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0월 15일> 1917년 10월 15일 - 마타 하리, <독일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의해 총살되다>

!@#^& 2019. 10. 15. 00:41


- 마타 하리(Mata Hari, 1876~1917)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한, 프리슬란트계 네덜란드인 무희(댄서)이자 스트리퍼다. 제1차 세계 대전간첩 혐의로 프랑스에 붙잡혀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다. [마타 하리]는 댄서로서의 예명이며, 본명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간첩이자 대명사적 존재로 지금까지 유명하다.


<21살의 마타하리>


네덜란드 프리슬란트주 레이와르던에서 4남매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석유 사업모자가게를 성공적으로 경영하였고, 일가는 호강할 만큼 부유한 집안이었다. 마침 마르하레타유일한 딸이기도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자랐으며, 13세까지 상급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마르하레타의 아버지가 석유 투자에 실패하면서 상황은 일변한다. 손실을 으로 보충하면서 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889년 마침내 파산하면서 부모님은 이혼하고, 마르하레타를 포함한 아이들은 각각 다른 친척에게 맡겨진다. 어머니는 마르헤라타가 15살이던 1891년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에서 1893년재혼했다.

마르하레타는 자신의 후견인Heer Visser에게 의지해 레이덴으로 이주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유치원 교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나, 학장과의 마찰로 후견인에게 쫓겨나면서, 삼촌의 집이 있던 덴하그로 떠난다.

19살 때, 신문에 게재된 결혼 배우자 모집 광고에 응모했고 21살 연상의 네덜란드군 장교결혼한다. 이것은 처음 만난지 불과 100일만의 일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라서 보르네오, 수마트라, 자바에서 머무르며 두 아이를 낳는다. 


<네덜란드의 장교 루돌프 맥레오드(Rudolph MacLeod, 1856~1928) 대위와의 결혼생활 당시 모습>


그러나, 애초에 사랑이 있는 결혼이 아니었고 화려한것을 좋아하는 마르하레타와 남편의 여자에 대한 절제되지 않는 행동이나 가정 폭력으로 인해 부부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버린다. 결정적으로 아들이 숨지면서 결혼 7년만인 1902년 이혼, 아이는 남편이 떠맡게된다.

이혼한 마르하레타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고, 곧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다. 하지만 좀처럼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생활은 점점 곤궁해 진다. 

어느 날, 친구파티에서 여흥으로 자바에서 배운 무용을 선보이자,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 그러자 그녀는 1905년이국적인 외모를 활용,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온 공주], 또는 [인도 사원의 춤추는 무당]이라는 선전과 함께 댄서데뷔하였고 오리엔탈 스타일무용을 하게된다.

쇼는 호평을 받았으며 흥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을 계기로 마르하레타의 춤은 화제가 되어 간다. 처음에는 작은 술집에서 소수의 손님을 상대로 춤을 선보이는 정도였지만, 머지않아 활동의 장소는 유럽으로 퍼져 마침내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좌(Teatro alla Scala)라는 유서깊은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성공하는 등, 일약 인기 댄서가 되었다.

이 때부터, 보다 관객에게 인기관심을 끌도록 동양적인 느낌의 [마타 하리]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다. 참고로 마타 하리란, [태양] 혹은 [하루의 눈]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또는 인도네시아어에서 유래한다.


<1910년 마타 하리의 모습>


그녀는 또한 많은 고급사관 혹은 정치인을 상대로 한 고급 매춘부이기도 했다. [마타 하리]는 수없이 많은 프랑스군 장교 혹은 독일군 장교와 함께 잠자리 했다고 여겨져 국제적음모도구가 되어 갔다.

1917년 2월, 그녀는 프랑스에서 이중간첩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많은 독일인 및 프랑스인 병사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기소됐다. 그 체포는 독일 주재·스페인 주재 무관이 마타 하리의 암호 이름 [H-21]해독된 것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전황은 프랑스에 있어서 불리했고, 정부는 전쟁에 의한 심대한 피해책임 소재추궁당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있어서 모든 군사상 책임실패를 마타 하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편리했는데, 심지어 수송선이 독일의 U보트에 가라앉은 것도 그녀의 책임으로 돌렸다.

1917년 7월 24일 그녀는 유죄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그해 10월 15일, 생 라자르 교도소에서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1917년 2월 13일,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을 당시 마타 하리의 모습>


마타 하리는 프랑스군 및 독일군에서 첩보요원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독일이나 프랑스 어느 진영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정보를 가져다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첩보 활동정확하게 어떠한 것이었는지 오늘날까지 명쾌하게 알 수 없다.

재판·처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재판 때는 처형을 면하기 위해 임신했다고 그녀를 지원하는 사람으로부터 권유받았지만, 본인이 거부했으며 그녀를 처형하는 총살대는 마타 하리의 미모현혹되지 않도록 가리고 쐈다는 얘기도 있었다(이게 말이되냐)

그 밖에도 그녀는 총살 前, 병사들에게 키스를 날리거나 총살 직전롱코트를 벗겨 전라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 등 별의별 억측들이 난무했다.

처형 직전의 마타 하리는 태연하게 럼주 한 모금을 마셨고, 눈가리개나무에 묶이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또 일화가 있는데 그녀를 지원하는 어느 청년이 총살을 담당하는 군인들에게 뇌물을 보내 총에는 공포탄이 들어가도록 시도되었는데, 실제로는 실탄이 발사돼 청년의 기도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도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오페라 [토스카]에서 영감을 받아 꾸며낸 이야기로 보인다. 이러한 사형을 시행하면 확실히 사형수가 을 거두었는지 확인 및 사살을 하므로 카더라에 불과하다. 이렇듯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간첩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마타 하리의 생가미용실로 사용됐지만, 2013년 10월 19일 화재소실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