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 <11월 4일> 2000년 11월 4일 - 일본 고고학 최악의 흑역사, <구석기 조작 사건>

!@#^& 2019. 11. 3. 22:28

<당시 구석기 유물 조작 현장을 포착한 마이니치 신문의 기사>


- 구석기 조작 사건(旧石器捏造事件)일본 각지에서 [~원인(原人)] 붐을 일으킨, 일본의 전기·중기 구석기시대유물이나 유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실은, 발굴조사에 깊게 관여하던 아마추어 고고학 연구가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1950~)사전조작자작극으로 언론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다. 

후지무라는 1970년대 중반부터 각지의 유적에서 조작에 의한 [구석기 유물 발견]을 지속했으나 석기를 미리 파묻는 모습을 2000년 11월 5일 마이니치 신문이 조간에 특종 보도하면서 부정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구석기시대 연구의문점이 생겨 중학교·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물론, 대학입시에도 영향이 미친 일본 고고학계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고, 해외까지 보도되면서 일본 고고학망신을 당한다. 이것은 화산회층형성연대에만 의존하면서, 구석기 연구 검증미숙함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덧붙여 조몬 시대[각주:1] 이후로는 토양을 이용해서 즉시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조작은 불가능하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 中>


2000년 11월 발각 당시 [조작]을 하던 후지무라 신이치는 민간 연구 단체 [도호쿠 구석기 문화 연구소(東北旧石器文化研究所)]부이사장을 지내고 있었으나 그가 조작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아마추어로서 미야기현의 구석기 연구 그룹[석기문화담화회(石器文化談話会)]에 들어갈 때부터다. 해당 그룹은 일본에서 전기 구석기존재 가능성을 주창하고 있던 고고학자들과 후지무라 같은 재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발굴 조사팀이었다. 

이때부터 후지무라는 조작이 발각되는 약 25년간, 속속 구석기 유물들을 파내면서 그룹의 필수적인 인물로 평가되었고 [신의 손]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마침 [고고학적 대발견]을 읍의 홍보관광으로 연결하고 싶어 한 현지 관계자로부터도 환영받았다.

그러나 발견된 유물의 90% 정도자신의 손에 의해서 표면 채집되거나 발굴된 것이며, 남의 손에 의해서 발굴된 것은 그가 미리 빚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파내 보여 주거나 묻혀 있던 석기는 스스로 사전다른 유적답사해서 모은 조몬 시대의 석기대부분이라고 추측된다. 다만, 그 유적은 도호쿠 지방 어딘가의 장소 같았으나 완전히 추적되어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이미 날조된 가짜유물과 유적은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홋카이도 일부 지역이나 미나미칸토(南関東地方)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특종으로 지적된 것은 미야기현 카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및 홋카이도 소신후도자카(総進不動坂) 유적이었으나 이곳뿐만 아닌 후지무라와 연루모든 유적에 대한 재조사가 시행되었는데, 유물에서 있을 수 없는 흠집과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의로 철에 부딪힌 흔적이 발견된다. 또, 일부 유적에 대해 재발굴을 하고 발굴되어 있던 조작 석기발견됨에 따라 조작이 확정된다. 이 때문에 카미타카모리 유적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취소된다.

말 그대로 아마추어 하나의 광역 어그로가 일본 고고학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창 신의 손으로 불리면서 잘나가던 시절 후지무라의 모습(우측 확성기 들고 있는 남성)>


일본 열도[전기 및 중기 구석기] 연구는, 그 정도의 석기는 일본에 없을 것이라는 비판을 애초 받고 있었으나 후지무라의 발굴 성과에 의해 자신감을 얻어 1980년대 초부터 조작이 발각되기 전에는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시작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축7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조작이 발각되면서 후지무라의 성과를 바탕으로 구축된 일본의 전·중기 구석기 연구는 한마디로 완벽하게 망했고,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는 [학설의 근간이 무너졌다]해산까지 한다. 심지어 날조 유적이 학회에서 말소될 뿐만 아니라 일본사 검정을 마친 교과서에는 석기 기록마저 지워지게 됐다.

