의 정비 기간 및 대회 기간중 경비에 있어서 경찰 인원 부족을 고려해, 민간 경비 회사 [일본 경비 보장(日本警備保障, 現 세콤)]에 경비 의뢰를 시행했다. 이 민간 경비 회사와 함께 경비가 무사히 끝난 것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 민간 경비가 널리 알려지게 된다.
-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컴퓨터에 의한 실시간 기록관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그 이전의 올림픽에서도 컴퓨터는 사용되고 있었으나 기록 관리는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최종적인 공식 기록의 확정과 작성에는 대회 종료 후 몇 개월이나 필요했다. 해당 시스템의 성공으로 이 프로그램은 일본의 금융업 온라인 시스템과 공장의 생산관리 시스템 등 수많은 분야에서 활용된다.
- 이전까지 사회인의 스포츠는 볼거리였지만, 이 대회를 계기로 지역 곳곳마다 공공 스포츠 시설이 만들어졌다.
<도쿄올림픽 당시 픽토그램 中>
[픽토그램]
안내나 유도, 경기 종목 표시에서 픽토그램이 채용된 것은 바로 도쿄 올림픽이 최초로, 외국어를 통한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던 당시 일본인과 외국인 사이를 좀 더 원활하게 연결하기 위해 개발됐다.
제작은 아트 디렉터를 맡은 카츠미 마사루(勝見勝, 1909~1983)를 중심으로 30명 정도의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우선 경기 종목 픽토그램 총 20종이 올림픽 전년도에 만들어졌고, 1964년 들어서 시설용 픽토그램 총 39종이 제작되었다.
[도쿄 올림픽 이모저모]
-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참가 선수에게 자격 정지 처분을 둘러싼 국제 육상 경기 연맹, 국제 수영 연맹과 대립했던 북한과 인도네시아는 조직 위원회가 양국의 참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조정을 계속하였지만, 양국 모두 개막식 전날(10월 9일)에 불참 신고서를 조직 위원회에 제출하고 불참한다.
- 당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하고 있던 남아프리카의 참가를 둘러싸고, 이것에 반대·항의하는 아프리카 스포츠 최고 회의의 요청을 받아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남아프리카의 참가를 거부한다.
- 중화민국(대만)과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지위를 놓고 충돌하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독립된 국가로 IOC에 가입한 중화민국의 취급에 대한 반발로 1958년, IOC를 탈퇴했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았다.
- 당시, 일본의 소설가이자 우익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1970)는 기간 중 올림픽 리포터로 행사나 각 경기의 순간을 전하는 기사를 마이니치 신문, 아사히 신문 등에 나누어서 연재하였다.
- 선수촌에서 불가리아 선수끼리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 당시 이케다 하야토(池田 勇人, 1899~1965) 총리는 9월, 정밀 검사 결과 후두암이 발견되어 입원 치료를 하다가 10월 10일 개회식은 겨우 참석했지만, 폐회식은 불참하였고 그 다음 날인 10월 25일에 사임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사망.
- 폐회식은 지금까지의 관례와 달리 나라별로 정돈된 행진이 아닌, 각국의 선수가 뒤섞여 자유롭게 입장하게 되었다. 다만 국가별로 선수가 입장하지 않은 것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이 먼저다.
- 공모로 결정된 공식 표어는 [세계는 하나, 도쿄 올림픽]으로 나고야 중학생의 작품이다.
- 일본 내에서는 티켓 판매가 순조로웠고. 종목에 따라선 밤을 새워가며 표를 사려고 줄을 서는 현상도 나타났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티켓 판매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매진된 나라는 다름아닌 대한민국뿐이며 그 외의 나라에서는 경기종목에 따라 매진된 표는 있었으나 모두 팔린 나라는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티켓을 사도 호텔을 예약할 수 없어서 못 간다]라는 목소리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과 한국은 당시 외교 관계를 맺지 못했으나 북한과 달리 한국은 도쿄 올림픽에 참가했다.
- 참고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대한민국은, 당시 개발도상국으로선 68년 멕시코에 이어서 두 번째였고 아시아에서도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본문으로]
- 최근 올림픽 개최비용이랑 비교하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은가? 현재 기준으로 치면 약 12조 원 이상 든 올림픽으로, 당시 일본 정부가 부담을 느꼈을 만하다. [본문으로]
- 참고로 2020년 도쿄올림픽이 최소 13조 원의 경비가 제시되었다. [본문으로]
- 大蔵省: 現 재무성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재무부 정도. [본문으로]
- 坂井義則, 1945~2014: 당시 와세다 대학 경주부 소속으로, 그 후 후지 텔레비전 사원으로 근무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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