중국, 한국, 북한과 같은 역사 교과서 문제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나라들은 각각 국내 언론에서 해당 사건을 [일본인들이 역사왜곡하고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 연구가만문제가 아니라 일본인의 역사 인식 자체원인이 있다]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참고로 한국구석기 역사는 짧게는 30만 년, 길게는 70만 년이다.


<조작 발각 후, 기자회견을 한 후지무라(좌측 노란색 옷). 본인도 낯깎였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예전부터 여러 고고학자 등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오랫동안 이러한 사태를 바로잡지 못하였는지, 일본 고고학 협회는 사건 발생 후 특별 위원회를 구성해 조사를 시행하였고 2003년 5월보고서를 펴냈다.

조작된 석기나 출토 상황을 관찰하면, 화쇄류 속에서 출토되는 등 부자연스러운 유물이나 유적이었음이 명백했지만, 정작 연구진은 자기네들 마음대로 편리한 해석을 함으로써 그런 점들을 깡그리 무시했다. 심지어 수십 킬로미터떨어진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의 절단면이 서로 우연히 일치한다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발굴 성과신통치 않아도, 이상하게도 후지무라가 도착하면 다음 날 아니면 그 다음 날[대발견]이 발생하는 것. 그것도 일본의 휴일인 골든위크 중에 대발견이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그 대발견이 후지무라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모두 바보는 아니라서 현장에서 발굴 작업하는 고고학 애호가의 일부에게 혐의도 받고 있었으나, 일개 아마추어가 증거나 확증도 없이 의심제기하는 것조차  꺼려지는 상황이 되면서 반증·반론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거기에 일본 정부는 관련 유적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석기를 문화청(文化庁) 주최 특별전전시하는 등, 이들 연구를 비판 없이 환영하면서 사건을 조장하고 방조하는 역할을 한다.

본래 인류의 보편적 가치유산으로서 취급되어야 할 역사적 물건에 대해서 그 대부분이 관광자원관점에 치우친 형태로 지역주민에게 인식되어 상업적인 효과를 우선시하도록 취급되어 온 실태가 이번 사건으로 그 추악한 모습이 드러났다.

덧붙여 일본 고고학 협회의 전·중기 구석기 문제 조사 특별 위원회 최종 보고를 통해서 후지무라의 조작 범위는 구석기 시대를 넘어 조몬 시대까지 이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후지무라에 대한 고발검토되었지만, 현행법으로는 를 묻기 어렵다며 보류되었고, 2003년 후쿠오카현의 고고학자들이 위계 업무 방해 혐의로 고발하였으나 센다이 지방 검찰청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사건 후, 후지무라는 즈이간지(瑞巌寺)11월 말까지 몇 주일 정도 체류하다가 그 후 후쿠시마현의 정신병원에 잠시 입원했었다. 병세를 이유로 입원처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당시, 메이지 대학 명예교수이자 일본 고고학 협회 특별위원이었던 도자와 미츠노리(戸沢充則, 1932~2012)면회하여 조작 사건을 저지른 이유와 그 밖에 대한 고백을 얻은 것 외에 일절 모든 면회를 사절한다. 후지무라 본인의 주장으로는, 공명심(?)으로 날조를 시작했으나 [신의 손] 등으로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압박감에 조작을 계속해 버렸다고 한다.

2001년 2월에는 아내이혼하였는데, 가족은 이 사건을 원인으로 외부로부터 엄청난 비판에 시달렸다고 한다.

후지무라는 일명 다중인격으로 불리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발병하여 장애판정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손가락 훼손하였으며, 2003년 입원한 병원에서 만난 여성재혼한다.

후에 후쿠시마현의 장애인 취업지원 NPO에서 근무하였으며, 유적 등의 조작에 관한 기억정신 질환으로 현재 기억나지 않는다고 본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2010년 11월 아내의 치료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상기한 NPO을 퇴직하였고, 이듬해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한때 피난 생활을 하기도 한다. 

2019년의 시점에서는 미나미소마시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다.




  1. 縄文時代: 일본의 신석기시대 중 기원전 1만40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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